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都의 무덤 앞에선 사랑도 권력도 바람이다

  • 신동아
  • 입력 2015년 11월 6일 14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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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 11월호/영화, 그곳에 가고 싶다]
‘경주’와 경주 오릉
인생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인생을 진짜로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는 법이다. 영화 ‘경주’는 경주라는 고도(古都)를 통해 ‘아는 척 모르는’ 우리들 삶에 대해 허를 찌르듯 인생의 황망함을 깨닫게 만든다

수년 만에 경주를 찾아가면서 든 생각은 놀랍게도 이곳에서는 영화를 거의 찍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도(古都)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상한 홀대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고도이기에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현대극에는 적합한 공간이 아닐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고도는 그래서 영화 촬영지로는 고도(孤島)다.

중국 옌볜 출신으로 한국 영화계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하는 장률 감독은 원래 소설가다. 1986년까지 그는 글을 썼다. 그리고 모든 글쟁이의 로망처럼 갑자기 글쓰기를 집어치웠는데, 그건 순전히 남의 글이 자신보다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남’이란 보르헤스를 얘기한다.

그가 보르헤스보다 더 잘 쓸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그랬는지, 아니면 소설에 대한 창작욕이 고갈돼가는 걸 감지하고 스스로 정리한 건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의 그런 문학적 불행이 영화적으로는 새로운 작가를 탄생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장률 얘기는 여기서 잠깐 멈춘다. 그의 영화 ‘경주’와 고도 경주의 관계를 얘기하려다 샛길로 빠지고 말았다. 장률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언급할 것이다.

현대 영화 중 경주를 올곧이 배경으로 한 영화는 장률의 ‘경주’뿐이다. 지명을 제목으로까지 끌어다 쓰는 데는 그곳이 가져오는 영화적 이미지를 아무리 용을 써도 떨쳐낼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 ‘경주’는 경주에 온 베이징대 중문학과 교수의, 일종의 여행담이다. 거기엔 과거의 여자가 얽히고 현재의 여자가 얽힌다. 한중관계의 미래를 놓고 시비를 거는 한국의 정치학과 교수 얘기도 얽힌다. 술이 있고 춘화가 나오며 중국의 유명한 한시도 나온다.

누가 경주를 안다 하는가

영화 ‘경주’
영화 ‘경주’

그럼에도 영화 ‘경주’는 그냥 경주 그 자체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우리는 언제부턴가 경주가 만들어낸 역사와 시대의 아우라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누가 경주를 모르겠는가. 그런데 정작 경주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또 몇이나 되던가. 인생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또 한편으로 인생을 진짜로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는 법이다. 영화 ‘경주’는 그래서 ‘아는 척, 모르는’ 우리 삶에 대해 소설가 출신 감독이 허를 찌르듯 인생의 황망함을 깨닫게 만드는 작품이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작가주의 감독의 영화에서 종종 나오는, 무의미한 일상을 담아내는 척하는 장면들이 ‘경주’에서도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주인공 최현(박해일)이 경주역사에 도착해 버스를 기다릴 때 벌어지는 일이 그런 것이다. 맨 앞줄에는 비루하고 피곤한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여인(이현정)이 있고 그런 엄마에게 칭얼대는 듯한 소녀 한 명이 매달려 있다. 여느 버스 정류장에서라도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며, 저 여자도 사는 게 참 힘든 모양이군, 하고 생각하게 되는 장면이다.

그런데 문제는 영화에서 이 여자가 아이와 동반자살한다는 것이다. 여자가 자신을, 특히 자신의 아이를 해치는 장면은 직접 나오지는 않지만 관객에게는 그 ‘팩트’가 충분히 전달된다. 그제야 사람들은 버스 정류장에서 여자의 표정, 몸짓,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장률은 이 아무것도 아닌 장면을 아무것도 아니지 않게 활용한다. 이름도 없는 단역배우(사실은 후배 감독)를 등장시켜서는 무심한 척, 무의미하면서도 사소해 보이는 현대사회의 일상 속에 얼마나 많은, 가차없는 폭력이 존재하는지 드러내려 한다. 영화 ‘경주’는 그렇게 시작한다.

경주 여행을 남들 다 하듯 보문관광단지니 불국사니 하는 곳을 둘러본다는 식으로 휘젓고 다니는 것은 천박한 짓이 될 수 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경주는 천년고도다. 천년 전 휘황찬란한 역사를 만들어낸 도시를 여행하려면 그만큼의 ‘리스펙트’를 지녀야 한다. 경주는 존중받아야 마땅한 도시이고, 실제로 도시 어느 한복판에 있다 한들 그 존엄성이 끈끈하게 느껴지는 곳이다. 그러니 외곽부터 구경하는 것이 좋다. 1박에 불과한 일정이라면 천마총 등등의 유물과 유적지를 둘러보는 것으로 스케줄을 짜는 것은 다소 어리석은 일이다.

이런 게 바로 경주다

‘경주’를 만든 장률 감독은 옌볜 출신 소설가라는 독특한 이력을 지녔다.
‘경주’를 만든 장률 감독은 옌볜 출신 소설가라는 독특한 이력을 지녔다.

똑똑한 여행 가이드라면 호화스럽고 편의시설이 즐비한 보문단지 호텔보다는 토함산 중턱, 양북면 상범마을 민박집들을 추천할 것이다. 10여 가구가 살까. 고립무원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밀폐되다시피 한 작은 동네다.

민박집 중 한옥으로 지어 특색이 있는 ‘돌목여관’ 주인장과의 통화는 밤길을 달리는 차 안에서 툭툭 끊기기 일쑤다. 억센 부산 사투리의 그가 전화 너머에서 외친다. “정자 있는 데서 다시 전화를 하시오.” 나이를 짐작하기 어렵다. 나중에 만나보니 70을 넘긴 남자다. 자신을 화가라고 소개했다. 그런데 젠장, 어디로 가야 정자가 나온다는 말인가.

길은 가로등 하나 없이 어둡고, 바로 옆은 깊은 논두렁이나 작은 절벽 같은 곳이어서 운전대를 잡은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간다. 폭이 아주 좁은 길이다. 자칫하면 사고가 나기 쉬운데 이렇게 외진 곳에선 어떤 사고도 대형급이 된다. “이건 ‘경주’ 같은 영화가 아니라 공포영화 찍기에 제법”이라는 얘기가 조수석에서 들린다. 너무 어두워서 야경을 찍는다는 건 엄두도 못 낼 일이다. 목표 지점에 안전하게 당도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돌목여관에서의 하룻밤은 사람들을 토로하고 고백하게 만든다. 여기에 이런 한옥을 왜 지었을까 궁금해지다가 너무 사연이 많을 것 같아 오히려 질문의 입을 닫게 만든다. 사연이 많은 역사는 나중에 글로 읽을 일이다. 그걸 어떻게 말로 하고 귀로 듣겠는가. 굳이 그걸 알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달빛에 휘어 감기는 한옥 안 정원에는 그런 분위기가 흐른다. 괴괴하고 적막하지만 사람들은 종종 이런 곳을 다녀가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경주는 ‘이런 게 바로 경주다’라는 생각도 들게 한다.

신라 김유신이 자신의 애첩을 찾아다니다 정치의 큰 꿈을 위해 발길을 끊었는데도 말이 술 취한 그를 당연히 여인에게 인도하자 술이 깬 남자가 말의 목을 베었다는, 바로 그 집이 이런 곳에 있지 않았을까 싶어진다. 그리고 문득, 말의 목을 베어서까지 김유신이 입증하고 싶었던 건 무엇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래서 그는 결국, 여인의 사랑을 포기하고 권력을 얻는 데는 성공했지만 과연 그걸 꼭 성공이라고 할 수 있었던 걸까.

그는 행복했을까. 나 같으면 여자를 택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 그건 솔직한 얘기가 아니다. 여인의 사랑도, 권력을 향한 의지도 불태웠을 것이다. 사실은 김유신도 그랬을 것이다. 그게 맞다. 역사는 사람을 위인화하려는 거짓의 작태를 보인다. 어쨌든 돌목여관은 그런 곳이다. 술 몇 잔에 스스로를 드러내게 하는데, 그건 술 탓이 아니라 순전히 교교하게 구름 사이를 떠도는 달빛 탓이다. 마치 무엇에 홀린 듯, 여기 앉아 있으면 술술 나의 과거를 털어놓게 된다. 경주의 밤은 그렇게 깊어간다.

왕릉이 말하려는 것


최현 교수가 졸졸 좇아다닌 경주 여자 윤희(신민아)의 아파트에서 밤을 지새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그는 그날 그녀와 자려 했던 것일까. 그녀도 그날만큼은 그에게 몸을 허하려 했던 것일까. 남녀간의 섹스란 교감의 완성이다. 그래야 한다. 그냥 무턱대고 사람이 지닌 외곽, 곧 외모나 그가 공개적으로 보이는 행태 등등만으로 대뜸 만나 섹스를 하려 해선 안 된다. 그건 일종의 공창(公娼)과 같은 짓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요즘 그런다. 인터넷상에서 만나거나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 서로 댓글을 달고, 달아주는 과정을 통해 ‘대뜸’ 오프라인에서의 만남을 단행한다. 그리고 대개는 술을 마시고 대개는 그렇게 섹스를 한다. 그런 이들에게는 섹스가 주는 긴장감과 그로 인한 절대적 쾌감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섹스가 주는 기억이 불쾌한 고통일 때가 적지 않다.

최현과 윤희는 그러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밀당’이 답답할 만큼 이어지고 또 이어진다. 그녀가 운영하는 카페를 기웃거리고,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며, 살짝 취해서는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될 짓을 하는데, 유적인 오릉 위로 올라가 밤하늘을 보다가 관리인한테 걸려 별별 소리까지 듣게 된다.

경주 돌목여관. 돌목여관에서 본 하늘.
경주 돌목여관. 돌목여관에서 본 하늘.

그리고 둘은 여자의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제야 남자는 여자에게 깊은 불행이 잠재해 있음을 눈치챈다. 그는 그녀에게 접근했지만 이제 간격을 느낀다. 남녀는 가깝게 느낄 때에야 비로소 때론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법을 깨닫는다. 그건 위선이 아니다. 일종의 깨달음이다. 홀로 놔둠으로써 오히려 정서적으로 더 긴박될 수 있다는 걸 배우는 것이다.

마치 독백을 하듯 한참을 얘기하던 끝에 여자는 자기 방으로 자러 들어간다. 그녀는 방문을 닫지 않는다. 이제는 당신이 선택할 차례라는 듯, 여자는 방문을 살짝 열어둔 채 침대에 몸을 누인다. 그러나 남자는 여자 방문을 열고 들어가지 못한다. 대신 그는 거실의 창문을 열고 자신의 전화에 부재 중 녹음이 된 중국 아내의 음성 메시지를 듣는다. 그의 귀에는 이어폰이 꽂혀 있고 밖에는 어스름 새벽이 다가오는데, 창문 옆이 바로 누군가의 거대한 왕릉이다.

왕릉의 그림자는 철저하게 세상 속으로 버려진 남자, 그렇게 외롭게 잠이 든 여자를 마치 내가 다 잘 안다는 듯, 위무하듯 그냥 존재한다. 장률 감독이 창문 밖 왕릉을 배경으로 잡은 것은 나름 의미가 심장한 것이다. 기나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사람들이 저질러온 많은 잘잘못은 그다지 대단한 것이 못 된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서로 위로하고 사랑하며 살라고 그 왕릉을 대신해서 얘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살아가는 데 그것만큼 중요한 건 없다.

감은사지석탑과 경주 문무대왕릉.
감은사지석탑과 경주 문무대왕릉.

천년 석탑이 나를 본다


경주에 오면 사람들은 대개 어릴 적 기억을 더듬는다. 그 기억 속에는 불국사가 있고, 석굴암이 있고, 감포가 있다. 그리고 문무대왕이 묻혀 있다는 바다가 있다. 석굴암 가는 길은 이제 매우 편리해졌다. 굽이굽이 산길을 오르던 기억은 이제 가물가물하다. 거의 코앞까지 차로 갈 수 있다. 석굴암은 어쩌면 사람들에게 이젠 경이로움이 아니라 유희가 된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생각의 깊이를 조금만 달리하면 신라 경덕왕 10년, 그러니까 751년이라는 시대에 어떻게 이런 석불을 완성할 수 있었을까 하는 놀라움을 갖게 된다.

구도(求道)를 위한 인간의 의지는 때로 기적의 산물을 완성시킨다. 김대성이라는 신라의 인물은 무슨 집념으로 이 일을 해낸 것일까. 그것도 원시적인 도구만을 가지고 어떻게 저런 정교한 부처의 미소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그러나 석굴암은 볼 때마다 이상하게도 다소 초라한 느낌을 준다. 조금은 작아지고, 어쩔 수 없이 자꾸 낡아간다. 세월의 마모가 주는 속도감이 남다르게 빠르다는 느낌은 어쩔 수가 없다.

감포로 가는 길목에는 감은사지삼층석탑이 있다. 신라 신문왕 2년인 682년에 지어져 역시 천년 가까이 이곳 한자리에서 세상을 지켜본 셈이다. 뛰어난 석탑건축 기술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탑은 동서로 두 개가 자리한다. 그 건너편에는 석탑만큼은 아니어도 역시 어마어마하게 오랜 세월을 같이했을 고목이 있다.

고목 밑에서 석탑을 바라보는 시점 샷이 좋다. 오랜 유적은 비교적 롱 샷(long shot)과 롱 테이크(long take)로 보는 게 좋다. 그는 나를 응시하고, 나는 그가 나를 쳐다보는 걸 즐긴다. 내가 유적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쪽이 나를 본다. 그럼으로 해서 나는 긴 역사 속 조그맣고 조그만 인물로 편입된다. 주체는 내가 아니라 역사이자 시대임을 느끼게 된다.

감은사에서 동해로 나가면 문무대왕이 묻혔다는 해변을 만나게 된다. 신라를 통일한 김춘추, 곧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그를 수장했다는 천연 암초들이 200m 남짓, 저 건너 바다에서 드러난다. 기록에 따르면 문무왕은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의 혼령이 왜구의 침입을 막을 수 있다고 봤다는 건데, 그 의도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어쨌든 당시로서는 대단히 특이한 이벤트였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의 무덤이 그에게 복속당한 백제와 고구려의 잔여 세력들에게 끊임없는 공격 대상이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 되면 늘 정치적 ‘사변’이 끊이지 않았을 터. 그럼으로 해서 이 수중릉은 일거양득의 정치적 행위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삼국통일의 상징성과 초대 왕이 지닌 국가 이데올로기 강화 등등. 지나치게 현대 정치공학적으로 당시를 보고, 해석하는 것이라는 얘기를 들을 수도 있겠다.

의도적 군더더기

2시간25분의 비교적 긴 러닝타임을 자랑(?)하는 영화 ‘경주’는 그런 만큼 의도적인 군더더기가 많다. 이 작품이 만약 상업영화의 수익성만 앞세웠다면 제작자 처지에선 20여 분을 들어냈을, 그런 장면들도 더러 눈에 띈다. 예컨대 경주의 대학에서 국제정치학을 가르친다는 박 교수(백현진)가 술자리에서 주인공 최현에게 끊임없이 시비를 거는 장면은 지나치게 길다는 느낌이다. 박 교수는 문학이 전공인 최현에게 정치, 사회, 경제 문제를 두고 논쟁을 벌이려 하는데, 그건 어떤 답을 듣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아무도 듣지 않는 자신의 얘기를 또다시 만날 것 같지 않을 타인에게라도 실컷 떠들고 싶은 욕구 탓이다.

박 교수가 최현이 곤란해하든 말든 상관없다는 식으로 구는 건 꼭 술에 취해서 만은 아니다. 그는 배설하고 싶은 것이다. 머릿속에 뭉쳐 있는 딱딱한 똥을 싸고 싶은 것이다. 그런 그를 피해 복도를 배회하던 최현이 착각하고 다른 문을 여는데 거기서 또 일군의 취객을 만난다. 한 남자(제작자 이준동)는 엉망으로 취해 밥상 위에 올라가 흐느적거리며 춤을 추고 있고, 갑자기 나타난 최현 때문에 불쾌해진 또 다른 남자(국회의원 송호창)는 그를 밀치듯 문을 닫으며 이렇게 얘기한다. “이제 충분하지 않나요?”

그렇다면 이 모두가 다 불필요한 장면일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장률은 역사성이 녹록히 밴 공간인 경주에서조차 경박하게 살아가는 인간 군상, 특히 지식인 따위들의 짓거리를 보여주고 싶었던바, 어쩌면 자신도 어쩌지 못하게 속해 있음으로 해서 역시 어쩌지 못하게 일상에서 저지르는 위악스러운 짓을 솔직한 심정으로 고백하고 싶었을 것이다. 한국의 지식인들이 얼마나 위태로운 지경에 있는지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영화의 압권은 역시 최현과 윤희가 출입이 금지된 왕릉에 올라가는 것이다. 둘의 뒤를, 둘의 관계를 의심하는 치졸한 성격의 형사 영민(김태훈)이 뒤따른다. 영민의 문제는 오래전부터 윤희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는 윤희에게 대범하고 너그러운 사랑을 베풀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마음뿐이다. 영민은 미인인 윤희의 주변에 남자들이 다가오는 것을 끊임없이 경계한다. 그는 자기가 옹졸하고 의심이 많으며 불안해하는 것을 스스로 창피해한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다. 영민은 최현의 신원조회까지 해가며 그의 접근을 막아내려 한다.

사랑을 한다는 건 불안의 연속선상에 놓이게 된다는 것인데, 그것만큼 우스꽝스러운 일은 없다. 사람들은 그걸 잘 안다. 그럼에도 남자는 여자를, 혹은 여자는 남자를 끊임없이 못살게 굴고, 의심하고, 집착한다. 그 모두는 사실 열등감에 기초하는 감정이다. 이 셋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윤희만이 그런 두 명의 치졸한 감정에서 초월적으로 자유로울 뿐이다. 여자는 대개 남자들의 그런 치졸함에 익숙하고 또 너그럽다.

人散後, 一鉤新月天如水


어쨌든 그 모든 아수라가 셋이 함께 어찌어찌 오르는 왕릉의 맨 위에서 한꺼번에 확 풀리는 느낌을 준다. 세상을 살다보면 무지 중요하게 생각되는 일이 사실은 영겁의 과정에서라면 먼지보다 못한 극히 사소한 일이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런데 그 각성은 꼭 뭔가 준비되고 배우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건 마치 바람처럼 훅 하고 다가선다. 마치 이들 셋이 우연찮게 왕릉에 올라갔을 때처럼.

밤의 별은 총총하고 주위의 모든 것은 잔뜩 잠들어 있다. 이들의 소란은 세상을 깨우는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비웃음을 사는, 치기의 장난일 뿐이다. 그래서 하늘이 웃고, 무덤 안의 누군가도 웃고, 주변의 숲과 바람도 웃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들 셋은 지금 한창, 삶이 엄숙하고 고단하다고 생각하지만 이들을 둘러싼 우주는 그것이 모두 귀여울 따름이다. 결국 이들 세 사람은 왕릉 관리인에게 발각돼 쫓기듯 내려온다.

이들이 관리인에게 혼이 나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전 과정이 비교적 코믹하고 유쾌하게 그려진다. 맞다. 그 모든 건 아무 일도 아닌 것이다. 왕릉(=인생의 산)을 하나 올라갈 때와 거기서 내려온 후에 이들은 사뭇 달라져 있다. 윤희의 아파트로 간 최현이 결국 그녀의 몸에 손을 대지 않는 것은 아마도 왕릉을 올라갔다 내려왔기 때문일 수 있다. 사람들은 어릴 때나 나이를 먹을 때나 어쨌든 조금씩이라도 정신적으로 커 나가기 마련인바, 영화 속 인물들도 결국 성장을 이뤄낸다. 그런데 그건 관객들도 마찬가지여서, 영화를 보고 나면 스스로 조금은 달라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영화 ‘경주’를 보는 묘미는 바로 그 지점에 있다. 장률은 바로 그 점을 강조하려는 듯 자신이 좋아하는 한시를 인용한다. 중국 만화의 아버지로 불린다는 펑즈카이의 시구다. ‘人散後, 一鉤新月天如水.’ 사람들이 흩어진 후에 초승달이 뜨고 하늘은 물처럼 맑다. 사랑과 욕망 역시 흩어졌다가 초승달과 맑은 하늘을 본 후에는 조금은 나아진 상태로 다시 모인다. 그리고 더 뜨겁게 사랑하게 된다. 집착 아닌 순수한 욕망을 배우게 된다. 진정한 사랑을 꿈꾸게 된다.

경주 오릉은 인적이 끊긴 뒤 마주하는 게 좋다.
경주 오릉은 인적이 끊긴 뒤 마주하는 게 좋다.

오릉의 미학


경주시 탑동에 있는 오릉에 갈 때는 평일인 데다, 문 닫기 직전 늦은 시각을 택하는 것이 좋다. 인적이 끊긴 상태에서 거대한 능과 올곧이 마주하면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와 그의 왕비, 그리고 이름을 외우기 힘든 2대왕과 3대왕 등등이 묻혀 있다는 기록을 확연히 믿게 된다. 그렇게나 오래전에 어떤 위엄을 자랑하고 싶었기에 그때 사람들은 이렇게 큰 무덤을 만들려고 했던 것일까.

발굴이 이뤄지지 않아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면 오히려 발굴을 하지 않은 채 다시 천년이 지나갔으면 하는 바람이 든다. 지나간 일은 꼭 들춰내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그건 사랑도 마찬가지여서 상대가 과거에 어떤 사람과 정을 통했든 그것을 캐내는 게 꼭 좋은 일은 아니다.

물론 질투는 늘 화신 같아서 상대가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했다고 생각하면 온몸과 마음이 활활 타오르는 듯싶지만 그건 잠깐만 참으면 되는 일이다. 들춰내는 자의 마음이 고통스러운 만큼 들춰내지는 상대의 마음은 더욱 더 지옥일 수 있는 노릇이다. 사랑은 고린도 전서의 진부한 표현처럼 참음으로 해서 온유해지는 법이다.

오릉의 정적이 엄습해올 때쯤이면 ‘경주’의 인물들이 왜 느닷없이 이곳을 오르려 했는지 알 것 같은 느낌도 스며든다. 아주 얕은 울타리를 풀썩 뛰어넘어 한 발짝이라도 더 옛사람들 곁으로 가고 싶어진다. 제1릉으로 불리는 원형 봉토분은 작은 산처럼 느껴지는데 그 위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진실로 달라 보일 것 같기 때문이다.

고도를 기다리며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것은 실로 많은 것을 고민하게 되는 나날의 연속이다. 사람들 중 대다수는 꿈을 잃는다. 그래서 늘 다른 길을 찾게 되지만 어느 순간 눈을 떠보면 원점으로 돌아와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암투가 많고, 질시가 계속되며, 자신의 진정한 가치가 사람들 사이에선 몰이해의 바닥으로 떨어지기 일쑤다. 사람들은 같이 살기 위해 일을 하지만 결국은 더불어 뭔가 이뤄낸다는 것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는 뼈아픈 자각을 하게 된다. 신라의 도시 경주는, 천년을 경유하며 사람들의 그 같은 통증을 완화시켜 준다.

주변이 온통 유적지 천지인 이곳에서 사람들은 조금씩이나마, 그리고 기이하게도, 자신의 궤도를 찾아갈 길을 발견하게 된다. 그 긴 역사에서 사람들이 어쨌든 견디고 살아온 만큼 자신 역시 그럴 수 있을 것이라는 위안을 얻는다.

고도가 좋은 것은 그 때문이다. 장률의 ‘경주’가 자꾸 기억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영화는 늘 그런 곳에 가고 싶어 한다. 영화는 고도와 함께 늙어간다.

그리고 그 늙은 도시는 늙어가는 사람들조차 다시금 사랑을 하게 만든다. 함께 늙어가는 무엇이 있다는 안도감을 주기 때문이다. 고도를 위하여. 그리고 고도를 기다린다.

글 · 오동진 | 영화평론가 사진 · 김성룡 | 포토그래퍼
<이 기사는 신동아 2015년 11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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