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호 전 장관은 “국채보상운동은 국민들이 자신의 권리가 아닌 책임을 강조한 세계 최초의 시민운동”이라고 강조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국채보상운동은 단순히 일제가 떠안긴 빚을 갚으려 한 운동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운동, 학생운동, 대규모 언론 캠페인이 이 안에 모두 녹아 있습니다. 시티즌 오블리주, 그러니까 시민들의 솔선수범이라고 할 수 있어요.”
1907년 2월 일제가 침략 자금을 차관 형식으로 떠넘긴 돈을 갚기 위해 온 국민이 일어선 국채보상운동이 내년이면 110주년을 맞이한다. 이를 앞두고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기획전 ‘국채보상운동―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가 열리고 있다.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와 함께 이 전시를 기획한 김영호 전 산업자원부 장관(76). 2일 전시장에서 만난 김 전 장관은 국채보상운동을 이렇게 정의했다. 그는 “서구의 시민운동과 혁명은 대부분 시민의 ‘권리’를 강조한 운동이었다”며 “국가 위기 상황에서 국민 스스로가 ‘책임’을 다하자며 일어난 운동은 세계적으로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경제사(經濟史)를 연구한 김 전 장관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이 뚜렷했던 사회에서 가장 천대받던 상인 출신인 서상돈이 국채보상운동을 일으키고 확산시킨 점에 관심을 갖게 됐다. 나라가 어려워졌다고 힘들여 번 돈을 덜컥 내놓겠다고 한 장사꾼의 속마음이 궁금했다고. 그는 1973년 국채보상운동의 발상지인 대구에 있는 경북대 교수로 발령받고 난 뒤 서상돈의 흔적을 찾으러 서문시장을 수시로 찾아갔다.
김 전 장관은 국채보상운동 기부금 영수증 딱 한 장만 들고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영수증에 적힌 이름의 후손을 찾아 다른 자료 하나를 찾고 대한매일신보 등 당시 신문기사에 등장한 지역을 찾아 사료를 기부받거나 구입했다. 김 전 장관은 “사료가 한곳으로 모일 구심점이 없었기 때문에 발로 뛸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발굴한 사료는 1997년 90주년 기념행사를 앞두고 대구에 지은 기념관으로 넘겨지고 있다.
김 전 장관은 국채보상운동에 활발하게 참여한 사람들이 여성, 학생, 상인 등 가장 천대받고 힘없는 계층들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새삼 놀랐다. 예술의전당에서 그가 보여준 자료는 ‘앵무’라는 기명을 가진 기생이 돈을 내며 남긴 말이었다. 당시 18세였던 그 기생은 집 한 채를 지을 수 있을 금액인 100원을 기부하며 거국적인 운동 참여를 촉구했다. 김 전 장관은 “기득권을 갖고 있었던 남자들을 부끄럽게 만든 여성이었다”며 “앵무를 주인공으로 전기(傳記)라도 써 주고 싶다”고 말했다.
김 전 장관은 “당시 어린이와 학생들이 푼돈을 모아 기부하고, 도적 떼마저 이름을 밝히지 않으며 돈을 기부했다는 내용이 숱하게 남아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일제의 방해로 실패했지만 당시 모인 돈이 나중에 학교 설립에 쓰이면서 국채보상운동은 민족 교육에도 큰 의미를 남겼다”고 평가했다.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는 110주년을 앞두고 당시 사료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준비하고 있다. 국내 심사는 지난해 통과했고 내년 가을 등재가 최종 결정되지만, 김 전 장관은 낙관하고 있다.
18일까지 열리는 예술의전당 전시회가 끝나면 김 전 장관과 사업회는 지방을 돌며 전시회를 계속 열어갈 계획이다. 사료들을 보관할 아카이브도 만들 예정이다. 김 전 장관은 “이름을 올리지 않은 사람을 포함하면 국채보상운동 전체 참여자는 당시 인구의 20%에 가까운 350만 명으로 추산된다”며 “사료를 문화유산으로 올리고 아카이브를 관리하는 것이 국채보상운동 참여자들에게 일부 보답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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