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제인 오스틴 낳은 ‘숨은 오스틴’ 8인

  • 동아일보

제인 오스틴이 영감 받은 ‘에블리나’
‘오만과 편견’보다 35년 앞서 출간… 작품에 영향 준 여성 작가 8人 탐구
남성 평론가의 로맨스 과소평가로, 문학사에서 女작가의 이름 지워져
◇제인 오스틴의 책장/리베카 롬니 지음·이재경 옮김/552쪽·2만2000원·휴머니스트

제인 오스틴이 1813년에 발표한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오만과 편견’의 한 장면. ‘제인 오스틴의 책장’을 쓴 저자는 주인공 엘리자베스(오른쪽)와 다시가 서로를 오해하는 전개가 1778년 출간된 프랜시스 버니의 소설 ‘에블리나’와 흡사하다고 분석한다. UIP코리아 제공
제인 오스틴이 1813년에 발표한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오만과 편견’의 한 장면. ‘제인 오스틴의 책장’을 쓴 저자는 주인공 엘리자베스(오른쪽)와 다시가 서로를 오해하는 전개가 1778년 출간된 프랜시스 버니의 소설 ‘에블리나’와 흡사하다고 분석한다. UIP코리아 제공
사생아로 태어난 영국의 시골 소녀 에블리나는 예절이나 관습에 대해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어른이 된다. 훗날 그와 사랑에 빠지는 남성은 예의 바르고 신분 높은 오빌 경. 사실 서로에 대한 첫인상은 최악이었다. 오빌 경은 에블리나의 부족한 경험을 오해해 “나약한 소녀”라고 평가하고, 그 말을 친구에게서 전해 들은 에블리나는 “무례한 남자”라며 화를 낸다.

여기까지 들으면, 어딘가 친숙하게 느껴지는 이야기. “영문학사 최초의 위대한 여성 작가”로 꼽히는 제인 오스틴의 대표작 ‘오만과 편견’에서 주인공 남녀가 사랑에 빠진 과정과 얼추 비슷하다. 그런데 소설 ‘에블리나’는 ‘오만과 편견’보다 35년이나 일찍 출간됐다. 실제 오스틴은 ‘에블리나’에서 큰 영감을 받았다고도 전해진다. 그런데 이 소설을 쓴 18세기 여성 작가 ‘프랜시스 버니’의 이름이 오늘날 낯선 이유는 뭘까.

이 책은 이처럼 오스틴의 작품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지만 문학사에서 지워진 8명의 여성 작가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마리아 에지워스, 해나 모어, 샬럿 레넉스 등 오스틴보다 먼저 탁월한 문학성을 보여줬던 여성 작가들을 파헤친다. 이를 통해 “오스틴이 위대한 작가라는 데는 이견이 없지만, 영문학사 ‘최초의’ 위대한 여성 작가는 아닐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친다.

미국에서 희귀서 전문회사를 운영하는 저자는 여성 작가들의 여러 판본을 샅샅이 뒤져가며 오스틴 작품과의 연관성을 밝혀낸다. 가령 오스틴의 소설 ‘노생거 사원’ 속 여주인공이 탐독하는 한 고딕 소설은 앤 래드클리프가 1794년 펴낸 ‘우돌포의 비밀’이다. 여주인공이 자기 삶의 통제권을 되찾고자 분투하는 내용을 그린 작품이다. 저자는 이 소설이 ‘노생거 사원’의 서사와 메시지, 심지어는 문체에도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한다.

책은 단순히 문학사 속 여성의 존재를 복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오늘날 정전(正典·canon) 목록에서 여성 작가의 작품이 보기 드문 이유를 구조적으로 따지며 논지를 확장시킨다. 저자는 18세기 여성이 남성보다 더 많은 소설을 출판했고 상업적으로도 성공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하지만 이들 작품 대부분은 정전 반열에 들지 못했다. 저자는 그 원인으로 정전이 될 작품을 주로 남성 평론가들이 정해 왔다는 걸 꼽는다. 여성 작가들의 작품이 예술성이 떨어져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여성 작가들이 두각을 보인 로맨스 장르는 남성 평론가 중심 사회에서 과소평가돼 왔다. 하지만 당대 여성들에게 사랑과 결혼은 단순히 감정을 넘어 경제적, 법적 생존과 직결될 수밖에 없었다. 영국 대문호 윌리엄 워즈워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준 시인 샬럿 스미스는 도박꾼 남편을 감옥에서 꺼내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글을 썼다고 한다. 이는 로맨스가 쉽게 쓰이고 가볍게 읽힌 장르가 아닌, 여성의 삶을 진지하게 다룬 문학이었음을 일깨운다.

남성 작가 위주의 문단이 유독 여성 작가들에게 가혹한 평가 잣대를 들이대기도 했다. 여성 작가의 경우 최고로 판명 나지 않으면 무대에 오를 기회조차 없었다. “나는 새뮤얼 리처드슨의 소설이 오스틴만큼 훌륭하지 않다는 이유로 그의 작품을 읽지 말라고 주장하는 비평가나 사학자를 본 적이 없다. 그런데 버니는 오스틴과의 결투에 빠짐없이 끌려나와 거기서 지면 정전 명단에서 바로 지워진다”고 꼬집는다. 올해 제인 오스틴 탄생(1775년 12월 16일) 250주년을 맞아, 오스틴 그 너머를 볼 수 있는 근사한 책이다.

#제인 오스틴#여성 작가#영문학사#여성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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