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을 활용해 국악계 저변을 확대하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사진은 국립국악원이 올 3월 AI로 노랫말을 복원해 선보인 공연 ‘행악과 보허자’의 한 장면. AI가 한시 350여 편을 학습한 뒤, 노랫말 없이 선율만 전승된 보허자 3장에 맞는 노랫말을 생성했다. 국립국악원 제공
“국악기 5대 이상이 쓰인 웅장한 합주곡을 만들어 줘.”
최근 기자가 구글의 생성형 인공지능(AI) 음악 창작 플랫폼인 ‘뮤직FX’에 이렇게 입력하니, 국악은커녕 일본 전통극 가부키에서 들어봤음 직한 음악이 튀어나왔다. 일본 고유 악기인 ‘오쓰즈미(大鼓)’ 특유의 경쾌한 타음이 낯선 장단으로 연주됐고, 대나무 피리 ‘후에(笛)’처럼 날카로운 선율이 흘렀다. 글로벌 AI가 ‘국악’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탓에 벌어지는 일이다.
하지만 최근 국립국악원이 개발 마무리 단계인 최초의 국악 전용 생성형 AI에 “가야금과 대금, 해금, 피리, 아쟁, 소리북, 거문고 등 국악기 7종이 합주하는 음원을 만들어 줘”라고 명령을 내리자 10초도 안 돼 단아한 분위기의 국악 선율이 흘러나왔다. ‘거문고 장단 추가’를 선택하자 기존 음원에 잘 어울리는 중중모리장단의 거문고 연주가 순식간에 더해졌다. 국악원 소속의 한 연주자는 “단순히 ‘국악 느낌’을 흉내 내는 수준을 넘어 실제 전문 국악인이 연주하는 것처럼 들려 놀랍다”고 했다.
● 국악기별 구조화된 데이터 7000여 개 구축
국악원은 국내 AI 음악 생성 스타트업 뉴튠과 손잡고 올 5월부터 국악 AI 개발에 나섰다. AI가 완성도 높은 음악을 만들려면 악기별 음색과 주법, 표현하는 정서 등에 관한 세부 데이터를 학습해야 한다. 하지만 서양 클래식 음악과 달리 국악엔 그게 없다는 게 문제였다.
박승순 뉴튠 최고크리에이티브책임자(CCO)는 “구글의 실시간 음악 생성 AI 모델인 마젠타는 약 200시간 분량의 국제 피아노 콩쿠르 실연 음원과 그를 구성하는 요소별 연주 데이터를 쌍으로 확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홍세아 국립국악원 학예연구사는 “국악은 주로 구전심수(口傳心授·입으로 전해 주고 마음으로 가르침)로 전승돼 왔고, 출판본이나 전승 계보에 따라 음표가 달리 표시되기도 해 AI가 일관되게 학습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고 했다.
결국 국악원 소속 연주자들이 올 7월부터 3개월간 매일 8시간씩 학습용 데이터로 쓰일 합주곡 1000여 곡을 녹음했다. 한 명씩 분리된 녹음실에서 같은 곡을 연주 및 녹음하는 방식으로 가야금, 대금 등 주요 악기는 물론이고 바라, 운라 등 다소 낯선 특수 타악기까지 총 24종의 악기별 멀티트랙 데이터 7000여 개를 구축했다. 녹음한 음악은 종묘제례악, 여민락 등 정악과 춘향가, 남도민요 등 민속악, 황병기 김기수 박범훈 등 저작권자의 허락을 받은 창작국악을 아울렀다. 음원엔 AI가 학습할 수 있도록 박자나 분위기, 악기별 특징 등 핵심 요소에 대한 메타 데이터를 입력했다. 자진모리장단은 8분의12박자로, ‘한(恨)’의 정서는 ‘슬픔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비장미’로 입력하는 식이다.
● “국악 왜곡하던 기존 AI 문제 개선”
국악 생성 AI가 개발돼 사용자가 확대되면 국악이 글로벌 음악 창작 플랫폼에서 ‘동아시아풍 음악’으로 퉁쳐지던 문제를 일부 해소할 것으로 기대된다. 홍 연구사는 “지금은 해금의 경우 농현(弄絃·현악기의 즉흥 꾸밈음)이 잡음으로 인식돼 AI가 삭제해버리면서, 중국 전통 현악기 ‘어로’로 연주한 듯한 음원이 만들어지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국악 생성 AI는 이르면 내년 하반기 온라인을 통해 공개될 전망이다. 아직 “악보에 없는 미묘한 시김새(앞뒤 꾸밈음)나 순간적 호흡까지 생성해 내지는 못한다”는 평가가 나오지만 개발이 마무리되면 국악과 서양 음악을 결합한 크로스오버 음악을 창작하는 것도 가능해질 전망이다. 국악원 측은 “한국문화정보원과 협력해 향후 가야금 병창 등 성악 영역까지 AI를 확장할 계획”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