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글래디에이터’(2000년)에서 주인공 막시무스 장군(러셀 크로)이 숙청당하고 노예시장으로 끌려갈 때 칼로 깊이 베인 왼쪽 어깨 상처엔 구더기가 붙어 있다. 막시무스가 구더기를 떼어내려고 하자 다른 노예가 그냥 놔두라고 한다. 구더기가 항균 치료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요즘 같은 시대엔 그럴 일이 많이 없겠지만 구더기는 꽤 오래전부터 인류의 외과 의사 역할을 해왔다. 상처 부위에 생기는 염증성 분비물과 죽은 세포는 피부 재생을 방해하지만, 구더기에겐 더없이 좋은 영양분이다. 구더기의 소화 효소엔 세라티신과 디펜신 등 항균 물질이 있어 감염된 상처 치료에 효과적이다.
나폴레옹의 주치의 도미니크 장 라레도 18세기 말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당시 구더기를 활용했다. 1940년대 페니실린 도입 후 구더기의 활용도는 떨어졌지만 지금도 상처 치료가 어려운 당뇨병 환자에게 구더기 요법이 쓰인다고 한다.
독일의 생물학자인 저자는 이처럼 동물의 다양한 역할을 ‘직업’이라 보고, 관련한 50가지 이야기를 전한다. 지뢰 탐지에 활용되는 쥐나 고대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이 일종의 탱크로 동원했던 코끼리 등 뉴스나 역사서를 통해 한번쯤 들어봤을 법한 이야기도 지루하지 않게 정리했다.
책의 전체적인 내용은 그동안 몰랐던 동물의 이야기를 알아가는 재미가 있다. 80년 전 임신 여부를 확인하는 데 쓰였던 아프리카발톱개구리, 등을 핥으면 몽롱해지는 콜로라도개구리 이야기 등도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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