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오른 금융변혁]勞政합의 뒤집어보면 국민만 부담

  • 입력 2000년 7월 12일 18시 43분


정부와 금융노조의 극적인 타협으로 파업위기에 몰렸던 은행은 외견상 정상을 되찾았다.

정부는 금융지주회사법 제정을 관철시켜 2단계 금융구조조정의 틀을 확보한 것에 만족하고 노조는 관치금융의 폐단을 부각시키면서 조직 및 인력감축을 최소화하는데 성공했다는 입장.

언뜻 보면 노와 정이 모두 이긴 ‘윈―윈 게임’으로 보이지만 이 와중에 개혁의 ‘원칙’은 훼손됐고 국민은 철저히 소외됐다. 노정합의를 뒤집어본다.

▽구조조정 원칙은 있는가〓정부는 당초 개혁을 위한 경제정책은 노사협상의 대상이 아니라고 밝혔다. 그러나 합의문을 보면 대부분 정책과 직결된 것이다. 무조건 밀어붙이면 된다는 악선례를 남김으로써 앞으로 또 다른 갈등이 생길 경우 정부로서는 운신의 폭이 좁아지게 됐다.

합병과 인원 감축을 하지 않기로 한 약속도 아리송하다. 합병과 감축이 능사는 물론 아니다. 그러나 시작도 하기 전에 이 가능성을 배제한다면 구조조정의 취지가 퇴색할 수 있다. 무엇을 위한 구조조정인지 헷갈리는 대목이다. 아예 구조조정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이 더 솔직한 접근이었을 것이다.

▽흔들리는 시장 자율 구조조정 〓내년부터 실시되는 예금부분보장제를 앞두고 보호한도를 당초 2000만원에서 상향키로 한 것은 ‘시장기능에 따른 금융권 재편’이라는 금융개혁 원칙을 근본적으로 훼손한 조치라는 지적. 이 제도의 취지는 예금의 안전성에 신경을 쓰는 자금이 비우량은행에서 우량은행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금융구조조정을 유도하자는 것. 이번에 예금 보호한도를 확대키로 함으로써 시장원리가 작동할 여지는 그만큼 축소된다.

▽러시아 경협차관〓러시아 경협차관 문제가 불거져 나와 국민을 어리둥절케 했다. 정부는 91∼92년 러시아와 수교하는 대가로 현금 10억달러와 소비재 4억7000만달러를 제공했다. 은행이 지급보증을 섰다. 러시아가 외환위기에 빠지면서 대지급 사태가 터진 것. 작년말 현재 이자를 포함해 13억5000만달러로 불어나자 은행들은 줄기차게 정부의 지급을 요구해왔다. 이 손해를 정부가 은행에 물어주는 데에는 나름대로 일리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새정부 들어 생긴 부실도 많은데 하필이면 과거로 돌아갔느냐 하는 의혹이 남는다. 책임을 이전의 정권에 전가하려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은행장은 어디 있었나〓이번 협상과정에서 은행장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파업찬반 투표를 실시하기 전까지만 해도 주택 등 일부 은행장들이 파업을 막으려 애쓰는 장면이 목격됐지만 파업이 본격화하자 은행장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뒷전으로 물러섰다.

이번 사태가 노사간 갈등이 아니라 노정간 전면전 양상을 띠고 있어 은행장들의 역할이 극히 제한된 것은 사실. 하지만 은행 파업은 고객 신뢰상실과 이탈로 이어져 해당은행의 주가와 경영실적에 곧바로 영향을 미치는 중대사안이다.

은행의 운명을 좌우할 현안에 대해 뒷짐만 지는 듯한 모습으로 일관한 것은 ‘관치’를 자초하는 우리 은행의 씁쓸한 자화상이다.

▽결국 국민부담〓공적자금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로 한 것은 국민의 희생을 감수하겠다는뜻이다. 그 부담은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온다. 정부는 공적자금 추가 조성액을 10조원선으로 최소화한다는 방침이지만 금융부실을 해소하려면 어림잡아 40조∼50조원이 필요할 것이라는 게 금융권의 추산. 은행파업으로 국가신인도가 훼손돼 우리 경제에 주름이 생긴 것은 국민 전체가 떠맡아야 할 ‘보이지않는 부담’이다.

<박원재·박현진기자>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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