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株主 이익 먼저 챙겨라” 투자-경제활력 시들

  • 입력 2005년 3월 8일 17시 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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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미(英美)식 주주 자본주의 도입 7년의 부작용을 성찰할 시기가 됐다는 경제 전문가들의 인식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학습비용 과다(過多)론’이다. 이들은 한국이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주주 자본주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음을 인정한다.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다. 하지만 전략부재, 한국 경제 특유의 장점 무시, 국내자본 역(逆)차별 등의 요인이 어우러지면서 주주 자본주의 도입으로 얻는 이득보다 부작용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우려를 갖고 있다. 경제 활력의 저하, 신규투자의 감소, 일자리 창출의 미흡, 양극화 등 최근 한국경제의 건강하지 못한 각종 증상 역시 세계 경제 구조의 변화 등 외부변수 외에도 급속한 주주 자본주의 도입과 상당한 관련이 있다는 인식도 적지 않다.》

▽주식시장의 외국인 지배가 갖는 함정=작년 말 기준으로 국내 주식시장에서 외국인이 보유한 지분은 42%. 이는 헝가리(72.6%), 핀란드(55.7%), 멕시코(46.4%)에 이어 세계 4위다. 주주 자본주의의 중심국인 미국은 10% 수준이다.

이처럼 외국인 지분이 높은 것은 1997년 외환위기 직후 주식시장이 패닉(Panic·공황) 상태에 빠져 종합주가지수가 한때 300 선까지 떨어지고 기업이 부채비율을 줄이기 위해 대규모 유상증자를 하는 과정에서 외국 자본들이 싼값으로 한국의 우량기업에 대한 주식을 사들였기 때문이다.

외국인 지분의 급격한 증가는 한국기업의 경영행태를 급격히 바꿔놓았다.

긍정적 측면에서 보면 외형 키우기만을 생각한 무분별한 투자가 사라지고 기업 재무제표와 경영진의 의사결정도 투명해졌다. 투자자들의 권리도 크게 신장됐다.

반면 부작용도 컸다. 기업 경영진은 ‘주주 이익’을 외치는 외국인 주주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투자보다는 배당과 자사주(自社株) 매입을 통해 주가를 관리해야 했다. 2001년부터 2004년 10월 말까지 상장기업들이 배당과 자사주 매입에 들인 비용은 48조2000억 원가량이다.

국내 기관이나 투자자들이 주식을 많이 갖고 있다면 기업의 이런 비용은 국민 경제의 입장에서는 ‘부(富)의 효과’를 낳지만 외국인 지분이 높으면 그 효과는 반감된다.

또 적대적 인수합병(M&A)에 노출된 한국기업의 경영진은 기업에 충분한 돈이 있으면서도 투자를 하지 않고 쌓아놓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설비투자 규모는 1996년 수준을 8년째 밑돌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김용기 수석연구원은 “기업의 신규투자 감소는 새로운 사업기회를 찾기 어렵고 한국의 기업 환경이 외국에 비해 좋지 않다는 요인도 작용하지만 한국의 전통적인 경제시스템과 주주 자본주의가 충돌하면서 생긴 여파”라고 지적했다. 기업의 신규투자 저하는 결국 일자리 창출의 부족과 양극화를 불러왔다.


▽기업과 금융의 연결고리 차단=주주 자본주의 시스템에서는 기업이 주로 자금을 조달하는 곳은 주식시장이다. 그러나 한국의 주식시장은 거꾸로 기업의 자금유출 창구가 됐다.

2001년부터 상장기업이 기업공개와 유상증자를 통해 증시에서 조달한 자금은 22조3000억 원으로 기업이 배당과 자사주 매입으로 내놓은 자금 48조2000억 원의 절반 이하다.

은행 역시 외국인이 제일, 외환, 한미은행을 인수하고 국민, 하나은행 등에서 외국인 지분이 높아지면서 기업대출을 축소하고 있다.

외국계 은행은 최근 5년간 대출자금 중 기업대출이 차지하는 비중을 1998년 82.9%에서 2003년에는 49.6%로 낮췄다. 이는 우리은행 등 내국계 은행이나 국민 하나은행 등 혼합계 은행의 축소 폭보다 훨씬 높다.

윤창현 명지대 무역학과 교수는 “외국자본이 들어와 관치금융으로부터의 탈피, 리스크분석능력의 향상, 수익성 위주의 경영 등의 장점을 가져왔지만 은행의 공공적인 성격이 약화되면서 부작용을 낳고 있다”고 지적했다.

▽전략부재의 그늘=경제전문가들은 전략부재의 사례로 국내 금융자본의 육성 실패를 꼽는다.

증권연구원 신보성 연구위원은 “은행에 공적자금을 투입하면서 나중에 정부가 은행 지분을 소화할 주체 즉, 기관투자가나 연기금을 육성하는 데 소홀했다”며 “최소한 공적자금을 더 투입해서라도 투신회사들을 정상화시켰다면 우량기업의 주식이 외국자본에 헐값으로 넘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연기금의 주식투자 등 활발한 자본시장 참여와 사모펀드(PEF)의 육성도 진작 서둘렀어야 했다는 것.

전략부재의 책임은 경제 관료에게만 있지는 않다.

김병주 서강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정치권이나 언론도 투입된 공적자금의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데 관심을 갖지 않고 회수율만 문제를 삼아 경제관료들이 은행의 수익성을 높여 은행 주가를 끌어 올리는 데만 신경을 쓰도록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이 과정에서 증권, 보험 등 제2금융권 육성은 소홀해졌다.

국내 자본에 대한 역차별도 많은 부작용을 야기했다. 투자자 보호를 위한 각종 장치를 도입하면서 경영권 보호를 위한 제도를 도입하지 않거나 1980년대 폐쇄경제 시대에 만든 각종 대기업규제 조항을 놔둔 채 주주 자본주의 시스템상의 기업규제도 추가로 도입하면서 국내 기업집단은 이중규제를 받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정문건 전무는 “지난 7년간의 경험을 토대로 한국경제 특유의 역동성과 영미식 체제의 투명성과 윤리성을 절충한 한국 고유의 경제운용 시스템을 모색하지 않으면 한국경제의 활력은 계속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했다.


이병기 기자 eye@donga.com

▼“국내-외국자본 공정경쟁 룰 만들때”▼

주주 자본주의에 대한 반성과 대안을 모색하는 경제전문가들의 움직임에 대해 경제 관료들은 공식적으로는 언급을 삼가고 있다.

자칫 정책실패를 인정하거나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한국의 개방의지가 퇴색한 것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고위 공직자로서 부작용을 공개적으로 인정한 것은 올해 1월 뉴브리지 캐피탈이 제일은행을 매각했을 때 했던 이헌재(李憲宰) 전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의 발언이 유일하다.

그는 “외환위기 상황에서 제일은행 매각은 불가피했지만 선진금융기법 도입 효과는 전혀 얻지 못했다. 뼈아픈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경제 관료들 사이에서도 개선책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서서히 형성되고 있다.

재경부의 한 국장은 “한국 경제의 생존을 위해 영미식 주주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국내 기업보다 외국자본을 우대하는 환경이 만들어졌다”며 “최소한 국내자본과 외국자본이 공정하게 경쟁하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제도적인 개선책도 추진되고 있다.

토종자본을 육성하기 위해 사모펀드(PEF) 관련법이 지난해 국회를 통과했다. 우리금융지주 매각시기가 연기된 것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지난 7년간의 개방에 대해 ‘이득’이 ‘부작용’보다 훨씬 컸다고 생각하는 관료들도 적지 않다.

김석동(金錫東) 재경부 금융정보분석원장은 “새로운 시스템을 운용할 만한 준비가 부족해 여러 문제가 나타난 것은 사실이지만 투명성이 개선되는 등 긍정적인 측면도 많았다”며 “현재 드러난 부정적인 측면은 ‘비용’으로 보고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공종식 기자 k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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