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경주시 사적지 내 ‘통일신라 유적’ 굴착기로 훼손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4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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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황룡사지서 문화재委 허가도 안받고 공사

21일 경북 경주시 황룡사 역사문화관 건설 현장. 공사 과정에서 유구를 훼손한 굴착기가 옆에 서 있다. 경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21일 경북 경주시 황룡사 역사문화관 건설 현장. 공사 과정에서 유구를 훼손한 굴착기가 옆에 서 있다. 경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경북 경주시가 ‘황룡사 역사문화관’ 부대시설 공사를 진행하면서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유구(遺構·옛 건축물의 구조를 알 수 있는 흔적)를 훼손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또 국가 사적지인 황룡사지에서 문화재위원회의 허가를 받지 않고 무단으로 공사를 벌인 사실도 밝혀졌다. 문화재청은 경주시 담당 공무원들에 대한 문책과 공사 관계자들에 대한 형사처벌을 경주시에 요구했다.

문화재청과 경주시에 따르면 이달 11일부터 황룡사 역사문화관 주변을 두르는 석축 및 배수로 공사를 경주시가 진행하는 과정에서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적심석(積心石·초석과 함께 건물 밑바닥에 까는 돌)을 훼손했다. 굴착기를 동원해 폭 2m, 깊이 1.5m의 구덩이를 파다가 신라시대 유구를 건드린 것이다. 이 사실은 며칠간 외부에 알려지지 않다가 14일 우연히 현장을 찾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연구원의 제보로 신라왕경사업추진단이 조사에 나서게 됐다. 추진단은 현장 확인 직후 공사를 즉각 중단시켰다.

경계석축을 쌓기 위한 터파기 공사 때 훼손된 적심석 (붉은 원 안)이 보인다.
경계석축을 쌓기 위한 터파기 공사 때 훼손된 적심석 (붉은 원 안)이 보인다.
이상일 경주시 신라왕경2팀장은 “지난해 조경 전문가들에게 자문해 석축을 추가로 시공하는 방향으로 설계변경을 추진했다”고 말했다. 경주시는 설계업체에 용역을 맡겨 경계석축이 반영된 도면까지 확보했다. 하지만 경주시는 신라왕경사업추진단이나 문화재위원회에 설계변경 사실을 전혀 보고하지 않았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경주시가 역사문화관의 6월 개관에 쫓겨 무리하게 공사를 강행하면서 실책을 저지른 것 같다”고 말했다.

현행 문화재보호법 99조에 따르면 사적 등 국가지정문화재에서 현상변경 허가 없이 무단으로 공사를 진행하면 최대 5년형의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 황룡사지는 국가사적 제6호로 지정돼 있다. 이에 따라 문화재청은 20일 경주시에 공문을 보내 경주시 책임 공무원들에 대한 감사와 시공업체 관계자들에 대한 형사고발을 요구했다. 이와 함께 19일 사고현장을 조사한 강현숙, 김권구 교수 등 문화재위원들은 적심석 등 유구에 대한 긴급 수습조사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 지시했다.

21일 기자가 둘러본 현장은 이틀간 비가 내리면서 토사가 흘러내리는 등 유구에 대한 보존 조치가 매우 열악한 것으로 파악됐다. 앞서 현장조사에 나선 강현숙 동국대 교수는 “너무 충격적이어서 눈을 그대로 감고 돌아오고 싶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김권구 계명대 교수 역시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며 “확실한 재발 방지책이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훼손된 유구는 발굴조사가 아직 이뤄지지 않아 성격이 명확하지 않지만 황룡사지와 붙어 있는 데다 인근에서 통일신라시대 연못 터가 발견된 점 등으로 미뤄 통일신라시대 왕경 시설물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김권구 교수는 “경주 북천이 예부터 자주 범람하다 보니 신라시대 당시 배수와 관상용으로 연못을 여기저기 지었다”며 “수로 관리시스템의 한 부분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문화재계는 이번 사고가 예견된 참사라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황룡사 역사문화관이 황룡사를 끼고 신라 궁성인 월성으로 이어지는 곳이어서 예전부터 통일신라시대 유구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 곳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최근 경주시는 황룡사 및 월정교 복원과 월성 발굴 등 일련의 신라왕경복원사업이 박근혜 정부의 대선공약 사항이라는 이유로 학계의 우려를 무시하고 너무 서둘러 진행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고고학·학술원 회원)는 “경주시의 속도전이 발굴도 안한 지역을 굴착기로 훼손하는 참사를 낳았다”며 “문화재청도 감독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했다
 
경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통일신라#유구#훼손#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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