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69세’는 암전으로 시작한다. 칠흑 같은 화면에 29세 남성 간호조무사 중호(김준경)와 물리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을 찾은 69세 여성 효정(예수정)의 목소리가 얹힌다. 일상적 대화는 효정을 향한 중호의 “노인 같지 않으시다” “다리가 예쁘시다”는 칭찬과 희롱 사이 어딘가의 말로 번진다. 오십견 때문에 저항할 힘이 없는 효정은 중호로부터 성폭행을 당한다. 며칠을 구토와 두통에 시달리던 효정은 중호를 경찰에 고소하지만 ‘젊고 훤칠한 중호가 효정을 성폭행할 동기가 무엇이냐’는 수사기관 및 주변의 시선에 부딪힌다. 효정은 그가 투쟁해야 하는 대상은 중호가 아닌 사회의 편견임을 깨닫는다.
데뷔작부터 노인에 대한 성범죄라는 무거운 주제를 택한 임선애 감독(42)을 24일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만났다. 2016년부터 실제 노인 성범죄 사례와 논문을 찾아 읽고 경찰 등 수사기관을 취재해 3년여 만에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2013년 노인 성폭력 사례를 인용한 칼럼을 읽었다. 노인 여성을 무성적(無性的) 존재로 보는 사회적 편견, 이를 악용해 노인 여성을 성범죄 타깃으로 삼는다는 현실이 충격적이었다. 성폭력 사건은 많이 영화화됐지만 노인 여성 상대 성범죄는 국내외적으로 거의 다뤄진 적이 없더라. 창작자로서 남이 하지 않은 것에 대한 갈망과 함께 누군가 운을 떼야 하는 이야기라는 생각도 했다.”
69세는 중년과 노년의 경계라고 생각해 정한 나이다. 임 감독은 60대 여성의 감정을 오롯이 이해할 수 있을지 걱정했지만 실제 65세인 배우 예수정과 소통하며 이야기의 깊이를 더했다. 6고(稿)까지 쓴 시나리오는 예 배우와의 대화를 거치며 수정을 거듭해 최종 11고로 마무리했다. 그 결과 환자와 간병인으로 만나 동거를 하게 된 효정과 동인(기주봉)의 관계 양상이 달라진다.
“시나리오 수정 전에는 두 사람이 부부는 아니지만 오랜 부부처럼 친밀하게 그렸다. 하지만 예 선배님은 효정과 동인의 관계가 노인 남녀관계의 흔한 궤도에서 벗어나길 바라셨다. 둘이 장을 보는데 동인이 ”치약이 떨어졌던가?“라고 하자 효정은 ”제 건 여유가 있는데…“ 한다. 치약도 따로 쓰는 것이다. 효정은 동인을 선생님이라 부르며 선을 긋고, 동인은 효정의 방에 들어갈 때 꼭 노크를 한다. 좀 더 독립적이면서 서로를 그 자체로 인정하도록 설정했다.”
영화는 노인 성폭력으로 시작하지만 인간의 존엄을 이야기한다. 한때 시인으로 존경받던 동인은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에게서 “분리수거해야 할 건 쓰레기뿐이 아닌데”라는 비아냥거림을 받고, “(피고소인의) 친절이 과했네”라는 경찰의 수치스러운 발언을 효정은 감내한다. 무시에 익숙해진 이들은 스스로의 가치를 스스로 깎아내린다. 동인은 자신의 시집을 화분받침으로 쓰고, 효정은 피아노를 치고 싶지만 악기가게에 들어서길 주저한다.
“효정이 싸워야 하는 대상은 노년층에 대한 우리 사회의 잘못된 시선이다. 성폭력 피해자뿐만 아니라 누구나 고통과 그늘이 있다. 연대를 통해 스스로의 존엄과 가치를 깨닫는 게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했다. 동인은 시집을 받침대로 쓰지만 그 시집을 정성스레 닦고 시를 읽는 효정을 만났기에 다음 시집을 낼 용기를 얻게 되지 않을까.”
성폭력을 당한 직후 수영장에서 물 깊이 가라앉았던 효정은 끝내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선다. ‘심효정. 69세. 전 병원 조무사 이중호에게 성폭행당했습니다’가 적힌 A4용지 수백 장을 양팔에 안고 피해를 당한 병원 옥상으로 한 계단 한 계단.
“죽은 듯 수면 아래로 침잠했던 효정은 병원 건물의 계단을 꾸역꾸역 올라 옥상 문을 열고 나가 난간에 선다.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서 세상을 향해 고백한다. 누구나 존엄한 가치를 갖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에 대해 자각하고 이야기할 권리가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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