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족발 대신 배달된 돼지 한마리…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2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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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사라진 저녁’ 권정민 작가
“우리가 한 일들의 실체와 대면
비인간의 시선으로 인간 그릴 때
숨겨진 모습-이중성 드러나”

권정민 작가의 그림책 ‘사라진 저녁’에서 돼지가 아파트로 온 장면. 돼지 몸통엔 ‘요리할 시간이 없어서요. 직접 해 드세요!’라고 적힌 메모가 붙어 있다. 창비 제공
권정민 작가의 그림책 ‘사라진 저녁’에서 돼지가 아파트로 온 장면. 돼지 몸통엔 ‘요리할 시간이 없어서요. 직접 해 드세요!’라고 적힌 메모가 붙어 있다. 창비 제공
어느 날 아파트 공동현관문 앞으로 살아 있는 돼지 한 마리가 배달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족발을 시킨 904호, 감자탕을 주문한 805호, 돈가스를 배달시킨 702호…. 돼지를 잡아본 적도, 길러본 적도 없는 이들이 돼지를 해치우기 위해 또다시 스마트폰을 든다. 이들은 돼지를 잡을 때 쓰는 ‘우레탄 망치’ ‘전문가용 칼’ ‘바비큐 그릴’ 등을 주문한다. 다음 날 아침 현관문 앞엔 배송 물품이 산처럼 쌓이고, 사람들이 포장을 뜯느라 분주한 사이 돼지는 홀연히 사라진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올해 신설한 ‘2023 대한민국 그림책상’ 대상(픽션 부문)을 받은 ‘사라진 저녁’(창비·2022년)의 줄거리다.

이 그림책을 지은 권정민 작가(43·사진)는 최근 e메일 인터뷰에서 “문명은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훨씬 줄어들고 있는 현실을 비추고 싶었다”고 했다. ‘사라진 저녁’은 팬데믹 기간 구상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주민보다 배달원이 더 많이 타고 있었다. 그때 권 작가의 머릿속에 돼지 한 마리가 덜컥 아파트 앞에 배달되는 장면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아주 작은 일도 타인의 노동력을 빌려야만 하는 손쉬운 선택을 합니다. 그 손쉬운 선택들이 쌓여 결국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기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점점 더 무감각해지는 우리 모습을 들춰보고 싶었어요. 아파트에 배달된 살아 있는 돼지는, 내가 한 일이 무엇인지 그 실체를 대면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16년 첫 그림책 ‘지혜로운 멧돼지가 되기 위한 지침서’(보림)를 출간한 권 작가는 약 10년간 EBS에서 ‘지식채널e’ 등 교양 프로그램을 만든 방송 작가였다. 권 작가는 “그림책은 겉보기엔 단순한 이미지로 구성돼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의미로 짜여 있다”며 “보이는 것과 다른 의미들이 숨겨져 있는 그림책에 매료됐다”고 했다.

그의 그림책은 야생동물과 식물처럼 말 못 하는 존재의 시선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특징이다. 첫 그림책 ‘지혜로운…’은 도심에서 살아남은 멧돼지가 다른 멧돼지들에게 생존 전략을 알려주는 내용이다. 쓰레기통을 뒤지는 멧돼지의 모습과 함께, ‘먹을 수 있을 때 충분히 먹어 둘 것’이라고 말하는 멧돼지의 말은 야생동물과 공존할 수 없는 도시 환경을 비춘다. ‘우리는 당신에 대해 조금 알고 있습니다’(문학동네·2019년)에선 식물의 시선으로 사람들의 하루하루를 들여다본다.

“모두에게 각자 입장이 있지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존재는 한쪽뿐인 경우가 많습니다. 대체로 힘이 센 인간의 이야기만 들리는 게 현실이죠. 그럴 때 나는 목소리를 내지 않는 존재의 목소리를 상상합니다. 결국 인간이 아닌 존재가 인간에 대해 말할 때 인간의 숨겨진 모습, 이중적 모습이 드러난다고 생각하거든요.”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그림책#사라진 저녁#권정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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