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약함으로부터 시작된 ‘키키 스미스’의 예술 세계…동식물과 우주로 뻗어나가다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2월 14일 14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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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작업이 자신을 어디로 데려가는지 두려움 없이 살고 있구나.’

1994년, 독일 출생의 미국 작가 키키 스미스(68)는 어느 날 오랜 활동을 해온 동료 예술가들을 보고 이런 존경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그때 “나 또한 그렇게 살고 싶다”고 생각하며 만든 작품이 ‘자유낙하’.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듯한 여성의 모습을 판화로 찍어낸 작품이다.

키키 스미스(Kiki Smith) ⓒ Chris Sanders
키키 스미스(Kiki Smith) ⓒ Chris Sanders

서울 중구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15일 개막하는 전시 ‘키키 스미스-자유낙하’는 담대하고 도전적인 작품을 만들어온 스미스의 작업세계를 두루 살핀다.

키키 스미스는 1980~1990년대 여성상과 신체를 다룬 조각으로 주목을 받아왔다. 그가 아시아에서 처음 갖는 미술관 개인전인 이 전시에는 조각과 판화, 사진 등 140여 점이 소개된다. 1985년 신체를 9개의 조각으로 그려낸 판화 ‘가진 사람이 임자’, 해골 조각 작품 ‘무제’부터 실크에 꽃 형상을 찍어낸 올해 작품 ‘천국’까지 약 40년간에 걸친 키키 스미스의 여정을 살핀다.

전시는 연대별, 주제별로 섹션을 나누고 않아, 처음 볼 땐 다소 정리되지 않은 느낌이다. 하지만 키키 스미스의 작업 자체가 한 눈에 봐도 자유롭다. 조각, 드로잉 등 방식에 얽매지 않고 여러 실험적 도전을 해왔기 때문이다.

키키 스미스는 정규 미술수업을 받지 않았고, 미니멀리스트 조각가인 아버지와 오페라 가수 어머니 밑에서 자란 영향을 크게 받았다. 14일 화상인터뷰에 응한 키키 스미스는 “예술은 스스로 선언하는 것이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 예술가로 살겠다고 하면 된다. 스스로 감당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라고 했다.

키키 스미스의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소재가 몸이다.

이번 전시에는 신체의 내부 기관을 주철이란 금속을 구부려 만든 ‘소화계’(1988년) 등 인체를 다룬 작품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이런 작업들은 에이즈나 임신중절 등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됐던 1980년대 미국의 시대상을 반영하면서, 작가의 개인사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아버지의 별세와 에이즈에 걸린 여동생의 사망을 차례로 겪으며 생명의 취약함을 온몸으로 느낀 것이다.

몸에 대한 꾸준한 관심은 여성 전신상으로 자연스레 뻗어갔다. 전시장 입구에 놓인 나체 여성 조각상 ‘메두사(2004년)를 필두로 곳곳에는 여성의 몸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작가 자신이 직접 웅크리고 누운 뒤 테두리를 따라 그린 작품 ’꿈‘(1992년), 늑대 배를 가르고 걸어 나오는 여성 형상의 청동 조각 ‘황홀’(2001년) 등이 대표적이다. 모두 여성의 연약한 신체를 전면에 드러내면서 사실은 이런 연약함이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란 걸 알려준다.

몇몇 작품에서 여성들은 어딘가로 추락하고 있는 것도 눈에 띈다. 대표적으로 ‘폭포’(2013년)는 머리를 아래로 길게 늘어뜨린 작가의 사진 위에 나무, 폭포수 등을 드로잉했다.

이진숙 미술사가는 “떨어짐을 받아들인다는 것, 상승을 포기한다는 것은 유한하고 취약한 몸을 인정하는 것“이라며 ”낙하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중력의 법칙이 작용하는 지구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조건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키키 스미스는 인간과 신체의 한계를 받아들이며 동물, 식물, 우주 등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려 한다. 그의 직물 공예 작품 ‘회합’(2014년), ‘하늘’(2012년) 등에 여성과 함께 사슴, 박쥐, 다람쥐, 새, 나무, 빛, 산 등이 두루 등장하는 이유다.

이보배 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는 “자유롭게 유랑하는 듯한 도상과 인간을 넘어 자연과 우주 등 크고 작은 모든 것을 소재로 하는 그의 작품에서 생동하는 에너지를 느끼길 바란다”고 했다.

내년 3월 12일까지. 무료.

김태언기자 bebor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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