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디 앨런 감독의 영화 ‘젤리그’(1983년)는 1920, 30년대 미국 사회에서 큰 화제를 모은 레너드 젤리그란 인물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표방한다. 서진(西晉)의 좌사(左思·250?∼305)도 전국시대 형가(荊軻)를 노래하며 제목에서부터 역사적 사실에 입각한 작품임을 밝힌 바 있다.
형가는 연나라 태자의 부탁을 받고 진시황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자객이다(본 칼럼 37회 참조). 시 제목만 보면 역사 기록에 근거해 형가의 행적을 재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시 속의 형가는 역사 속 인물이라기보다 시인의 생각과 가치 판단이 깊이 개입된 존재다. 청나라 학자 하작(何焯)은 이 연작시를 두고 이전의 영사시(詠史詩·역사적 사실이나 인물을 제재로 한 시)와 달리 시인의 마음속 생각을 읊은 변화된 형식의 작품이라고 평가했다(‘義門讀書記’).
영화 ‘젤리그’에 나오는 1930년 5월 20일자 신문 1면에 실린 젤리그 관련 보도는 다큐멘터리처럼 보이도록 당시 신문 지면을 본떠 영화용으로 제작한 것이다.
조이앤무비 제공영화에선 주인공 젤리그의 파란만장한 연대기가 펼쳐진다. 젤리그는 누구 곁에 서느냐에 따라 얼굴과 말투, 심지어 신념까지 바뀌는 카멜레온 같은 인간이다. 실제 뉴스 화면과 실존 인물의 인터뷰를 교묘히 끼워 넣어 역사 기록물처럼 보이지만, 이는 현대인의 정체성 상실을 풍자하려는 감독의 의도에 따라 치밀하게 편집된 허구일 뿐이다. 때문에 영화 평론가들은 이 영화를 다큐멘터리의 외양을 빌려 허구를 사실처럼 보이게 만든 ‘모큐멘터리’의 대표작이라고 평가한다.
시인은 형가를 빙자하여 타고난 신분과 집안 배경이 사람의 능력을 규정하는 당시 사회 구조의 불합리성을 비판했다. 역사 기록을 소환해 자신의 문제의식을 은연중 드러낸 셈이다. 이에 비해 영화는 시대 한복판에 감독 자신의 분신을 집어넣어 사회 풍자의 효과를 극대화한다. 다만 시 속 형가는 실존 인물인 반면, 영화 속 젤리그는 감독이 만들어낸 완전히 허구의 인물이란 점에서 차이가 있다.
문화적 배경은 다르지만 시인과 감독은 모두 기록의 권위를 활용해 주인공의 가짜 연대기를 그럴듯하게 만들어냈다. 시가 사실의 외피 아래 시인의 의중을 담은 의도된 역사라면, 영화는 사실 기록의 형식을 빌려 감독이 현실 풍자를 시도한 만들어진 역사라고 하겠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