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채널A에서 인기리에 방영됐던 ‘천하제일장사2’에서는 놀라운 장면이 펼쳐졌다. 작은 몸집의 레슬러 정지현(43)이 몸무게가 족히 두 배는 나갈 거 같은 야구 선수 출신 양준혁(57)을 모래판에 눕혀버린 것이다.
경기 시작 전만 해도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같았다. 씨름은 체급 경기이지만 이날은 레슬링 팀의 정지현과 야구팀의 양준혁이 일대일 대결을 벌였다. ‘골리앗’ 양준혁은 경기 시작과 함께 힘으로 내리눌렀다. 정지현의 한쪽 다리가 들리면서 승부는 그대로 끝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정지현은 왼쪽 다리로 한동안 버텼다. 그리고는 되치기를 시도해 거구 양준혁을 모래판에 누여 버렸다. 정지현은 “레슬링은 밸런스와 기술의 스포츠다. 레슬러들은 자기보다 힘센 사람들을 얼마든지 제압할 수 있다”고 했다.
정지현이 채널A 천하제일장사에서 거구 양준혁을 쓰러뜨리고 있다. 채널A 화면 캡처‘만두귀’를 가진 사람들과는 시비 붙지 말라는 말이 있다. 만두귀를 가진 대표종목이 바로 레슬링이다. 모래판이 아닌 아스팔트 바닥에서는 정말 큰일이 날 수도 있다. 그래서 레슬러들은 시비를 먼저 알아서 피하는 편이다. 정지현도 “내가 키도 작고 만만해 보이긴 한다. 그래서 어릴 때는 시비를 거는 사람도 아주 가끔 있었다”면서 “하지만 언젠가부터는 시비를 걸려 본 적이 없다”며 웃었다.
정지현은 초등학생 때 기계체조 선수였다. 이후 유도를 거쳐 중학교 3학년 때 뒤늦게 레슬링에 입문했다. 유도 선수 시절 정지현은 패배가 익숙한 선수였다. 당시 유도 종목에서 가장 가벼운 체급이 48kg급이었는데 정지현은 몸무게가 채 40kg도 나가지 않았다.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았고. 힘에서 달리니 기술도 소용도 없었다. 보다 못한 지도자가 레슬링 전향을 권유했고, 그렇게 레슬러가 됐다.
정지현의 2004년 아테네 올림픽 결승전 경기.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레슬러’ 정지현은 승승장구했다. 체조를 하면서 익힌 유연성에 유도 선수로 기른 체력이 합쳐지자 무서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었다. 무명으로 출전한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은 그에겐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다. 레슬링 남자 그레코로만형 60kg급에 출전한 정지현은 결승에서 연장 접전 끝에 로베르토 몬존(쿠바)을 3-0으로 꺾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불과 21살의 나이에 세계 정상에 우뚝 선 것이다.
하지만 다음 목표였던 올림픽 두 번째 금메달은 끝내 손에 잡히지 않았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8강에서 누르바키트 텐기즈바예프(카자흐스탄)에게 1-2로 패했다. 순간의 방심이 화를 불렀다. 정지현은 “약 5초 정도를 남기고 상대 선수를 던졌다. 속으로 이겼다고 생각했는데 5초를 버티지 못하고 역전당했다”라며 “경기든 인생이든 정말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라는 걸 절감했다”고 했다.
이후 2012년 런던 올림픽을 누구보다 간절하게 준비했다. 하지만 런던에서도 8강에서 아제르바이잔 선수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하고 말았다. 정지현은 “정말 열심히 준비했고 컨디션도 좋았다. 하지만 올림픽이라는 무대의 압박을 이겨내지 못했다”고 했다.
비록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그는 세 차례나 올림픽 무대를 밟은 몇 안 되는 레슬러다. 2014년 인천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에서는 71kg급으로 체중을 높여 금메달을 땄다.
정지현과 그를 지도한 안한봉 감독. 동아일보 DB예전 태릉선수촌이나 현재 진천선수촌에서 레슬링은 훈련 강도가 가장 센 종목이다. 땀을 비 오듯이 흘리는 건 기본이고 신물이 나올 정도로 뛰고 구른다.
10년 넘게 선수촌 밥을 먹은 정지현에겐 운동이 지겹지 않았을까. 그는 “땀을 흘리고 숨이 가빠 져오는 게 여전히 즐겁다. 레슬링은 알아갈수록 더 재미있다”고 했다.
선수에서 은퇴하고 지도자 생활을 하던 그가 2023년 말 서울 서초구 강남역 근처에 ‘짐오브레슬러’라는 레슬링 전문 체육관을 세운 이유다. 관장이자 서무, 행정, 심지어 청소까지 1인 다역을 하는 그는 매일 저녁 회원들과 함께 매트를 뒹군다. 정지현은 “레슬링은 대중적인 운동도, 쉽게 배울 수 있는 운동은 아니다. 기본자세를 제대로 익히는 데만 2, 3개월이 걸린다”라며 “하지만 하나씩 기술을 익혀가며 테이크다운(상대를 바닥에 쓰러뜨리는 기술)을 성공시킬 때의 쾌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체력과 자신감이 커지는 효과도 있다”라고 했다.
정지현과 그의 레슬링 체육관을 찾은 손석구. 정지현 인스타그램최근 젊은 층을 중심으로 UFC 등이 큰 인기를 끌면서 그라운드 기술이 필요한 레슬링을 배우려는 사람이 많이 늘고 있다. 정지현은 “누구나 강해지고 싶은 욕구가 있지 않나. 젊은 친구들도 있지만 50대의 중년층에서도 체력 단련을 위해 레슬링을 배우는 분들도 있다”라며 “개인적으로는 여성분들에게 추천한다. 보통 레슬링을 상남자의 운동이라고 하지만 적은 힘으로 상대를 제압할 수 있기 때문에 여성들에게는 호신용으로 제격”이라고 했다. 실제로 미국과 일본 등에서는 여성들 사이에 레슬링이 꽤 인기가 높다. 일본 여성 레슬링은 올림픽에서 금메달도 자주 딴다.
선수에서 은퇴한 뒤에도 그는 꾸준한 단련으로 선수 시절 못지않은 몸을 유지하고 있다. 정지현은 2023년 그리스에서 열린 베테랑 세계선수권대회 남자 70kg급에 출전해 금메달을 땄다. 앞서 그는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그리고 아시아선수권 대회 금메달을 딴 상태였다. 여기에 현역 시절 성공하지 못했던 세계선수권대회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명예’ 그랜드슬램을 이루게 됐다. 정지현은 “현역 시절 세계선수권대회에 자주 출전하지 못했다. 동메달만 두 번 땄는데 뒤늦게나마 기회가 생겨 베테랑 세계선수권대회 우승을 하게 됐다”며 웃었다.
‘작은 거인’ 정지현이 운동 마니아인 개그맨 김병만과 함께 컨셉 사진을 찍었다. 정지현 인스타그램레슬링 체육관은 퇴근 시간 이후에 일반인을 대상으로 운영하기에 그는 오전, 오후에는 시간이 있는 편이다. 정지현은 이때를 빌려 UFC 선수 출신 김동현, 세계소방관대회 챔피언 홍범석, 피지컬100 시즌2 우승자 아모띠 등과 함께 체육관을 돌며 운동을 한다. 가수 션이 만든 ‘언노운 크루’에서는 달리기도 한다.
정지현은 달리기와 기능성 운동을 결합해 젊은 층을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하이록스(HYROX)’ 대회에도 출전할 생각이다. 하이록스는 1km 러닝과 8개 기능성 운동을 반복해 승부를 가리는 실내 스포츠다. 정지현은 “선수 시절 매일 위액이 나올 정도로 훈련을 했다. 옛날 생각하면 정말 질리게 운동을 했던 것 같다”라면서도 “그래도 운동을 할 때가 즐겁고 재미있었다. 지금도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운동하면 더 힘이 나고 재미있다. 나는 영원히 몸을 써야 하는 운명인 것 같다”라고 했다.
여전히 탄탄한 몸을 유지하는 정지현. 정지현 인스타그램정지현은 일주일에 4, 5회는 운동을 한다. 한 번에 1시간을 해도 집중력 있게 한다. 정지현은 “건강한 몸을 만들려면 힘든 과정이 있어야 한다. 근력을 키우려면 주 3회는 운동을 해야 한다. 여기에 살을 빼려면 뛰어야 한다. 편하게 운동하면서 몸이 좋아지길 기대해선 안 된다”라고 했다.
그의 다음 목표는 레슬링의 매력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다. 이를 위해 체육관을 잘 운영하면서 레슬링 유튜브도 다시 시작하려 한다. 정지현은 “언젠가는 다시 레슬링계로 돌아가 후배들이 내가 따지 못한 두 번째 올림픽 금메달을 따는 데 힘을 보태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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