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업개혁 더 늦출순 없다]낙하산 인사가 '노조 저항'키웠다

  • 입력 2000년 11월 26일 18시 34분


‘한국전력 사태’를 통해 드러난 것은 공기업 구조조정의 최대 장애물이 강력한 노조의 저항이라는 사실이었다. 한전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공기업 노조는 어느 기업 노조보다 막강한 위력을 과시한다. 정부는 “비대한 공기업 노조의 이기주의가 개혁을 막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공기업의 내부 사정을 웬만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과연 정부가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느냐”고 반문한다. 노조의 힘을 키운 책임은 상당 부분 정부측에 돌아가기 때문이다.

▽‘낙하산 사장’의 한계〓기획예산처가 98년 공기업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짜면서 제시한 방안의 핵심에는 공기업 경영진의 이른바 ‘낙하산 인사’ 폐지가 들어 있었다. 전문성 있는 경영진을 선임해야 스스로 개혁 드라이브를 걸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이 건의는 결과적으로 철저히 무시되고 말았다. 이후에도 공기업의 낙하산 인사는 거의 고쳐지지 않았다.

기획예산처 실무자들은 “공기업 개혁의 본질적인 처방이 빠지는 바람에 구조조정에 한계가 많았다”고 털어놓았다.

낙하산 인사는 현 정부가 야당 시절이었던 이른바 문민정부 당시 비판했던 병폐.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현 정부도 이를 답습하고 있다.

전국 공공운수서비스노련 노항래 정책부장의 “반개혁적 낙하산 인사로 경영진을 채워놓고 공공부문 구성원을 마구잡이로 공격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지적에 대해 정부가 할 말이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치권 입김이 전문성 무시〓정부는 그동안 사장공모제를 도입하는 등 공기업 운영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치기 위해 여러 개혁 조치를 취해왔다. 그러나 문제는 사장 추천위원회 등의 제도가 오히려 정치권 등에서 날아온 낙하산 인사를 정당화하는 요식행위 역할을 했을 뿐이라는 점이다.

공기업의 인사가 정치적으로 연결돼 있다 보니 인사철만 되면 갖가지 소문이 무성하다.‘누구는 누구 라인이더라’는 얘기가 나돈다. 관련 정부 부처에서는 ‘누구를 어디로 보내고, 누구는 어디에 앉힌다’는 ‘고차 방정식 풀기’에 분주하다. 이 과정에서 정치권의 흥정과 타협으로 하루아침에 자리가 바뀌기도 한다. 전문성은 염두에 없다.

이종수 한성대 교수는 “권력 주변의 식객을 공기업 책임자로 앉히는 고질적 관행을 타파하지 않고는 결코 공공부문의 개혁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통성이 없는 경영진은 노조에 발목이 잡힐 수밖에 없다. 낮에는 노조와 대치하지만 밤에는 노조와 타협하면서 반대급부를 지불하는 ‘거래’가 이뤄지는 것이다.

9월에 공기업에 대한 특감을 실시했던 감사원의 한 관계자도 “노조가 경영진의 약점을 이용, 과도한 요구를 하고 이 같은 방식이 먹혀 들어가자, 요구수준을 높이면서 집단이기주의에 빠져 강성으로 변모했다”고 말했다.

감사원이 공기업에 대해 감사한 뒤 징계를 받은 한국산업안전공단 대한주택보증㈜ 농업기반공사 마사회 근로복지공단 등은 모두 사장이 관련 정부부처 출신 인사들이었다.

특히 마사회의 경우 99년 노사협약을 통해 노조가입 대상을 2급 이하 전직원으로 확대한 결과 임원을 제외한 직원의 97%가 노조에 가입해 있을 정도로 노조가 절대권력을 행사했다. 경영관리층에 속하는 2급 직원과 경영진을 위해 종사하는 감사업무 담당직원, 임원 비서 등까지 노조원이다.

▽실적 위주 구조조정〓공기업 개혁의 또하나의 문제는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실적 위주의 구조조정 방식이다. 개별 공기업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언제까지’라는 시한을 정해놓고 밀어붙이는 것에 대해 전문가들은 “강력한 의지는 좋으나 그만큼의 ‘구조조정 인프라’가 돼 있느냐”고 지적한다.

정부 관계자는 “그동안 정부의 공기업 개혁과정에서 개별 공기업의 사정을 감안하지 않고 일정 등에 쫓긴 일방적인 지시가 없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기획예산처에서 공기업의 구조조정을 담당하는 직원은 불과 10명 안팎. 이 인력으로 100여 개 공기업의 복잡한 내부 사정을 훤히 꿰뚫고 제대로 된 개혁안을 짜내기란 물리적으로 힘들다.

공기업 구조조정 사령탑인 기획예산처 정부개혁실장 자리가 ‘기피직’이 된 것은 공기업 개혁의 어려움을 잘 보여준다. 한국개발연구원(KDI)에서 오랫동안 정부개혁 분야를 연구하던 이계식(李啓植)박사는 정부개혁실장 자리에 앉았다가 안팎의 거센 저항에 시달리다 8월에 사표를 제출했다. 기획예산처는 두 차례나 지원자를 공모했으나 마땅한 지원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 직책이 그만큼 힘든데다 ‘악역’을 맡아야 한다는 사정이 알려졌던 탓이다. 공기업 개혁의 ‘험로’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이명재기자>mj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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