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홍훈/학벌을 점수화하지 말자

  • 입력 2003년 11월 3일 18시 29분


국가인권위원회가 최근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4대 대기업들은 신입사원을 채용할 때 서울 소재 대학과 지방대학 등을 대학의 서열에 따라 차별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여자대학의 가중치를 남녀공학보다 낮게 하는 등 성 차별도 있었다.

이런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공공연한 비밀에 속한다. 폭넓게 확산돼 있는 우리 사회의 학벌구조가 이런 차별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구체적으로 우리 사회의 학벌구조는 고착화된 대학의 서열을 통해 유지되며, 이는 더 높은 서열의 대학에 진학하기 위한 극렬한 입시경쟁을 증폭시키고 있다. 그 결과 중등교육은 이미 황폐화됐으며 대학도 학점과 졸업장 취득의 장소로 변질됐다.

▼기업들 ‘차별철폐’ 의무있어 ▼

경제와 사회, 교육을 연결짓는 이 고리를 통해 학벌 풍토는 기업뿐 아니라 학계 관계 법조계 등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배어들었다. 같은 이유로 학벌 및 학력에 따른 차별은 매년 수학능력시험 전후에 반복되고 있는 성적비관형 자살, 공교육 붕괴, 사교육비 급증, 그리고 강남의 아파트 가격 폭등 등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학벌이나 학력에 근거한 차별행위에 대해 대기업들이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한국 경제의 성장 과정이 갖는 특징이나 세계화 과정 속에서 증대되는 기업의 역할에 비춰볼 때 한국의 대기업들은 경제와 사회 개혁의 선구자일 수밖에 없고, 또 그래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현실이다.

그러나 한국 기업의 인사 관행에는 아직까지도 감춰져 있는 것이 많다. 이제 대기업들은 회계의 투명성 확보와 같은 차원에서 채용 및 승진 등 인사 관행에 대해서도 외부에 떳떳하게 공개할 수 있을 정도로 투명성을 제고해야 한다. 물론 한국 사회의 복합성을 고려하면 대기업이 이렇게 가기 위해서는 공공부문의 학벌구조 개혁도 병행돼야 할 것이다.

기업이 명문대 졸업장 같은 학벌에 집착하는 것은 대학에서 기업이 원하는 전문능력을 갖춘 인재를 길러내주지 못하거나 기업 스스로 어떤 능력의 인재가 필요한지 모르는 데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다. 대학교육과 노동시장간의 이런 괴리가 해소돼야 각 기업이 진정한 능력 지표를 개발해 거기에 맞는 전문성을 갖춘 인재를 선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와 같이 대학교육이 무의미해진 상황에서는 이런 괴리가 쉽사리 해소될 수 없다. 그리고 이런 대학교육의 공동화가 상당부분 입시경쟁의 후유증이자 학벌구조의 산물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가장 근본적이고 시급한 과제는 학벌 극복을 위해 인재할당제 등을 고려하고, 대학의 서열을 완화하며, 입시제도에 대한 거국적인 개혁을 논의해 가는 일이다.

최근 일부 경제관료 등이 아파트 가격을 안정시키기 위해 특수목적고나 자립형 사립고를 제안하고 있다. 이는 입시 경쟁의 ‘숭고한 가치’를 인정하고 이를 더욱 확대하자는 주장인 셈이다. 이들은 입시 경쟁이 학벌이라는 독점 구조를 낳는 하부구조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퇴행적 사고가 지속되는 한 기업은 어쩔 수 없이 지금보다 더 철저하게 대학 서열과 학벌을 점수로 환산하려 들 것이다.

▼ 개인 전문성 공정경쟁 보장돼야 ▼

입시경쟁 강화 방안을 논할 게 아니라 기업 등 사회 현장에서의 경쟁의 공정성을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대학의 이름에 따른 경쟁이 아니라 개인의 전문성과 능력에 따른 진정한 경쟁이 돼야 한다. 광복 이후 계속돼 온 부패 현상의 이면을 뒤집어 보자면, 그 현장에는 언제나 명문대 출신들이 있지 않았는가. 물론 명문대의 공로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수능 점수와 대학 졸업장에 의해 권력 돈 명예를 분배하는 사회구조에 대수술을 가할 때가 된 것이다.

이제 기업이든 공직사회든 주입식 교육을 통한 단 한 번의 평가로 그 사람이 발휘할 일생의 활동이나 능력을 가늠하고 구속하는 봉건적인 관행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

홍훈 연세대 교수·'학벌 없는 사회'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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