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성폭력 묘사, 저속하다고요? 이게 현실입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6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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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어 프로젝트: 남자들만 모르는 성폭력과 새로운 페미니즘/토마 마티외 지음·맹슬기 옮김/184쪽·1만5000원·푸른지식

말로, 시선으로, 행동으로 성폭력을 휘두르는 남성들은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먹이를 찾는 악어처럼. 푸른지식 제공
말로, 시선으로, 행동으로 성폭력을 휘두르는 남성들은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먹이를 찾는 악어처럼. 푸른지식 제공
첫 페이지를 펼친 순간 화들짝 놀랐다. 이비인후과 의사가 두 다리를 쫙 벌려 진료받는 여성의 무릎에 성기를 갖다 댄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이럴 수가. 오래전 기자가 겪은 상황과 똑같았다. ‘재수가 없어 별 희한하게 성추행하는 변태를 만났다’고 여겼는데 지구 반대편 프랑스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시대와 국경을 초월하는 성폭력의 ‘어처구니없는 보편성’이라니….

프랑스의 남성 만화가인 저자는 성폭력을 당한 여성들의 사례를 고스란히 그림으로 옮겼다. 길에서 여성에게 치근덕거리다 무시당하자 저속한 욕설을 퍼붓고, 수영장에서 잠수하는 여성 앞에서 수영복을 벗는가 하면 골목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여성의 은밀한 곳을 불쑥 만지는 등 50여 개 에피소드가 담겼다. 친구들이 거실에 있는데도 욕실에서 양치하는 여자친구와 강제로 성관계하는 사례도 있다.

남성은 초록색 악어로 그렸다. 여성만 인간의 모습이다. 남성이 보기에 불편할 수 있지만 피해자인 여성과 동일시함으로써 공감을 끌어낼 수 있는 장치다.

성폭력 대처 방법도 구체적으로 소개한다. “도와주세요”보다 “불이야”라고 소리치는 게 효과적이고, 휴대전화로 가해자의 얼굴이 나오게 사진을 찍으라고 조언한다. 급한 경우 주변 자동차를 발로 차(차 주인에게는 미안하지만) 도난 경보장치가 울리게 만들 수 있다.

책은 2014년 프랑스에서 열린 ‘세계 여성 폭력 추방의 날’ 기념 전시회에 초청됐지만 한 정치인이 “저속하고 비도덕적”이라고 비난해 초청이 취소됐다. 이 사실이 주요 언론에 보도되면서 프랑스 사회가 들끓었다.

책에 묘사된 성폭력의 행태는 적나라하다. 길, 직장, 카페, 버스는 물론이고 집까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문제는 그게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라는 사실이다. 여성들은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악어 프로젝트#토마 마티외#성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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