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봄날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3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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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 윤제림(1960∼ )

소리 없이 쏟아지는 저 햇살
그대로 법일 수 있다면 좋겠네
꽃망울 터지는 소리에도 눈물 터지게 하는
얼음장 풀리는 소리만으로 응어리 풀리게 하는
아내의 야윈 뺨에도 화색이 돌게 하는
딸애의 흰 낯에도 푸르름이 비치게 하는
기척도 없이 다가드는 저 환한 햇살 그대로
온전한 법일 수 있다면 좋겠네


사람에게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의 오감(五感)이 있다. 이 오감이란 몸의 신호이고 또 언어다. 몸에 감각을 받아들이는 특정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중에서도 시각은 가장 직접적이고, 촉각은 가장 은밀하며, 후각은 가장 암시적이다. 이들은 비슷하면서도 퍽 달라 마치 몸이라는 한집에 사는, 서로 다른 다섯 형제와도 같다. 평소 이 다섯 형제는 제각기 놀다가도 무슨 큰 변화가 닥치면 다 같이 모여들어 한목소리를 낸다. 예를 들어 요즘 같은 때, 다섯 개의 감각은 이구동성으로 외친다. “봄이 온다”고 말이다.

아직 겨울옷을 벗지 못했대도 감각의 말은 맞다. 바람의 냄새가 달라졌고, 햇빛의 자극이 달라졌고, 풍경의 얼굴이 달라졌다. 밥상에는 나물이 오르고, 얼음 녹아 개울이 흐른다. 3월이 되니 응당 와야 할 봄이 온 것일 텐데, 내가 오라고 해서 온 것은 아닐 텐데, 이유 없이 봄이 반갑다.

그런데 봄이 온다고 무엇이 달라질까. 봄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다. 아픈 사람 낫게 해주지 못하고, 없는 연봉 만들어 주지도 못하고, 간 사람을 돌려주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이 무능한 봄은 서럽게도 반갑다. 생각건대 봄은 위대하고 거대한 자연신의 옷자락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해주지 않지만 아무것이든 해줄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신의 얼굴을 하고 봄은 온 사방천지에서 찾아온다. 그래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해도 일말의 기대를 해보게 된다. 마치 이 시처럼.

시인에게 봄은 영 무능한 것이 아니다. 봄은 아내의 뺨과 딸의 낯이 더 건강하게 바뀔 것이란 상상을 하게 해 준다. 사람들은 이것을 희망이라고 부른다. 뻔한 말이라도 좋다. 봄은 희망을 몰고 온다. 간절하게, 믿어 보고 싶다.

나민애 시인
#봄날#윤제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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