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입자 면접권’ [횡설수설/박중현]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12월 9일 23시 19분


한국 특유의 ‘전세 제도’에서 세입자의 지위를 엄밀히 따지자면, 많게는 집값의 절반 이상을 전세 보증금 명목으로 집주인에게 빌려준 ‘사적 대출’의 채권자다. 그런데도 1960년대 시작된 산업화 시대 이후 살 만한 집이 늘 부족했던 대도시에서 세입자는 집주인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사회적 약자일 수밖에 없었다. 역대 정부의 정책 역시 전세 기간 연장, 전세사기 방지 등 세입자의 권익 보호에만 집중됐다. 최근 “우리 권리도 보장해 달라”며 집주인들이 ‘세입자 면접권’을 요구하고 나선 건 그에 대한 반작용인 셈이다.

▷일반 집주인을 포함해 임대사업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대한주택임대인협회는 최근 부동산테크기업, 신용평가기관 등과 손잡고 ‘세입자 스크리닝 서비스’를 내년 중 제공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임대차 계약을 맺기 전에 세입 희망자의 최근 3년간 임차료 및 공과금 체납 이력, 과거 계약 갱신 정보, 동거인 정보, 반려동물 유무, 흡연 여부 등을 집주인이 미리 확인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거다.

▷전세사기가 사회 문제로 부각된 2021년 이후 정부는 세입자들이 집주인의 보유 주택 수, 보증사고 이력, 세금 체납 여부를 체크할 장치를 마련했다. 하지만 반대로 집주인은 세입자 정보를 확인할 길이 없다는 게 집주인들의 불만이다. 세입자가 금융채무불이행자나 위험인물이어도 알 방법이 없다. 이런 ‘정보 비대칭’을 해소할 방법으로 떠오른 게 사전 스크리닝 서비스, 세입자 면접권 요구다.

▷사회민주당 소속 한창민 의원 등 범여권 의원들이 10월에 발의한 이른바 ‘3+3+3 법안’은 이런 분위기에 불을 댕겼다. 임대차 의무계약 기간을 2년에서 3년으로, 계약갱신요구권 사용 횟수를 1회에서 2회로 늘려 최장 9년까지 계약을 유지할 수 있도록 법을 고치자는 내용이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검토한 바 없다”며 발을 뺐지만, 문재인 정부의 계약갱신요구권 도입으로 2년이던 임대 기간이 ‘2+2년’으로 연장되는 걸 경험한 집주인들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국회에는 ‘세입자 면접제’ 입법 청원이 제기돼 2500여 명이 동의했다.

▷급속한 전세의 월세화도 집주인들이 세입자 정보를 중시하게 된 이유다. 전세보다 보증금이 현저히 적은 월세의 경우 세입자가 안정적 직업은 있는지, 밀리지 않고 월세를 낼 수입은 있는지 확인하는 일이 중요해진다. 미국, 독일 등 선진국에서 집주인이 세입자의 직업·소득·신용도·범죄 기록 등을 체크하는 건 보증금 규모가 몇 달 치에 불과하고, 한 번 들인 세입자를 한국보다 내보내기 어려워서다. 서울·경기도의 전세 매물을 실종시킨 ‘10·15 대책’이 예상치 못한 나비 효과를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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