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계기업, 나눔엔 ‘짠손’]<상>대기업 그늘 숨어 ‘면죄부’ 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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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1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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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장에 소홀… 명품업체 중 1억원 이상 기부 단 1곳



글로벌 경제위기가 지속되면서 세계적으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CSR)’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위기 극복을 위해 정부가 재정투자를 늘리면서 정부의 금고는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결국 복지와 양극화 해소를 위해 기업이 나서야 한다는 인식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중국, 브라질 등 신흥시장에 진출한 글로벌 기업들은 해당 국가에서 CSR 활동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사업의 기회마저 잡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하지만 한국에 진출한 외국계 기업들은 그간 기부금을 포함한 CSR 활동에 상대적으로 무관심했다. CSR에 대한 요구가 국내 대기업에만 집중되면서 외국계 기업은 사실상 ‘면죄부’를 받아온 셈이다.

○ 업종별로 기부금 천차만별

동아일보와 한국CXO연구소의 조사 결과를 보면 외국계 기업들 간에도 업종별로 기부금 수준의 차이가 큰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전반적인 경기불황으로 기부금이 줄었지만 제약업은 영업이익 대비 3.6%를 기부해 조사 대상 업종 중 CSR 실적이 좋았다. 한국노바티스가 영업이익의 7.5%(21억3410만 원)를 기부했고 한국오츠카제약(5.1%), 바이엘코리아(5.0%), 한국베링거인겔하임(4.7%), 한국화이자제약(2.9%) 등도 번 돈 중 상당한 액수를 기부금으로 내놓았다. 국내 제약업계의 한 관계자는 “국내에 생산시설이나 연구개발(R&D)센터를 운영하지 않는 외국계 제약사들이 이익금의 상당액을 기업이미지 제고를 위해 내놓은 것”이라고 말했다.


외국계 제약업계의 기부가 유독 많은 것을 마케팅 측면에서 보는 시각도 있다. 도현명 임팩트스퀘어(CSR컨설팅 기업) 대표는 “일부 외국계 제약업체는 병원이나 병원이 운영하는 재단에 기부를 하면서 자사의 제품을 선택받기 위한 홍보 마케팅으로 활용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명품이나 수입차 브랜드가 기부에 인색하다는 것은 이번 조사를 통해 분명히 드러났다. 명품 업종 중 루이뷔통이 지난해 2억1100만 원을 낸 것을 제외하고는 1억 원 이상 기부한 곳이 없었다. 국내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브랜드인 구치(5650만 원), 스와로브스키(4640만 원), 한국로렉스(3700만 원), 버버리코리아(2220만 원) 등은 1억 원이 채 안 됐다.

이번 조사 대상 50곳과는 별도로 불가리코리아, 스와치그룹코리아, 시슬리코리아, 프라다코리아, 맥쿼리증권, ING생명보험은 지난해 감사보고서를 통해 확인된 기부금이 한 푼도 없었다. 대표적 명품 브랜드인 샤넬은 유한회사여서 감사보고서를 작성하지 않아 조사 대상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CSR 활동을 거의 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이 업체들은 △본사 차원에서 기부를 진행한다(불가리코리아) △기부금의 영수증 처리를 하지 않았다(프라다코리아) △기부금을 기타 계정에 포함시켰다(시슬리코리아, 맥쿼리증권, ING생명)고 해명했다. 스와치그룹코리아는 “기부금에 대해서는 본사 정책상 답변할 수 없다”고 밝혔다.

○ 한국 시장에 소홀한 해외 기업들

명품 및 수입차 업체들의 기부금이 상대적으로 적은 것에 대해 외국계 기업들은 “기업 구조상 어쩔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해외 본사가 지분의 대부분을 갖고 있는 법인으로 오너가 아닌 법인장이 자의적으로 기부금을 쉽게 늘릴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CSR 분야의 전문가들은 외국계 기업이 한국 시장의 중요성을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하기 때문에 기부금을 포함한 사회공헌 활동에 소홀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김경훈 베인앤컴퍼니 이사는 “외국계 기업이 관심을 갖는 시장은 미국 같은 거대시장이나 투자 대비 효과가 큰 아프리카 등의 극빈국, 성장 잠재력이 큰 시장”이라며 “한국은 이런 분류에 속하지 않아 외국 기업 본사에서 CSR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명품과 수입차 업계의 기부금이 적은 것은 유럽계 기업의 특징이라는 지적도 있다. 본국의 법인세가 낮은 영미계 기업들은 세금을 적게 내는 대신 기업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기부에 적극적인 반면 법인세가 상대적으로 높은 유럽계 기업은 개별적인 기부 활동에 소극적이라고 설명했다.

일부 국내 소비자들의 맹목적인 브랜드 충성심이 명품업체들의 콧대를 높였다는 분석도 나온다. 문형구 고려대 교수(경영학)는 “세계적으로 사회공헌 활동을 하고 있는 명품업체들이 한국에서만 기부에 인색한 것은 CSR를 하지 않아도 국내 소비자들이 자신의 물건을 구매한다는 자신감 때문”이라고 말했다.

○ 소비자가 변해야 기업도 변해

이번 조사에서 기부금에 대한 유럽계 명품 및 수입차 업계의 변화 조짐도 일부 감지됐다. 지난해 전반적으로 기부금이 줄어든 가운데 명품과 수입차 업계의 기부는 약간 늘었다. 2010년 5800만 원을 기부한 루이비통코리아는 지난해 2억1100만 원을 내놨다. 펜디코리아도 2010년에는 한 푼도 기부하지 않았지만 지난해에는 3000만 원을 기부했다. 오일선 한국CXO연구소 소장은 “인색한 명품업체에 대한 질타가 잇따르자 일부 업체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외국계 기업의 사회공헌 활동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결국 소비자의 인식 변화와 CSR 활동을 적극적으로 알리는 일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조언한다. 김 이사는 “CSR를 잘하는 기업이 한국에서 성공한다는 인식이 확산돼야 외국계 기업도 사회공헌에 관심을 갖는다”고 지적했다.

민간뿐만 아니라 기업과 접촉이 많은 정부 부처가 국내에 진출한 외국계 기업의 사회공헌 정도를 공개적으로 발표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다. 도 대표는 “금융감독기관이 현재 외국계 금융기관에 대해서는 사회공헌을 직간접적으로 요구하는 것처럼 다른 업종에 대해서도 관련 부처가 사회공헌 정도를 주기적으로 체크해 유도하는 방법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세진 기자 mint4a@donga.com  
이서현 기자 baltika7@donga.com  
정효진 기자 wiseweb@donga.com  
#외국계 기업#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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