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인회계사는 괴로워”…증권집단소송 우려 업무강도 강화

  • 입력 2005년 3월 31일 17시 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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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회계법인의 공인회계사 A 씨는 지난달 등골이 오싹한 전화를 받았다. “당신 딸이 ○○중학교에 다닌다며? 몸조심 하라고 해라.” 목소리의 주인은 자신을 한 기업의 투자자라고 밝혔다. A 씨가 이 회사에 대해 ‘감사(監査) 의견 거절’ 결정을 내림에 따라 주식이 휴지조각으로 변하게 됐다며 협박한 것. “사정이 딱한 건 이해하지만 적당히 감사할 수 없습니다.” 올해 1월 1일부터 증권집단소송제가 시행되면서 나타난 이런 풍속도는 드문 일이 아니다. 감사 결과에 대한 회계법인의 책임이 무거워지면서 공인회계사들은 업무 강도가 세진 데다 기업과 투자자들의 반발을 사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

▽위협에 시달리는 회계사=12월 결산 상장 또는 등록법인 가운데 3월 30일까지 감사 의견 거절이나 부적정 판정을 받은 회사는 20개사. 사업보고서 제출 마감일은 3월 31일이지만 아직 4개사가 접수하지 않은 점을 감안하면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의견 거절이나 부적정 판정을 받으면 증시에서 퇴출된다. 상당수는 부도로 이어진다. 성진산업 등 일부 회사는 이미 부도를 냈다.

이 때문에 기업 대표가 직원을 동원해 회계법인에 압력을 가하거나 일반 투자자들이 회계사 개인에게 신체적인 위협을 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삼일회계법인 김영식(金永植) 부대표는 “지난달 소액 투자자들이 몰려와 항의 농성을 하는 바람에 경찰에 보호 요청을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회계법인을 더욱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투자자들의 실체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 머리를 짧게 자른 건장한 ‘깍두기 청년’들이 일반 투자자라고 주장하며 회계법인 사무실에 드러눕기 일쑤다.

회계법인에 비정상적인 협상안을 제시하는 ‘읍소형’ 기업들도 있다.

삼정KPMG 정연상(鄭然常) 부대표는 “자본이 잠식된 한 기업의 대표는 ‘급전을 마련할 테니 감사 결정을 연기해 달라’고 사정하기도 했다”며 “다음날 회사 통장에 거액이 들어와 잔액을 이 수준으로 유지하라고 했더니 돈이 바로 사라져 버렸다”고 전했다.

이 회사는 감사의견 거절 결정을 받았다.

▽깐깐해진 회계법인 감사=회계법인의 감사가 강화된 직접적인 계기는 증권집단소송제. 부실 감사를 한 것으로 확인되면 피해를 본 모든 주주에 대해 회계법인과 회계사가 민형사상 책임을 져야 한다.

한국공인회계사회 관계자는 “회계업계 매출규모 2위였던 산동회계법인이 대우그룹 부실 감사 여파로 2000년 11월 공중 분해된 악몽이 남아 있다”며 “집단소송제에 걸리면 똑같은 일을 당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회계법인들은 부실 감사를 막기 위해 다양한 대책을 시행하고 있다. 삼정KPMG는 올해 감사 결과를 분석하는 심리실 직원을 20% 이상 늘렸다.

일부 회계법인은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회사의 감사를 아예 맡지 않는다.

김영식 부대표는 “감사 수임료를 다 받지 않아도 좋으니 공정하게 감사를 하라고 회계사들을 독려하고 있다”며 “하지만 회계사들이 아무리 열심히 해도 회사가 조직적으로 공모하면 분식회계를 찾아내는 게 쉽지 않다”고 말했다.


고기정 기자 koh@donga.com

김선우 기자 subli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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