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돼지의 노래 속에 들어앉은 추한 인간 군상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3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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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어라 돼지/김혜순 지음/256쪽·8000원/문학과지성사

‘있지, 지금 고백하는 건데 사실 나 돼지거든. 있지, 나 태어날 때부터 돼지였어(…) 난 화장실 넘치는 꿈 제일 싫어해 그 꿈 꾸고 나면 아이큐가 삼십은 빠져(…) 물컹거리는 진흙으로 살찐 몸, 더러운 물, 미끌미끌한 진흙’(‘돼지라서 괜찮아’에서)

2011년 수백만 마리의 돼지가 생매장됐다. 구제역 때문이었다. 김혜순 시인의 새 시집 ‘피어라 돼지’는 이 고통스러운 풍경을 끄집어내는 것으로 시작된다. 장시 ‘돼지라서 괜찮아’다. ‘훔치지도 않았는데 죽어야 한다/죽이지도 않았는데 죽어야 한다/재판도 없이/매질도 없이/구덩이로 파묻혀 들어가야 한다’ 2000년대 한국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는 이렇게 ‘죽이지도 않았는데 죽어야 했던’ 일이다.

김혜순 씨는 남성 중심의 문학사에 언어의 칼을 들이댄 시인이다. 독창적인 시어와 이미지로 무장한 그의 시편의 힘은 새 시집에서도 여전하다. 제목이 알리듯 ‘피어라 돼지’의 주인공은 ‘돼지’다. 한 편 한 편 돼지가 노래하는 듯한 그의 시를 뒤집으면 추한 인간사회가 펼쳐진다. ‘qqqq 돼지가 돼지가 아니라고 할 때 속으로 외치는 말/qqqq 엄마가 데려갈 때 뒤돌아보는 건 돼지라고 말하는 돼지가 하는 말/qqqq 무엇보다 제가 돼지인 줄 모르는 우리나라 돼지들의 교성’(‘돼지라서 괜찮아’에서)

여성성에 대한 강렬한 인식 또한 오롯하다. 시인은 ‘돼지=인간’의 등식과 함께 ‘돼지=여성’의 등식을 사용한다. 그녀의 시에서 여성과 돼지는 더럽고 시궁창 같고 버림받아 마땅한 대상이다. 그것이 여성과 돼지가 대표하는 ‘약자’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인식이어서다. 시인은 적나라한 언어들을 통해 이 같은 폭력적인 현실을 고발한다. 평론가 권혁웅 씨가 설명하듯 김혜순 시의 ‘돼지’는 “세상의 모든 약한 존재자들을, 죽음과 부활을, 사랑과 욕망을 제 몸에 구현한 돼지”다. ‘저년을 막아! 회초리를 든 사람이 몰려온다./나 혼자 살게요/버림 받은 년/돼지 같은 년/달아난다(…) 누가 돼지를 껴안았다가 뺨을 갈긴다/이 더러운 돼지가 나를 화나게 하잖아 이 더러운 암퇘지가’(‘지뢰에 붙은 입술’에서)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피어라 돼지#김혜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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