정부와 여당이 대형마트의 새벽 배송을 14년 만에 허용하기로한 9일 서울 시내 한 대형마트에 배송 안내문이 붙어 있다. 대형마트 새벽 배송 금지 규제는 2012년 전통시장·골목상권 보호와 근로자 건강권·휴식권 보장을 명목으로 도입됐으나 지난 8일 더불어민주당과 정부, 청와대가 고위당정협의회를 열어 대형마트 새벽 배송 허용을 골자로 한 유통발전산업발전법 개정을 추진하기로 했다. 2026.02.09 뉴시스
“골목상권을 살린다면서 이렇게 뒤통수를 치는 법이 어디에 있습니까.”
경기 부천에서 편의점을 운영 중인 이호준씨(46)는 대형마트 새벽배송 허용 추진 소식을 접한 뒤부터 가게 50m 앞에 버티고 있는 이마트가 더욱 불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씨는 “대형마트 의무휴업제 도입 후 휴일에 계란, 우유 등을 사려는 손님들을 위해 물품을 진열대에 많이 놓고 있다”면서 “대형마트 새벽배송을 허용하면 의무휴업일 효과도 사실상 없어지게 되고 그 손실은 고스란히 우리들에게 돌아올 것이다. 편의점의 메리트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고 답답해했다.
정부와 여당이 14년 간 굳게 닫혀 있던 대형마트의 새벽배송 빗장을 풀기로 결정하면서 소상공인 업계의 반발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9일 관가에 따르면 더불어민주당과 정부, 청와대는 전날 6차 고위당정협의회를 열고 대형마트 새벽배송 허용을 뼈대로 한 유통발전산업발전법 개정을 추진하기로 했다. 박수현 민주당 수석대변인은 “현재 유통법상 영업 규제는 오프라인 비중이 높던 시기에 도입돼 오프라인 유통 기업에만 적용되고 있다”며 “온·오프라인 규제 불균형을 해소해 공정한 경쟁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았다”고 말했다.
2012년 유통산업발전법이 개정되면서 대형마트와 기업형슈퍼마켓(SSM) 대상 의무휴업일과 영업시간 제한이 도입됐다. 전통시장을 보호한다는 취지였지만, 규제 사각지대에 있는 쿠팡 등 대형 온라인 플랫폼의 비정상적인 성장이라는 역효과를 불러온 것도 사실이다.
지난주 당정 비공개 협의회에서 추진 소식이 전해질 때만 하도 ‘설마’했던 소상공인계는 우려가 현실에 가까워지자 발등에 불이 떨어진 모양새다. 특히 동네 슈퍼마켓과 편의점은 그야말로 ‘비상’이다.
경기 양주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정연희(58)씨는 “쿠팡이 새벽 배송을 하면서 손님이 절반 이상 줄었다. 대형마트까지 허용 된다면 정말 걱정”이라며 “쿠팡과 달리 대형마트인 이마트, 롯데마트는 모두 집 근거리에 있다. 새벽 배송을 하면 이들의 볼륨이 훨씬 커진다”고 우려했다.
정씨는 “라면은 이미 쿠팡에 뺏겼다. 콩나물, 두부, 간단한 채소가 생존법이었는데 이것도 곧 롯데마트, 이마트가 가져갈 것”이라며 “당사자들 이야기도 듣지 않고 당정이 협의를 할 수가 있느냐. 이제 우리는 담배와 술 외에는 팔 것이 없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씨는 “중소형 골목상권을 살리지 않고 왜 대형마트를 살리는 방식을 (쿠팡의) 대안이라고 생각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동아 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이번 개정안은 대형마트의 기존 오프라인 의무휴업일을 유지하면서 온라인 배송과 포장, 반출은 자유롭게 허용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전통시장과 골목상권의 반발을 의식한 당정청은 중소상공인 단체가 참여하는 유통산업 경쟁력 강화 방안을 마련한다는 구상이지만 성난 민심을 달래기엔 부족한 모양새다.
이성원 한국중소상인자영업자총연합회 사무총장은 “가장 분노스러운 지점은 정부와 여당이 스스로 주장했던 것마저 앞뒤가 안 맞는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라며 “홈플러스 사태는 MBK가 인수할 때부터 막강한 부채 때문에 그렇게 된 건데 김 의원은 입법 취지를 설명하면서 (홈플러스 사태도) 대형마트 규제 때문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얘기를 하더라”고 비판했다.
이충환 전국상인연합회장은 “1차 가공식품은 그래도 경쟁력 있다고 보는데 공산품은 이미 끝났다. 공격적인 마케팅이 시작되면 안 가던 고객들도 대형마트로 향할 것”이라며 “이제는 시장은 단순히 놀러오는 용도가 될텐데 그것으로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 되겠느냐”고 내다봤다.
소상공인계는 이번 조치가 대형 유통채널 간 긍정적인 경쟁을 부추기는 것을 넘어 아예 이들이 골목상권에 입성할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는 꼴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차남수 소상공인연합회 정책개발본부장은 “생태계는 다양성이 소멸되고 온라인은 쿠팡, 오프라인은 이마트라는 큰 공룡 두 마리가 대한민국 유통 생태계를 좌지우지 할 것”이라면서 “여러 이해관계자들이 모이는 충분한 논의가 전제돼야 한다. 시점을 정해놓고 하는 상생협의안은 안 된다”고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소상공인계는 설 명절 이후 본격적인 입법 저지 투쟁에 나설 계획이다. 소상공인연합회를 포함한 각종 단체들은 공동 대응에 뜻을 모으고 관련 실무 협의를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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