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아이유는 한때 자신을 믿지 못하고 불안한 마음에 폭식증에 시달렸다고 고백한 바 있다. 주현희 기자 teth1147@donga.com
“하버드대 입학 과정에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 나는 하버드대생들과 함께 학교에 다닐 만큼 똑똑하지 않다.”(미국 배우 나탈리 포트먼) “나는 과대 포장된 가수다. 사기를 제대로 쳤다고 생각했다. 열과 성을 다한 것에 비해 돌아오는 대가가 다른 사람에 비해 후하다.”(가수 아이유)
나탈리 포트먼은 2015년 하버드대 졸업식 축사에서 불안했던 자신의 대학 생활을 고백했다. 그는 영화 ‘스타워즈 에피소드 1-보이지 않는 위험’(1999)에 출연 직후 하버드대 심리학과에 입학했지만 대학 생활 내내 자신이 이 대학에 다닐 자격이 없다고 느꼈다. 공부에 압도당해 침대 밖으로 나오는 것조차 힘들었고 교수들과 면담하다 울기도 했다.
2015년 하버드대 졸업식에서 축사하는 배우 나탈리 포트먼. 하버드대 공식 유튜브 화면 캡처 가수 아이유는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혐오하다 결국 폭식증을 앓았던 과거를 고백한 적이 있다. 과분한 인기에 비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고 남을 잘 속이는 재주가 있을 뿐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성공한 스타의 화려함에 감춰진 어두운 이면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들에게는 엄청난 노력을 쏟아붓고도 스스로를 인정하지 못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찬사를 받아도 정작 자괴감에 빠져 ‘난 원래 못났다’ ‘남들이 속고 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로 꼽히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도 “평생 해 온 연구이긴 하지만 과분한 주목을 받으니 마음이 너무 불편해서 마치 사기꾼이 된 것 같다”고 했다.
이런 현상이 큰 업적을 이룬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열심히 노력해서 성취하고도 ‘다른 사람에 비하면 난 아무것도 아니다’라며 스스로를 평가절하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때 나타나는 자기 비하는 겸손과는 엄연히 다르다. 하찮은 자신의 밑천이 드러날까 과하게 두려워하며 의심하고 자책하다 불안과 우울함에 시달린다면,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완화할 수 있는지 살펴보자.
● 스스로 ‘한심하다’ 생각하는 실력자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느껴 봤을지 모른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경력에 비해 실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들킬지 모른다는 느낌 말이다.
충분히 능력 있고 성취도 이뤘지만, 실제 자신의 못난 모습이 들통날까 봐 두려워하는 것을 가면 증후군(imposter syndrome)이라고 한다. 능력 있는 척하는 가면을 쓰고 사람들을 속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정식 진단명이 아니기에 ‘가면 현상’이라고 칭하는 학자들도 있다. 국내 조사는 없지만, 미국에서는 약 70%가 살면서 한 번쯤 가면 증후군을 겪어 봤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
충분한 실력을 갖추고도 자신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끝없이 비하하고 괴로워하는 태도는 겸손과는 분명 다르다. 게티이미지 가면 증후군 증상을 겪는 사람들은 자신이 무능하다고 믿지만 사실은 고(高)성과자일 가능성이 크다. 1978년 가면 증후군 개념을 처음 소개한 미 조지아주립대 심리학과 폴린 클랜스, 수잰 아임스 교수는 이 같은 사람들의 특징을 △자기 능력 부정(자기 의심) △다른 사람의 칭찬 무시 △실패에 대한 과도한 걱정 △최고가 되고 싶은 욕구 등으로 정의했다. 탁월한 능력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정작 성공해도 자신의 실력을 믿지 못한다. 실패했을 때 느끼는 강한 굴욕감과 수치심을 피하려고 과로하다 번아웃을 겪거나 우울증에 빠지기 쉽다.
◆가면 증후군을 겪는 사람들 생각
·내 능력으로 성공한 게 아니라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다 ·다른 사람들이 나보다 훨씬 똑똑한 것 같다 ·이번에 좋은 성과를 냈더라도 다음에는 잘하지 못할 것 같다 ·가까운 사람들이 내가 무능하다는 것을 알게 될까 두렵다 ·주변에서 날 믿어줄지라도 프로젝트나 시험에 성공하지 못할까 두렵다. ·누군가 인정하는 말을 해줘도 잘 받아들이지 못하겠다 ·새로운 일을 맡으면 실패할 것 같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자료: 가면 현상 단축형 척도(CIPS-10)
● 자기 불신 사고 회로 무한 반복
처음 연구가 시작된 미국, 유럽에서는 가면 증후군이 주로 사회적 차별을 겪는 성공한 여성에게 주로 나타난다고 봤다. 하지만 미 캘리포니아주립대 연구진이 2023년까지 발표된 가면증후군 관련 전 세계 연구 108건을 분석한 결과, 성별에 따른 차이는 상당히 작았다. 특히 아시아 문화에서는 이런 경향이 더욱 두드러졌다. 성별 문제라기보다 겸손을 미덕으로 여기는 문화에서 가면 증후군 증상이 더욱 폭넓게 나타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가면 증후군을 겪는 사람들은 ‘자기 불신→집착적 노력(과로)→성공해도 실력이 아닌 운으로 돌림→자기 불신’이라는 사고 회로를 무한 반복한다. 자기 불신 때문에 과제가 닥치면 잘 해내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으로 괴로워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대부분 집착적으로 노력하거나 일부는 아예 게으름을 피우며 벼락치기를 택한다. 실패하더라도 ‘미뤄서 못 했지, 무능한 게 아니다’라는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서다. 두 유형 모두 우려했던 것보다 괜찮은 결과를 얻더라도 ‘운이 좋았다’거나 ‘역시 다음엔 더 노력해야겠다’며 자신을 다그치고, 다시 자기 불신의 악순환에 갇힌다.
그래서 이들은 면접에 합격하거나 어려운 학위를 따고도 ‘아무나 받아줬겠지’ ‘내가 했으니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 ‘누가 도와줬으니 사실상 남이 다 해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여기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은 나를 실력 있는 사람으로 보더라도 내가 생각하는 모습과 격차가 크다.
● 어린 시절 가정 환경-불행한 완벽주의 성향에 영향
가면 증후군은 환경과 타고난 성격의 영향을 모두 받는다. 특히 어린 시절에 성취를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칭찬에 인색한 부모 밑에서 자란 경우 더 겪기 쉽다. 이런 아이들은 학교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나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굳혀 간다.
뭔가를 잘해도 주변에서 적절한 칭찬을 받지 못하고, 더 잘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고 자라면 성인이 되어도 ‘난 부족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게티이미지 지나치게 경쟁적이고 업무 관련 지적이 많은 조직에서 일하는 직장인에게도 나타날 수 있다. 완벽함이 기본이고, 모른다거나 도와 달라고 하면 무능하다고 여기는 분위기라면 더욱 그렇다. 자신만의 기준이 엄격한 프리랜서나 창의력이 계속 필요한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완벽주의 성향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완벽주의자에게는 성실함을 바탕으로 목표를 이뤄 가는 좋은 측면도 있다. 그러나 가면 증후군은 부적응적이고 불행한 완벽주의 성향과 훨씬 가깝다.
독일 괴테대 심리학과 연구진은 성인 274명을 대상으로 완벽주의의 여러 속성과 가면 증후군 증상과의 관계를 살펴봤다. 그 결과 ‘학업 또는 직장에서 실패하면 인생 전체가 실패한 것’이라거나 ‘나는 항상 남들보다 뒤처지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완벽주의자일수록 가면 증후군 점수도 높게 나타났다. 또, 원래 완벽하고 싶은 욕구가 별로 없었지만, 부모나 타인의 강요로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사회 부과 완벽주의’ 성향이 높을수록 가면 증후군 증상도 강했다. 대표적으로 불행한 완벽주의 성향으로 꼽힌다.
가면 증후군 증상이 있는 사람은 주변에서 자신에게 실망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실제보다 엄살을 떨며 자신이 더 부족한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게티이미지 실패했을 때를 대비해 처음부터 사람들 기대치를 낮추려고 더 심하게 자기 실력을 비하하기도 한다. 미 웨이크포레스트대 심리학과 연구진은 대학생 95명에게 앞으로 치를 학교 시험에서 몇 등 정도 할 것 같은지 솔직히 답해 보라고 했다. 이어 등수 예측치를 다른 학생들과 공유하겠다고 했더니, 유독 가면 증후군 점수가 높은 학생들은 원래 예측한 것보다 등수를 훨씬 낮췄다. 연구진은 “주변 기대치를 낮춰서 실패해도 무마할 수 있도록 행동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엄살 피우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생각보다 실력 없다’는 소리를 피하기 위한 나름의 생존 전략인 것이다.
● “전문가라면 응당 모든 걸 알아야”
이들은 자신에게만 유독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기 때문에 자기 능력에 대한 비합리적인 신념을 확고하게 갖고 있다. 가면 증후군 증상을 보이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가면 증후군 협회’를 세운 미국이 밸러니 영 박사는 현실에서 만난 여러 가면 증후군 증상을 겪는 사람들을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눴다.
‘전문가 유형’은 특정 분야의 전문가라면 응당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이다. ‘내가 똑똑하다면, 모든 걸 이해하고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감히 전문가라고 칭하려면 학위, 자격증, 경험 등이 차고 넘쳐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남들보다 몇 배의 시간과 노력을 들인다. 그러면서도 모르는 게 여전히 많다고 생각해 자신감이 떨어진다.
‘개인주의자 유형’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 해내는 것만이 진짜 유능한 것이라고 여긴다. 남에게 도움을 받으면 내 능력이 아니고, 무능한 것이라고 인식한다. 함부로 도움을 요청했다가 무능하다고 찍힐까 봐 두려워하기도 한다. 다 끝내고 나서도 ‘내가 이렇게 간신히 해낸 걸 알면 사람들이 날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여긴다.
또 ‘천재 유형’은 배우기 어렵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 앞에 서면 ‘내가 유능했더라면 이미 잘하고도 남았을 텐데, 역시 난 무능하다’고 생각한다. 피나는 노력을 해서 성취를 이루면, 오히려 타고나지 못한 재능이 없어서 그렇다고 여긴다.
● ‘나는 정말 무능할까’ 묻는 메타인지 필요
‘나는 무능하다’ ‘다른 사람보다 열등하다’는 자기 파괴적인 생각을 멈추려면 자기 비하로 시작해 자기 비하로 끝나는 사고 회로를 끊어야 한다.
미 노스텍사스대 연구진은 가면 증후군 증상 완화를 위해 개발한 교육 프로그램을 교수, 기업 임원 등 이런 증상이 있는 65명을 대상으로 3개월간 진행했다. 모든 과정이 끝난 후 어떤 방법이 효과적이라고 느꼈는지 알아보기 위해 이들을 심층 인터뷰했다.
그 결과 이들이 느낀 가면 증후군 해소의 첫걸음은 나에게 가면 증후군 증상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아는 것이었다. 평생 ‘나는 남보다 못났다’는 근거 없는 자괴감에 시달려 온 이들에게는 이런 증상을 명명하는 용어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됐다. 자기가 정말 무능해서가 아니라 환경이나 성격의 영향으로 자기 비하적 사고에 갇혀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한 참가자는 “스스로에게 ‘헛소리 그만해!’라고 외칠 수 있는 권한이 생긴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내가 느끼는 한심함, 무능함을 뒷받침할 만한 객관적 증거가 있는지 자문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됐다. 예를 들어 ‘내가 똑똑했으면 이 일은 진작에 끝냈어야 해’ ‘나는 아는 게 하나도 없어’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면 정말 그런지 따져 보는 것이다. 누가 봐도 엄청나게 일이 많은 상황에서 ‘진작에 끝냈어야 한다’거나 일하는 데 필요한 지식을 ‘전부 다 알아야 한다’는 가정은 누구에게나 가혹할 수 있다. 현실을 왜곡하거나 지나치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따져 볼 필요가 있다.
평생 ‘나는 부족하다’는 생각에 시달려 왔다면, 정말 타당한 근거가 있는 생각인지 내 생각을 차근차근 들여다보는 메타 인지가 필요하다. 게티이미지 이 모든 과정은 내 생각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메타인지와 연결된다. 가면 증후군과 메타인지를 연구하는 리사 손 미 컬럼비아대 버나드칼리지 심리학과 교수는 “메타인지란 실수나 부족한 부분뿐 아니라, 내 성공도 인정하는 능력”이라고 강조한다. 메타인지를 활용해 자신을 평가절하만 하는 생각을 모니터링하는 게 중요하다는 의미다. 불안감 때문에 쓸데없이 노력하는 시간도 줄일 수 있다. 손 교수는 “많은 사람이 ‘난 잘 못해’ ‘그저 운이 좋았어’ 같은 생각들을 메타인지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며 “이는 ‘겸손해야 한다’는 하나의 이미지일 뿐, 내 생각에 오류가 없는지 판단하는 과정이 진짜 메타인지라는 걸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또 참가자들은 비슷한 증상을 겪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더니 이전보다 훨씬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생각으로 고통스러워 한다는 것을 보면서 잘못된 생각 패턴을 고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다른 사람 빼고 나만 못났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자, 주변에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게 됐다. 남에게 질문한다는 것은 무지와 무능을 고백하는 거라고 여겨 혼자 끙끙거리던 사람들이 주변과 소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스스로에게 더 친절해졌고, 더 이상 강하게 몰아붙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다만 도움을 청할 때 유의할 점이 하나 있다. 또 다른 연구 결과에서는 같은 상황에서 같이 경쟁하고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오히려 더 비교하게 돼 불안감을 느끼는 역효과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도움이 필요할 땐 바로 옆 동료보단 나와 다른 환경에 놓여 있는 사람에게 요청하는 게 더 효과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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