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펼치고 침묵 끝내는 세 작가의 오랜시간…‘오랜만이야’ 전시회

전승훈기자 입력 2021-11-09 11:51수정 2021-11-09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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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야!”. 시작하는 연인 사이에는 단 하루도 오랜만으로 느껴지고 수십 년 만에 다시 만난 어린 시절의 친구는 오랜만이지만 어제 만난 듯 느껴진다. 10년이라는 세월도 그렇다. 십년 동안 준비해 온 새로운 예술세계를 선보이는 김태규, 사마손, 정직성 작가의 3인전 ‘오랜만이야’(Long Time No See)가 열린다. 28일까지 서울 강동구 천호대로 최세영 갤러리.

자연순환운명학을 창시한 호호당(好好堂) 김태규 작가는 10년이라는 시간이 ‘자아가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여 또 다른 변화를 맞이하기 시작하는 단위’라고 설명한다. 암담한 시절을 겪은 사람에게는 어떻게 살아야 할 지 희미하게 빛이 비추기 시작하게 되는 시간이고, 열정 가득한 마음으로 좌충우돌의 시절을 지낸 사람에게는 좋은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하는 때이기도 하다. 화려한 시절을 보내던 사람이라면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때이고, 모든 것을 이룬 사람은 인생의 허무함과 방향 상실을 맛보는 세월이기도 하다.

김태규 작가는 다양한 경험 끝에 이제 60대 중반에 새로운 길에 나섰다. 어린 시절 그림에 재능이 있었고 화가를 꿈꿨지만 바램대로 미대에 진학할 수 없었다. 명문대 법대에 진학했고, 금융권에서 경력을 쌓고 잠시 컨설팅 사업에 몸담기도 했다. 동서고금의 문화와 과학을 섭렵하여 ‘자연순환운명학’을 만들어낸 그는 어린 시절 화가의 꿈을 작년에 첫 전시회를 열면서 무려 60년 만에 이루었다. 호호당이라는 별호(別號)를 짓고 남부끄럽지 않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라면 수만 번이라도 붓질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지 딱 10년 만의 일이다. 김태규 작가의 풍경화는 지난 세월 속에서 만났던 오래된 풍경들이다. 수채화 물감과 함께 전통 재료인 먹을 써서 산수화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순간순간 변하지만 늘 아름답고 신비로운 바람과 구름과 물의 흐름을 통해 작가의 마음속에 아련하게 남아있는 찬란한 순간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고 있다.

사마손 작가는 청년 시절 서양화와 판화를 전공하고 2011년까지 네 차례 개인전을 열며 활동하다가 지난 10년 간 침묵하면서 자신의 소망과 염원을 형상화하는 방식을 탐구하였다. 두텁고 꼼꼼한 채색을 통해 만들어진 층이 강렬한 색채의 대비를 형성하면서 긴장감이 느껴지는 공간이 탄생한다. 이 공간은 소중한 의미를 담은 사물들을 보관하는 비밀의 방이기도 하면서 드리워진 커튼을 젖히면 소중한 사물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작은 무대가 되기도 한다. 사물들은 대개는 익숙한 것들이지만, 익숙하지 않더라도 작고 귀여운 모습을 하고 있어서 따뜻하고 친근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그림 속에는 작가의 삶의 여러 순간에 대한 이야기가 숨겨져 있어 보는 이에게 수수께끼를 푸는 듯한 시각적인 즐거움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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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성 작가는 활발한 작품활동을 지속하고 있는 중견 화가. 작가는 10여 년 전 우연히 얻은 옛 자개장에서 나전칠기 기법의 매력에 빠져들어 자개장을 수집하고 연구하는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이제 나전칠기 기법을 회화의 맥락으로 전용하여 새로운 그림으로 재탄생시키기에 이르렀다. 옛사람들의 상징물을 사물에 장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개와 옻칠로 자연의 힘과 역동성을 생동감 있게 표현한다. 빛을 머금은 아름다운 자개의 파편으로 명멸하는 생명력과 숭고함을 표현하는 회화라 할 수 있다.

이번 전시는 세 작가에게 모두 뜻깊은 ‘오랜 시간’에 대한 전시이다. 이루지 못했던 꿈을 다시 펼치고, 오랜 침묵 끝에 다시 비밀의 방을 열었으며, 사라져가는 기법을 되살려 새로운 그림으로 탄생시켰다. 세 작가가 보낸 오랜 시간의 의미를 작품으로 즐기는 전시회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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