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경자 화백은 뉴욕을 그렸지만 뉴욕은 그를 보지 못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0월 23일 19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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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요커들에 깊은 인상 남긴 고 천경자 화백의 1981년 작 ‘뉴욕 센트럴파크’
그러나 2003년 뇌출혈로 쓰러진 뒤 천 화백을 본 뉴요커 없어
아파트 주민들도 그의 존재 몰라
풀리지 않는 ‘맨해튼 미스터리’ 남기고 떠난 신비의 천재 화가

천경자 화백 아파트
천경자 화백 아파트

1924년 11월11일생인 고 천경자 화백이 맏딸 이혜선 씨(70·섬유 디자이너)와 함께 살았던 미국 뉴욕 맨해튼 43번가 지상 6층 높이 아파트의 외양은 많이 낡았다. 100년이 더 돼 천 화백의 나이(91세)보다 오래됐다. 벌겋게 녹슨 비상용 사다리가 건물 정면에 설치된 방식은 요즘 아파트에선 찾아보기 힘들다.

22일(현지 시간) 오후 4시경 이 아파트를 찾았다. 경비원도 없고 입주자들은 아파트 정문을 직접 열쇠로 열고 들어가는 구조였다. 정문 바로 왼쪽 작은 동판엔 입주자 이름과 호수가 정해진 순서 없이 불규칙하게 적혀 있었다. 1호에 사는 사람 이름이 하단부에, 33호 입주자 이름이 상단부에 쓰여 있는 식이다. 중간에 있는 17호 ‘Lee, H.’에 눈길이 멈췄다. 이혜선 씨의 영문 머리글자다. 초인종을 눌렀다. 구식 기계음이 전달됐다. 하지만 아무 대답이 없다. 서너 차례 다시 눌러도 마찬가지다. 손에 비닐쇼핑백을 들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던 50~60대 정도로 보이는 백인 남자를 멈춰 세웠다.

“이 아파트에 사느냐”

“그렇다.”

“17호에서 한국의 유명한 여류 화가가 투병생활을 하다가 최근 돌아가셨다. 이에 대해 아는 게 있느냐.”

“모른다. 그 옆 17호 초인종 누르고 직접 물어보지 그러느냐.”

그 중년남자는 그렇게 말하곤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조깅을 다녀오는지 짧은 운동복 반바지 차림의 20대 젊은 여성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졌지만 “내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잘 모른다”는 무심한 대답만 돌아왔다.

지난해 6월 한국의 한 방송사는 천 화백의 행방을 추적한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특히 2003년 뇌출혈로 쓰러진 뒤 이 천재 화가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집중 탐방했다. 그러나 추가된 팩트(사실)는 ‘천 화백이 한때 뉴욕의 한 요양원에서 지냈다’는 것뿐이었다. 그 때도 아파트 주민들조차 천 화백을 본 사람이 없었다. 큰딸 이 씨는 대한민국예술원이나, 뉴욕한국문화원, 또는 언론들의 천 화백 생존 여부 확인 요청에 ‘사생활 침해며 명예훼손’이라는 태도로 일관해왔다. 이 방송 프로그램에서도 “어머니는 분명 살아계시지만 그 생존 여부를 알릴 필요는 없다”며 강한 거부감을 표현했다. 이 씨는 또 “나는 어머니를 모시느라 24시간이 부족하다. 내가 어머니의 목숨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는 건 ‘예술인의 최고 명예’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 초 대한민국예술원은 천 화백의 생존 여부를 확인하기 어려워지자 ‘회원에게 매달 180만씩 지급되는 수당’을 잠정 중단했고, 이 씨는 “살아계신 어머니에 대한 모독”이라며 예술원 회원 자격을 반납하기도 했다.

이 씨는 한국에서 일부러 천 화백의 병문안을 온 원로 예술인의 방문도 거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뉴욕의 문화계 인사들이나 뉴욕문화원 관계자들은 한결같이 “뉴욕에서 천 화백을 직접 봤다는 사람이 (큰딸 이 씨를 제외하고) 단 1명만이라도 있었으면 생존 여부 논란 같은 불편한 미스터리가 이렇게 오래, 또 반복적으로 제기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뉴욕의 한 인사는 “이 씨는 뉴욕한국문화원 관계자들의 안부 인사나 접촉도 ‘결국 어머니 천 화백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수작’이라며 크게 화를 내곤 했다. 이 씨에게 한번 혼난 직원들은 다시 전화를 하거나 만남을 시도할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였다”고 전했다. 3,4년 전만 해도 이 씨는 간혹 뉴욕한국문화원을 들러 직원들과 천 화백의 작품 등에 대해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고 한다. 이 무렵 한 직원이 “선생님(이 씨)이 이렇게 밖에 나와 계시면 어머님(천 화백)은 누가 돌보세요”라고 물은 적이 있다. 이 씨는 “간병인이 집에 있다”고 했다고 한다.

천 화백은 1998년부터 뉴욕에서 큰딸 이 씨와 함께 살아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18년을 거주한 뉴욕에서 그가 작품 활동을 한 흔적은 전혀 없다. 위작 논란으로 활동 중단을 선언한 뒤이기도 하다. 그러나 천 화백은 늘 “그림을 그리는 건 나에겐 힘든 작업이지만 그래도 그 덕분에 내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곤 했다. 그래서 그가 투병생활을 하기 전 타국생활의 외로움을 혹시 그림으로 달래지 않았을까 등을 뉴욕 문화계 인사들은 특히 궁금해 한다. 만약 습작 같은 것이라도 있다면 그 안엔 천재 화가가 본 뉴욕의 모습이 담겨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천경자 화백의 ‘뉴욕 센트럴 파크’(1981년 작)
천경자 화백의 ‘뉴욕 센트럴 파크’(1981년 작)

천 화백이 표현한 뉴욕은 1981년 작품인 ‘뉴욕 센트럴 파크’가 유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뉴욕에 거주하는 한 예술인은 “천 화백 사망 소식을 듣고 손님 없이 빈 (관광)마차 위에 외롭게 앉아 있는 마부의 모습과 천 화백의 쓸쓸했을 말년이 자꾸 겹쳐서 떠오른다”고 말했다. 이 인사는 “천 화백은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미술계에 길이 남을 인물”이라며 “그를 둘러싼 각종 미스터리를 이젠 ‘천재 화가가 끝까지 간직한 신비로움’으로 받아들였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그것이 고인의 명예를 지켜드리고 명복을 비는 길 아니겠느냐는 얘기였다.

천경자 화백. ‘그는 뉴욕을 그렸지만 뉴욕은 그를 보지 못했다.’

뉴욕=부형권 특파원 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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