産銀 4000억 만기연장 규정위반 왜?…이사전결로 처리

  • 입력 2002년 10월 15일 18시 32분


산업은행이 현대상선에 대출해 준 전반적인 과정에 대한 감사원의 감사가 시작된 시점에서 박상배(朴相培·부총재) 당시 산은 이사의 관련 규정 위반 사실이 드러났다.

이날 드러난 규정 위반은 “대출집행과정에 실무자들이 절차상 잘못을 저지르기는 했으나 대출 승인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는 그동안의 산은 주장을 정면으로 뒤집는 사안. 대출 결정권자인 임원이 스스로 규정을 어겨 가며 대출을 결정한 것이다.

즉 만기연장은 사전에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일인 만큼 산은 부총재(당시 정철조·鄭哲朝)가 주재하는 신용위원회의 충분한 심의를 거치도록 규정하고 있는데도 박 이사는 이 같은 규정의 취지를 정면으로 어기면서 월권을 한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월권 사실 자체라기보다는 박 이사가 월권을 한 이유다.

산은은 4000억원의 당좌대월을 만기연장할 때 이를 일단 갚은 후 다시 빌리는 형식을 취해 신규대출이 다시 일어난 것처럼 서류를 꾸몄다.

이를 위해 만기연장을 하면 현대상선이 굳이 일시 상환할 필요도 없는 4000억원을 급전을 구해가며 갚으려 했다. 사실 당시 현대상선은 급전 4000억원을 쉬 동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나아가 3000억원밖에 구하지 못하자 산은은 마치 4000억원이 다 들어온 것처럼 장부를 꾸미는 ‘무자원(無資原) 입금처리’라는 무리수까지 두었다.

한 시중은행 간부는 “무자원 입금처리는 실무 은행직원으로서는 쉬 엄두를 내지 못할 일로 고위층의 지시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며 “산은의 경우 신규대출의 형식을 빌려 담당 임원이 전결처리하도록 하기 위해 장부를 조작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굳이 무자원 입금처리라는 무리수를 둘 이유가 없다는 설명.

즉 △‘임원 전결’ 요건을 만들기 위해 사실 관계와는 다른 ‘신규 대출’ 형식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 일시 상환이 이뤄졌으며 △현대상선의 재무형편으로 4000억원이 다 일시 상환되지 않으니 무자원 입금처리까지 이뤄졌다는 추론이 설득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산은이 갖은 무리를 해가며 ‘임원 전결’로 처리할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이에 대해 다른 은행 임원은 “박 이사가 만기연장 안건을 신용위원회에 올려 통과시킬 자신이 없었을 만큼 설득력이 떨어지는 대출이었거나, 혹은 산은 내부 임원들에 대해서도 보안이 필요한 성격의 비밀대출이었을 수 있다”고 말했다.

당시 산은 임원들은 대부분 현대상선에 대한 당좌대월 사실을 잘 알지 못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 감사과정에서는 누구의 지시로 무자원 입금처리가 됐는지, 현대상선 대출결정에 어느 선까지 개입되었고 누가 배제되었는지, 무리한 임원전결처리의 배경은 무엇인지 등을 밝혀야 할 것으로 보인다.임규진기자 mhjh22@donga.com

신치영기자 higgle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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