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는 알고 있다 그가 왜 세상을 떴는지[책의 향기]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2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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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일 죽은 자의 이름을 묻는다/수 블랙 지음·조진경 옮김/444쪽·1만9000원·세종서적


2001년 영국 시골 마을에서 한 여성의 시신이 여행용 트렁크 안에서 발견됐다. 시신은 태아처럼 팔과 다리를 웅크린 상태였다. 얼굴과 몸은 심하게 훼손돼 있었다. 영국 경찰은 시신의 유전자, 지문을 분석했으나 영국인 중에선 신원을 확인하지 못했다. 결국 해부학적 지식을 활용해 법률적 문제를 해결하는 법의학자인 저자가 수사에 투입됐다.

약 200개에 달하는 인간의 뼈는 끔찍한 범죄를 밝혀내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저자는 “묻는 사람에게 기꺼이 이야기를 해주는 뼈가
 있고, 끈기 있게 달래서 진실을 털어놓으라고 할 때까지 경계하는 뼈도 있다”며 “뼈는 우리의 삶을 증언하는 마지막 파수꾼”이라고
 말한다. 게티이미지코리아·세종도서 제공
약 200개에 달하는 인간의 뼈는 끔찍한 범죄를 밝혀내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저자는 “묻는 사람에게 기꺼이 이야기를 해주는 뼈가 있고, 끈기 있게 달래서 진실을 털어놓으라고 할 때까지 경계하는 뼈도 있다”며 “뼈는 우리의 삶을 증언하는 마지막 파수꾼”이라고 말한다. 게티이미지코리아·세종도서 제공
시신의 뼈를 분석한 저자는 시신을 20∼25세 여성으로 추정했다. 가슴 한가운데에 있는 세로로 길쭉하고 납작한 ‘복장뼈’의 모양이 그 근거였다. 보통 인간의 복장뼈는 어릴 때 6조각으로 쪼개져 있지만 20대가 되면 3조각으로 합쳐진다. 시신의 복장뼈는 3조각에 가까웠으나 아직 완전히 합쳐진 모습은 아니었기 때문에 나이를 추정할 수 있었다. 저자는 또 시신의 두개골과 치아를 분석해 동아시아 여성일 가능성이 높다고 결론 냈다. 경찰은 법의학적 소견을 바탕으로 국제형사경찰기구(인터폴)와 공조수사를 벌였고 시신은 21세 한국 여성으로 확인됐다. 영국 여행 중 머물던 민박집 주인에게 살해당했던 것이다.


범죄 수사에서 법의학의 힘은 강력하다. 피부, 지방, 근육, 장기가 다 썩어 흙으로 돌아간 뒤에도 뼈는 쉽게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영국의 저명한 법의학자인 저자는 자신이 직접 수사에 참여한 사건들을 풀어놓는다. 저자가 범죄의 실마리를 찾는 이 논픽션은 영국의 의사이자 작가인 아서 코넌 도일(1859∼1930)의 소설 셜록 홈스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생생하다.


뼈는 범죄자가 말하지 않는 진실을 이야기한다. 이른바 ‘간병인 살인사건’이 대표적인 사례다. 어느 날 한 영국인 여성은 과거 자신이 노부인의 시신을 인근 건물의 뒷마당에 묻었다고 경찰에 자수했다. 여성은 약 20년 전 자신이 간병하던 노부인이 죽은 채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을 우연히 발견했지만, 경찰과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아 암매장했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하지만 저자는 시신의 목뼈에서 둔기로 최소 2회의 타격이 가해졌을 때 생기는 골절 흔적을 찾았다. 사고사가 아닌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증거였다. 여성은 결국 자신이 노부인을 살해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억울한 죽음의 진실이 법의학으로 인해 밝혀지기도 한다. 영국의 11세 소년이 스스로 목을 매 숨진 사건이 어느 날 벌어졌다. 유서는 없었다. 경찰은 가족과 친구들의 진술을 바탕으로 소년이 학대받은 증거가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엑스레이 촬영 결과 정강이뼈에서 가늘고 비스듬한 3개의 ‘해리스선’이 발견됐다. 해리스선은 발육이 중단됐다 재개됐을 때 뼈에 남는 흔적이다. 시신이 스트레스로 인해 성장에 문제를 겪었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단서였다. 결국 경찰은 재수사에 돌입했고, 소년이 가족의 학대로 인해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물론 법의학이 모든 사실을 밝혀낼 수 있는 건 아니다. 저자는 유골을 분석하다 인간이 아닌 동물의 뼈라는 사실을 알고는 허망해하고, 심하게 훼손돼 범죄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뼈를 두고 좌절한다. 하지만 뼈에 남은 사소한 단서는 망자가 죽은 이유를 밝혀내는 결정적인 역할을 해내기도 한다. 어쩌면 법의학자란 범죄 피해자의 가족이 기댈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 아닐까. 시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고, 망자가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 알아야 한을 풀어줄 수 있을 테니.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뼈#법의학#범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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