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만의 고뇌와 투혼

  • 스포츠동아
  • 입력 2016년 3월 15일 05시 45분


이세돌 9단. 사진제공|구글
이세돌 9단. 사진제공|구글
■ 세상이 이세돌에 열광하는 이유

1920개 CPU를 단 알파고와 대결
“인간이 진게 아니라 이세돌이 진것”
아름다운 패배, 그리고 투혼의 1승
인공지능을 이긴 감성과 직관
지금 세상은 ‘이세돌 신드롬’


바둑의 거장 고 사카다 에이오 9단은 말년에 후배 린 하이펑에게 명인과 본인방 타이틀을 넘겨주며 “바둑은 슬픈 드라마”라고 탄식했다. 하지만 바둑이 늘 슬픈 드라마일 수 있으랴. 젊은 거장 이세돌이 인공지능 알파고를 상대로 연출한 드라마는 분명 ‘기쁜 드라마’였다. 그것도 숨이 막히도록 아름답고 감동적인, 인간의 드라마.

세상이 이세돌과 알파고 이야기로 가득 찼다. 한 마디로 이세돌 신드롬이다. 포털사이트 네이버의 인기검색어에서 ‘이세돌’은 대국이 없는 날임에도 싱글남·싱글녀·직장인·재테크 4개 그룹에서 1위에 올랐다(14일 오후 2시 기준). 대국이 있는 날의 포털사이트 검색어 상위권은 이세돌과 알파고, 바둑 방송진행자들의 이름으로 도배가 됐다. 13일 4국을 생중계한 KBS 1TV의 시청률은 10.0%(닐슨코리아 집계)에 달했다. 12일 3국의 7.5%보다 2.5% 상승했다.

TV와 인터넷방송에서 대국을 해설한 바둑방송 김지명 씨는 “4국을 해설할 때는 아프리카TV 사상 처음으로 한 방에 2만8000명이 입장해 결국 서버가 다운됐다. 덕분에 태어나 처음으로 내 이름이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다”며 웃었다.

네티즌들의 반응은 뜨겁다 못해 피부가 델 정도다. 이세돌과 관련된 기사 밑에는 네티즌들의 댓글이 끝없이 붙었다. 네티즌의 관심도를 엿볼 수 있는 패러디물도 온라인과 SNS를 통해 세계로 퍼져 나갔다. 영화 ‘신의 한 수’ 포스터를 패러디한 ‘제78수’란 제목의 포스터가 등장하는가 하면 영화 ‘터미네이터’에서 기계군단 스카이넷에 맞서 인류 저항군을 이끈 존 코너와 이세돌을 합성한 ‘돌코너’도 눈길을 끌었다. 영화 ‘매트릭스’의 한 장면을 응용한 이세돌 움짤(짧은 영상의 일종)도 나왔다. 이세돌이 대국 중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우는 사진이 공개되자 여성 팬들이 “가느다란 손과 살짝 꺾은 목이 매력적”, “진정한 뇌색남”, “고뇌하는 모습이 섹시하다”며 환호했다. tvN의 인기 방송프로그램 ‘SNL코리아’에서는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을 패러디한 배타고(유세윤 분)와 정상훈 9단의 패러디물을 선보이기도 했다. 언론들의 조명도 화끈하다. 언론 매체가 쏟아낸 이세돌 관련 보도기사의 수는 당장 집계가 불가능할 정도로 방대하다. 심지어 ‘소스의 재활용’도 등장했다. 3년 전에 한 인터뷰, 과거 출연했던 방송 영상을 재공개하는 등 이세돌이 들어간 모든 소스가 다 ‘금값’이다.

‘인간의 의지’가 신드롬을 일으키다

이세돌 9단 신드롬의 이유는 무엇일까. 겉으로만 보면 구글이 만든 인공지능 바둑프로그램 알파고에게 3연패 끝에 간신히 1승을 거두었을 뿐이다. 사실 처음부터 이세돌 신드롬이 불었던 것은 아니다. 9일 1국에서 참패를 당했을 때만 해도 분위기는 정반대였다. 10일 2국마저 패하자 바둑계는 그야말로 멘붕에 빠졌다. 그도 그럴 것이 뚜껑이 열리기 직전까지만 해도 바둑 좀 안다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세돌의 ‘5-0’ 완승을 당연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세돌 역시 “5-0 아니면 4-1이 될 것”이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극적인 반전의 불씨가 당겨진 것은 12일 3국을 패하면서부터였다. 사람들은 그제야 ‘인간대표’ 이세돌이 상대하고 있는 알파고의 존재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100명이 넘는 과학자가 들러붙어 수백억에서 수천억원의 개발비를 쏟아 부어 만든 알파고는 1920개의 CPU, 280개의 GPU를 장착한 괴물이었던 것이다.

알파고의 존재를 깨닫게 되자 비로소 이세돌이 보였다. 인간이 창조한 기계괴물 앞에 고개를 숙인 인간. 하지만 그 인간은 연이은 패배 속에서도 일어서고, 일어났다. 패하면 대책을 마련했고, 그래도 깨지면 또 다른 전략을 들고 나타났다. 지옥처럼 느껴졌을 대국장에 들어서는 이세돌의 얼굴은 어둡고 침울했지만 “아흔 아홉 번 져도 기어서라도 오겠다”는 의지가 이마에 새겨져 있었다. 인간만이 보여줄 수 있는 투혼과 도전정신. 3국마저 패했지만 앞서 둔 두 판의 바둑과는 달랐다. 이미 형세는 기울었지만 이세돌은 포기하지 않고 하변에서 수를 냈다. 프로라면 누구라도 외면하는 수. 둘 줄 몰라서가 아니라 차마 두지 못하는 수. 하지만 이세돌에게 이 수는 마지막 남은 한 방울의 희망이었다. 냉혈한 기계에게 한 방울의 희망마저 증발되는 장면을 지켜본 사람들의 마음은 뜨거워졌다.

● 이세돌의 마지막 도전장

이세돌의 말도 신드롬에 기름을 끼얹었다. 3국을 진 이세돌은 기자회견장에서 “인간이 패한 것이 아닌, 이세돌이 패한 것”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이세돌의 이 한 마디는 국내는 물론 외신을 타고 전 세계로 타전됐다. 4국에서 천금같은 1승을 거둔 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1승”이라며 환하게 웃던 이세돌의 사진은 14일 일간지의 1면을 장식했다.

15일 마지막 5국을 앞둔 이세돌은 또 한 번 도전장을 냈다. 돌을 가르지 않고 흑을 쥐고 싶다고 구글 측에 의사를 전달했다. 이번 대결은 중국룰을 따라 덤이 7집반이나 되기 때문에 백을 선호하는 프로들이 많다. 이세돌은 “백번으로 1승을 했으니 흑번으로도 이겨보고 싶다”고 했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세기의 대결’은 많은 것을 남겼다. 그 중 하나는 ‘아름다운 패배’가 ‘완벽한 승리’보다 감동적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고 물어도 대답할 수는 없다. 그것은 ‘지능’과 ‘계산’이 아닌 ‘감성’과 ‘직관’의 영역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알파고가 1억개의 CPU를 달지라도, 이것만큼은 알 수 없을 것이다.

이세돌 9단. 사진제공|구글
이세돌 9단. 사진제공|구글

● 이세돌 9단은?

1983년 전남 신안군 비금도에서 태어났다. 11세에 서울로 올라와 명문 권갑용 도장에서 수학했고, 1995년 조훈현(9세) 이창호(11세)에 이어 세 번째 최연소로 프로 입단했다. 조남철, 조훈현, 이창호로 이어지는 한국바둑 1인자의 계보에 네 번째로 이름을 올렸으며 통산 47회 우승(세계대회 18회 포함)을 기록했다. 별명은 ‘쎈돌’. 2006년 김현지씨와 결혼해 딸 혜림을 두었다.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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