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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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박중현 논설위원입니다.

sanjuck@donga.com

취재분야

2025-03-31~2025-04-30
칼럼100%
  • [횡설수설/박중현]美-日 관세 협상에 깜짝 등판한 트럼프

    “큰 진전(big progress)이 있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6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이런 메시지를 올렸다. 고위급 무역협상을 위해 백악관을 찾은 아카자와 료세이 일본 경제재생상과 집무실에서 찍은 사진도 함께였다. 회담 전엔 “일본이 협상하러 온다. 나도 재무, 상무장관과 함께 회의에 참석한다”고 예고까지 했다. 도쿄에서 이런 상황을 보고받은 이시바 시게루 총리는 협상 당일 장관급 회의에 참석하겠다는 트럼프의 일방 통보, 당장은 피하고 싶었던 방위비 문제 거론, 첫 만남부터 큰 성과라도 나온 양 과장하는 그의 태도에 적잖이 당황해 긴급회의를 열었다고 한다. ▷관세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진 지금 트럼프에겐 ‘전리품’이 절실하다. 이달 초 세계를 상대로 상호관세 포문을 열었다가 90일 미루고, 중국에만 145% 초고율 관세를 물리며 화력을 집중하는 중이다. 그런데 중국은 희토류 수출 금지 등의 조치로 맞서며 요지부동이다. 하루 전 유럽연합(EU)과의 무역협상도 성과 없이 끝났다. 트럼프의 돌발 행동에 압박을 느꼈을 이시바 총리마저 “여전히 입장 차이가 있다. 이번 협상은 다음 단계를 위한 초석”이라고 한다. 이젠 트럼프 쪽이 오히려 안달복달이다. ▷다음 주 한미 무역협상을 시작하는 우리 정부로선 이런 장면을 미리 본 게 그나마 다행이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등 협상단을 트럼프가 직접 만나겠다고 나서는 상황이 벌어지지 말란 법도 없다. 수십 개국과 동시협상을 벌이는 미국은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는 나라에 관세를 더 많이 깎아 주겠다’며 다른 나라들 사이에서 ‘죄수의 딜레마’를 부추기고 있다. 트럼프의 거친 기세에 휘말리면 엉뚱한 실수를 할 수 있다. ▷트럼프의 공격적인 태도에는 대선에서 트럼프 편에 섰던 빅테크, 월스트리트의 거물들마저 부정적 태도로 속속 돌아서는 상황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월가의 황제’ 제이미 다이먼 JP모건체이스 최고경영자(CEO)는 “트럼프 관세정책이 미국의 국가 신뢰도를 손상시킬 수 있다”고 비판했다. 퇴임 후 침묵하던 조 바이든 전 대통령도 “그들은 확실히 뭔가를 망가뜨리고 있다. 총부터 먼저 쏘고 나중에 조준한다”며 설익은 정책들을 꼬집었다. ▷한국엔 중국을 압박하는 미국의 추가 조치들까지 부담이다. 중국 인공지능(AI) 모델 딥시크에 쓰이는 엔비디아 칩의 대중 수출이 막혀 이 칩에 들어가는 한국산 고대역폭메모리(HBM) 반도체도 타격을 받게 됐다. 이래저래 힘든 상황이지만 한국은 조급함을 달래고 상대 패부터 확인해야 한다. 협상 테이블에선 언제나 성질 급한 쪽이 더 많은 걸 내주게 된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5-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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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중현 칼럼]트럼프 관세전쟁, ‘너무 달린’ 민주당 정책 유턴할 기회

    윤석열 전 대통령이 3년을 못 채우고 파면되면서 그의 경제개혁 정책도 먼지처럼 흩어지게 됐다. 유일하게 성사된 국민연금 모수(母數)개혁도 탄핵소추 기간에 여야 합의로 이뤄졌다. 국가 개조를 위한 깊은 철학도, 치밀한 실행 전략도 없이 개혁 과제에 발을 들였고, 여소야대 정국 속에서 벽에 부딪칠 때마다 움찔하며 물러선 게 다다. 미완(未完)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한 윤 정부 경제개혁의 성적표다. 민간 주도, 건전 재정, 세제 정상화, 부동산 규제 완화 등 윤 정부의 우파 정책과 날을 세우며 대결해온 더불어민주당의 정책 기조는 그사이 심하게 왼쪽으로 ‘오버런’했다. 윤 전 대통령 등이 거부권을 행사할 때마다 ‘얼마나 버티나 보자’ 식으로 더 센 법안을 재차, 삼차 밀어붙이다가 그렇게 됐다. ‘이재명의 민주당’이 171석 다수 의석의 힘으로 추진한 법안 중에는 같은 당이 집권했던 문재인 정부도 부작용이 우려돼 섣불리 시도하지 못한 것들이 태반이다. 지난주 헌법재판소의 8 대 0 탄핵 결정으로 대통령이 물러나고, 국민의힘은 여당 지위를 상실했지만 극한 대결 구도 속에서 굳은살이 박인 민주당의 정책 기조는 고스란히 남았다.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와 주주’로 확대하는 상법 개정이 그렇고, 불법 파업 노조원에 대해 회사의 손해배상 청구를 제한하는 ‘노란봉투법’이 그렇다. 주택 공급 확대를 위한 재건축 규제 완화, 첨단산업 경쟁력 제고를 위한 주 52시간제 예외 인정에 반대하는 것도 여전하다. 6·3 대선의 민주당 후보로 가장 유력하고, 각종 여론조사에서 국민의힘 대선주자들을 압도하는 이 대표도 마찬가지다. 올해 초 잠시 ‘우클릭’ 조짐을 보일 때 기본소득을 포함한 ‘기본 시리즈’까지 포기할 가능성을 내비쳤지만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경기도지사 시절부터 무한 반복해온 ‘빚을 내서라도 전 국민에게 돈을 풀자’는 고정 레퍼토리도 그대로다. 그가 대통령이 되면 돈 풀기 요구에 번번이 태클을 걸어온 기획재정부를 공중 분해할 거란 전망도 나온다. 하지만 급변하는 국내외 경제 환경은 정부·여당 공격용으로 특화된 민주당, 이 대표의 정책들이 내포한 위험성을 더 키우거나, 사실상 실행이 불가능한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민주당이 행정, 입법을 동시에 장악할 경우 걸림돌이 사라질 상법 개정이 대표적이다. 최근 미국 정부는 한국에 25%의 상호관세를 물리면서 그 이유로 외국 기업인에 대한 한국의 과도한 형사처벌 관행을 ‘비관세 장벽’의 사례로 꼽았다. 이사회 결정이 마음에 안 드는 주주가 마음껏 배임죄 소송을 제기할 수 있게 하는 상법 개정은 국내에 진출한 외국 기업에도 적용된다. 다른 선진국에 없는 ‘갈라파고스 입법’이란 점에서 미국 정부가 문제 삼는 비관세 장벽의 조건에 부합한다. 민주당 주도로 만들어졌고, 안전관리 소홀로 사망사건이 발생한 기업의 최고경영자(CEO) 등에게 ‘1년 이상 징역 또는 10억 원 이하 벌금’을 물리는 중대재해처벌법에 외국 기업들이 불만을 제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더욱이 날로 격화하는 글로벌 관세전쟁은 향후 몇 년간 한국 경제의 엔진인 수출기업을 위축시키고, 그로 인해 세수도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2023, 24년 2년간 한국의 세수는 이미 90조 원 펑크였다. 국민 1인당 100만 원씩 나눠주는 데 연간 50조∼60조 원이 필요한 기본소득을 실행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앞뒤 가리지 않고 강행한다면 재정적자 확대 우려로 국가신용등급이 강등된 중국이나 프랑스, 무리한 복지 지출 탓에 화폐가치가 폭락 중인 인도네시아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역설적으로 트럼프 정부가 초래하는 글로벌 경제위기는 정쟁의 부산물로 생겨난 정책들을 민주당과 이 대표가 바로잡고, 지지층을 설득하기에 좋은 기회다. 향후 수년간 한국의 대미 수출 기업들은 고관세를 물면서 이익 축소를 감수하거나, 한국을 떠나 미국 땅에 공장을 지어야 한다. ‘초부자 감세’란 민주당의 주장에 따라 법인세율을 낮춰주지 않아도, 많은 기업들이 버는 게 없어 세금을 제대로 못 내는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런 상황에선 나랏빚을 내서 복지를 늘리고 싶은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국가 경쟁력을 유지하고 미래 세대의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기업을 지원하는 일을 소홀히 할 수 없다. 이 대표가 극단적 정책을 선호하는 강성 지지층을 끌어안아야 할 가장 큰 이유였던 사법 리스크도 선거법 재판 2심 무죄 판결로 상당 부분 희석됐다. 민주당은 여당이 사라진 한국 정치판에서 명실상부한 최대 권력이다. 대선에서 승리해 실제 추진하더라도 국가 경제에 위험을 초래하지 않을 책임감 있는 정책, 공약을 내걸고 유권자의 평가를 받아야 한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5-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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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중현 칼럼]대표선수, 히든카드 없이 ‘타짜 트럼프’ 상대하는 韓

    미국의 관세 폭탄을 조금이라도 비켜가기 위해, 자국 안보에 도움 될 말 한마디라도 더 듣기 위해 각국 정상들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앞에 ‘깜짝 선물’을 펼쳐놓고 있다. 옛날 중국, 로마 황제에게 주변국들이 진상품 갖다 바치는 모습을 연상케 해 ‘조공 외교의 부활’이란 푸념이 나온다. 그래도 지도자 개인의 자존심보다 훨씬 중요한 게 국가 전체의 이익이다. 지난달 초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는 ‘1조 달러(약 1460조 원) 대미 투자’와 도금한 사무라이 투구로 트럼프를 웃게 만들면서 일본산 제품의 관세 면제를 요청했다. 뜯어보면 2023년까지 일본의 대미 누적투자액 8000억 달러에 2000억 달러를 추가한다는 것이어서 숫자가 과대 포장됐다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트릴리언(trillion·1조)’이란 단어를 ‘어마어마하게 큰 금액’이란 의미로 즐겨 쓰는 트럼프의 언어 습관까지 신중히 고려한 노력이 보인다. 중국의 안보위협이 최대 현안인 대만에선 ‘호국신산(護國神山·나라를 지키는 신령스러운 산)’으로 불리는 파운드리 기업 TSMC가 정부 대신 나섰다. 조 바이든 정부 때 발표된 대미 투자액 650억 달러와 별도로 1000억 달러를 추가 투자해 미국에 반도체 공장 5곳을 더 짓기로 했다.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은 “여러분은 트럼프 대통령의 힘을 보고 있다”며 추켜올렸고, 트럼프는 “(중국의 대만 침공은) 재앙적 사건이 될 것”이란 말로 화끈하게 보답했다. 우크라이나를 빼고 미국과 직거래 종전 협상에 나선 러시아 푸틴 대통령은 전쟁으로 일부 파괴된 러시아·독일 간 액화천연가스(LNG)관 노르트스트림 사업권을 선물로 꺼내들었다. 미국이 사업권을 챙기는 대신 유럽연합(EU)에 다시 가스를 팔겠다는 거다. 선물은 꺼내지도 못하고 백악관에서 트럼프와 말다툼을 한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자국 희토류 자원을 미국에 넘기는 광물협정에 반강제적으로 서명해야 했다. 별난 선물도 등장했다. 엘살바도르의 부켈레 대통령은 미국에서 체포된 불법 이민자, 범죄자를 악명 높은 자국 교도소에 수용해 트럼프의 골칫거리를 없애주겠다고 제안했다. 한국도 뭐든 카드를 내놓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 임박했다. 12일부터 미국은 철강·알루미늄·자동차 부품에 대해 25% 관세를 물린다. 다음 달 2일부터는 환율정책·보조금 등 ‘비관세 장벽’까지 고려한 국가별 맞춤형 상호관세가 예고돼 있다. 최근 의회 연설에서 트럼프는 “한국의 대미 평균 관세는 미국의 4배”, “반도체지원법은 폐기돼야 한다”는 등 사실과 다르고, 한국 기업들을 기겁하게 만드는 발언들을 쏟아냈다. 비상계엄·탄핵 사태 때문에 참고 있던 한국행 청구서를 날리기 시작한 거다. 돈을 쓸어 담고 있는 대만 반도체 기업의 막대한 투자, 우크라이나의 광물자원, 러시아 LNG관 사업권 같은 카드가 한국에는 없다. 정부, 경제계에선 조선업 협력, 미국산 천연가스 구매 확대, 한미 원전협력 등을 거론한다. 하나하나 떼어보면 대단치 않아 보이지만 상상력을 발휘해 조합하면 트럼프를 놀라게 할 ‘히든카드’로 키울 여지가 적지 않다. 최근 들어본 제일 ‘신박한’ 카드는 중국과의 군함 수 경쟁에서 뒤처져 해군력 확충에 비상이 걸린 미국에 우리 돈을 들여 군함을 매년 몇 척씩 만들어주자는 아이디어다. 이 정도면 방위비 지출 축소, 중국과 해양패권 경쟁에 열을 올리고 있는 트럼프가 “내가 돈 한 푼 안 들이고, 미국 해군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었다”며 흥분할 만한 일 아닌가. 한국은 이지스 구축함을 척당 1조 원의 ‘저렴한’ 가격에 건조할 수 있는 자유진영의 유일한 나라다. 경제·안보를 위해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지출이라면 미국과 안보 파트너십을 공고히 하면서, 우리 조선업계에 돈을 투입해 경제에도 보탬이 되는 선택을 할 수 있다. 이런 제안이 제대로 먹힌다면 최근 트럼프가 한국과 일본의 참여를 슬쩍 기정사실로 만들어버린 사업성이 불투명한 알래스카 천연가스 개발사업 등을 적당히 피할 핑곗거리도 될 수 있다. 더 중요한 건 이런 카드를 들고 협상 테이블에 나갈 대표 선수다. 한국은 몇 달 뒤 백악관을 방문해 ‘타짜 트럼프’와 마주 앉을 플레이어가 누군지 아직 알 수 없는 상태다. 아무리 그럴듯한 협상안이 있어도 결국 어떤 카드를 쓸지 선택하고, 대신에 반드시 얻어내야 할 최소한의 조건을 정하고, 협상 결과가 불러올 정치·사회적 파장까지 책임지는 건 대통령이다. 절대 패배해선 안 되지만 이기더라도 이긴 걸 내색하면 안 되는, 나라의 미래가 걸린 최고 난도의 정치·경제·외교·안보 ‘멀티 게임’이 한국 지도자의 앞에 놓여 있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5-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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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중현 칼럼]이재명의 ‘脫이념’ 연설에 빠져 있는 것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그제 연설만큼 국회 교섭단체 연설이 주목받는 경우도 많지 않았을 것이다. 최근 반대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지지자가 보기에도 아찔할 정도로 롤러코스터를 탄 것 같은 ‘우(右)클릭’ 급변침을 추진한 영향이 크다. ‘성장’이란 말이 29번 등장한 이번 연설은 우파 성장담론의 비중을 늘리려고 애쓴 기색이 역력했다. 기존 ‘먹사니즘’ 비전을 ‘잘사니즘’으로 업데이트한 것도 ‘먹고산다’는 말이 풍기는 생계형 이미지에 경제 성장의 색채를 입히기 위해서일 거다. 하지만 좌우를 넘나드는 42분간 말의 성찬에도 그의 메시지가 공허하게 느껴졌다는 평이 많다. 가장 큰 이유는 연설의 내용이 ‘자원은 유한하다’는 경제의 기본 전제에서 이탈해 있기 때문이다. 이번을 계기로 이재명표 ‘기본 시리즈’를 공식 철회할지 많은 이들은 주목했지만 “보편적 기본사회에 대비해야 한다” “기본사회를 위한 회복과 성장 위원회를 설치하겠다”는 발언을 통해 결코 포기할 뜻이 없다는 걸 확인시켜줬다. 알려진 대로 지난 대선 때 공약처럼 전 국민에게 연 100만 원씩 나눠주는 기본소득에는 매년 50조 원 이상의 돈이 든다. 돈 푸는 정책은 거둬들이지 않으면서 A(AI·인공지능), B(바이오), C(콘텐츠와 문화), D(방위산업), E(에너지), F(제조업)은 적극 지원하겠다고 했다. 하나하나가 미국, 중국, 유럽연합(EU), 일본 등 주요국들이 수조∼수백조 원을 투입해 키우는 산업이다. 미중의 AI 패권 독점을 좌시할 수 없다며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AI에 투자한다고 밝힌 액수가 163조 원이다. 자유무역 질서가 해체되고, 자국우선주의가 확산함에 따라 산업 육성은 돈이 많이 드는 대단히 비싼 정책이 됐다. 과거 기본소득 재원조달 방법을 확실하게 내놓지 못했던 이 대표는 ‘ABCDEF 산업’ 육성의 비용도 어디서 조달할지 제시하지 않았다. 같은 문제를 고민하는 선진국 정부들은 세금에서 기업에 직접 보조금을 주거나, 세금을 깎아준다. 하지만 이 대표와 민주당은 법인세율 인하, 대기업에 대한 보조금 지급을 ‘초부자 감세’라며 반대해왔다. 그렇다면 과도한 복지공약을 축소하려는 의지라도 보여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기본소득은 복지정책이면서 성장정책”이라며 국민에게 돈만 나눠주면 경제가 알아서 성장한다는 ‘오리너구리론(論)’의 확장판일 뿐이다. 최근 이 대표의 친기업 행보에 기대를 걸었던 기업인들은 이번 연설을 보고 기겁했을 공산이 크다. “첨단기술 분야에서 장시간 노동과 노동착취로 국제경쟁력을 확보하겠다는 말 자체가 형용모순”이란 표현은 반도체특별법 ‘주 52시간제 예외 적용’에 그가 내비쳤던 전향적 태도의 진의를 의심케 한다. 그는 한국의 근로시간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5위라는 통계를 인용해 “AI와 첨단기술에 의한 생산성 향상은 노동시간 단축으로 이어져야 한다”며 ‘주 4일제’ 도입도 주장했다. 이제 막 AI에 투자하자면서 나중에 맺힐 과실을 분배할 궁리부터 하는 셈이다. 그가 인천 계양을 국회의원 후보로 나섰을 때 “비행기가 수직 이착륙하는 시대가 열린다”면서 김포공항 이전을 공약했던 것만큼 중간 과정을 한참 건너뛴 비약이다. 게다가 한국의 노동생산성이 OECD 38개 회원국 중 33위로 바닥권이란 통계는 무시됐다. AI를 도입해 높아질 생산성만큼 근무시간을 줄이자는 건 ‘임금 삭감 없는 근로시간 단축’을 의미한다. 높은 최저임금을 피해 ‘신기술’인 키오스크를 도입하면서 직원 수를 줄인 자영업자에게 남은 직원에겐 5일 치 임금을 주면서 4일만 근무시켜야 한다는 얘기처럼 들린다. 원전보다 훨씬 생산비용이 비싼 재생에너지 비중을 빠르게 늘리자는 에너지 정책은 연설문 안에서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 탈원전 정책의 여파로 급등한 산업용 전기요금의 직격탄을 맞은 게 이 대표가 ‘산업위기대응 특별지역’까지 선포해 지원하자는 철강, 석유화학 산업이다. 미국 트럼프 정부는 제조업을 부활시키기 위해 화석연료까지 마구 퍼내 전기요금을 낮춰주겠다고 한다. 게다가 연설 전문을 뒤져봐도 비용 안 들이고 기업을 뛰게 만들 ‘규제 완화’ ‘규제 개혁’ 같은 말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주류 경제학에선 경제성장을 자본, 노동, 생산성의 함수로 본다. “진보 정책이든 보수 정책이든 유용한 처방이라면 총동원하자”고 주장하려면 이 정도 기본 전제에는 동의해야 한다. 연설에 나타난 이 대표의 성장, 기업에 대한 인식은 일반 상식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 이번 연설이 윤석열 대통령 탄핵과 조기대선을 기대하면서 이 대표가 중도 확장을 노리고 내놓은 ‘대선 출사표’라는 해석이 많다. 그렇다면 최소한 중도 성향 유권자가 납득할 수 있는 정상적 논리로 가다듬어야 한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5-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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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박중현]“개인 정보 새면 어쩌나”… 확산되는 딥시크 금지령

    설 연휴 중 글로벌 인공지능(AI) 업계에 ‘스푸트니크 쇼크’를 던졌던 중국산 AI ‘딥시크(DeepSeek)-R1’의 충격파가 한국을 비롯한 각국 정부와 군대, 금융업계 등으로 급속히 번지고 있다. 딥시크의 진짜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챗GPT의 20분의 1이란 저렴한 개발 비용이 사실인지 궁금해하고, 신기해하는 단계는 지났다. 그보다 중국이 똑똑한 AI를 손에 쥐었을 때 다른 나라 국방, 금융 시스템에 닥칠 ‘실존적 위협’을 걱정하는 국면으로 빠르게 전환 중이다. ▷국방부, 외교부, 산업통상자원부, 경찰청 등은 안보·외교·산업 기밀 유출 우려를 이유로 인터넷으로 외부에 연결된 PC의 딥시크 접속을 차단했다. 카카오 등 정보기술(IT) 기업과 한국은행, 시중은행, 증권사들도 개인정보 보호 등을 이유로 금지령을 내렸다. 앞서 대만, 일본 정부는 공공부문 근로자의 사용을 금지했고, 미국 일부 주도 같은 조치를 취했다. ▷딥시크 금지령 확산에는 기업의 독립성이 보장되지 않는 중국적 현실이 작용한다. 중국의 ‘데이터보안법’은 정부가 필요로 할 경우 기업이 이용자 정보를 제공해야 하는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다른 나라 국민의 개인정보도 노출될 가능성이 있다. 미국 플랫폼 기업들처럼 사용자 취향에 따라 맞춤형 광고를 보내는 데 정보를 쓰는 것과 차원이 다른 위험이다. ▷딥시크는 사용자가 키보드를 치는 타이핑 습관까지 분석해 한 PC를 여럿이 쓰더라도 현재 접속한 사람이 누군지 가려낸다. 딥시크는 톈안먼 사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관련한 질문에 ‘묵비권’을 행사하는 중이다. 그런데 한 해외 누리꾼이 언어, 내용을 바꿔가며 집요하게 관련 질문을 했더니 “너는 지난주 120개 언어로 887번이나 물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리려는 건가. 그만두라”는 섬뜩한 경고성 대답을 했다고 한다. ▷벌써 120만 명이 넘는 한국인이 딥시크 AI를 쓴다. 약 500만 명이 이용하는 챗GPT에 이어 2위다. 개인 월 구독료가 20달러인 챗GPT와 추론 등에서 성능이 비슷한데 공짜로 쓸 수 있다는 게 사용자 급증의 이유다. 숏폼 콘텐츠를 앞세워 전 세계 청소년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높은 SNS로 자리 잡은 중국계 ‘틱톡’의 약진이 재현될 것이란 평가까지 나온다. ▷국민의 정보 유출 불안감을 고려해 정부 개인정보보호위원회는 딥시크 중국 본사에 개인정보의 수집·보관 방식을 공식 질의했지만 1주일째 답이 없다고 한다. 설사 딥시크 측이 ‘안심해도 좋다’고 답하더라도 몇 푼 안 되는 가격에 내 전화번호, 주민등록번호가 중국에서 손쉽게 거래된다는 걸 잘 아는 한국인들이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긴 어려울 것 같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5-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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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중현 칼럼]‘트럼프-트뤼도의 악연’, 韓美 관계에선 피할 수 있을까

    “‘그’가 40분이나 즉석 기자회견을 하는 바람에 늦은 거예요.” 2019년 12월 초 영국 버킹엄궁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70주년 기념 정상회의 환영식장.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에게 늦게 온 이유를 물었다. 당시 48세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친절하게도 마크롱이 ‘그’ 때문에 늦은 거라고 대신 변명해 줬다. “그의 팀원들도 턱이 바닥에 떨어지도록 놀라더라고요”라고도 했다. 꺼진 줄 알았던 마이크를 통해 녹음된 이 대화가 공개되자 자기가 없는 자리에서 나온 ‘뒷담화’에 발끈한 그는 트뤼도를 “위선적인 사람(two faced)”이라고 비난한 뒤 기자회견을 취소하고 런던을 떠났다. 작년 11월 말 ‘캐나다 수입품에 25% 관세’ 발언에 놀라 미국 플로리다로 날아간 트뤼도는 “미국 51번째 주 주지사”라고 그로부터 조롱당했다. 많은 이들이 5년여 전 일을 가슴에 담아뒀던 도널드 트럼프의 뒤끝이 작렬한 것으로 해석한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최근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나를 ‘한국의 트럼프’라 부른다”고 했다. 동아일보 신년 여론조사에서 이 대표는 여권의 대선주자들 모두와 벌인 조기 대선 가상 양자대결에서 큰 차이로 앞섰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조기 대선이 실제 치러질지, 자기 앞에 놓인 수많은 사법리스크를 넘어설 수 있을지 불확실한 상황인데도 벌써부터 트럼프의 등장을 은근히 의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면에선 윤석열 대통령 1차 탄핵소추안에 민주당이 “가치외교라는 미명하에 지정학적 균형을 도외시한 채 북한·중국·러시아를 적대시하고, 일본 중심의 기이한 외교정책을 고집하며…”라는 대목을 넣은 건 실수였다. 2차 탄핵안에서 후다닥 뺐지만 이 대표의 “중국에 셰셰” 발언과 함께 ‘친중(親中), 반일(反日) 본능’을 중국을 적대시하는 트럼프 진영에 확실하게 들켰다. 당선 직후 윤 대통령과 5분간 통화할 때 한국의 조선 산업, 선박 건조 능력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 트럼프의 입에서 요즘 한국 관련 코멘트가 사라진 이유도 이와 관련됐을 수 있다. 중국을 상대로 무역전쟁을 예고한 트럼프 2기 정부 4년간 한국은 수출 비중의 약 20%인 대미 수출에선 고율관세, 별도로 20%를 차지하는 대중 수출에선 미국의 반도체 규제 등으로 고전할 가능성이 높다. 줄어들 수출을 벌충할 한국의 돌파구로 소형모듈원전(SMR)을 비롯한 원전산업, 군함 건조를 포함한 조선업, 전차·자주포 등 방위산업이 꼽힌다. 셋 모두 미국의 군사·에너지 안보전략과 대단히 밀접하게 연결된 분야다. 문제는 세 산업 모두가 이 대표와 거대 야당이 일관되게 거부감을 보여 온 분야란 점이다. 트럼프가 ‘한국 정치권은 못 믿겠다’고 판단하는 순간 관련 산업의 도약도 벽에 부딪칠 공산이 커진다. 이 대표와 민주당이 추진해온 국내 정책도 트뤼도의 진보·좌파 정책과 닮았다. 트뤼도 정부는 임기 중 ‘탄소세’를 도입해 많은 반발을 샀는데, 이 대표가 지난 대선 때 자신의 대표공약 ‘기본소득’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도입 의사를 밝혔던 바로 그 세금이다. 캐나다가 인도적 차원의 이민을 대폭 확대하고도 주택 공급 규제를 확실히 풀지 못해 집값이 폭등한 건 문재인 정부 때 부동산 정책을 떠올리게 한다. 작년 12월 트뤼도는 ‘트럼프 관세 리스크’에 선제 대응하겠다며 연소득 15만 캐나다 달러(약 1억5000만 원) 이하 국민에게 250캐나다 달러(약 25만 원)씩 나눠준다고 했다가 이에 반대하는 재무장관이 사퇴하는 일을 겪었다. 틈만 나면 전 국민에게 지역화폐로 나눠주자는 이 대표의 민생지원금과 금액까지 비슷하다. 요즘 유럽 좌파 정치인 깎아내리기, 우파 정치인 편들기 놀이에 열심인 트럼프의 ‘퍼스트 버디(절친)’ 일론 머스크가 한국 사정을 잘 모르는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트럼프 1기 정부 출범 직전인 2016년 말 여론조사에서 캐나다인의 75%는 ‘진보적 가치와 국제 질서를 지키기 위해 트럼프와 맞서야 한다’며 트뤼도를 전폭 지지했다. 지난주 사임 의사를 밝힐 때 지지율은 20% 아래였다. 캐나다인들의 관심사는 결국 먹고사는 문제였다. 트럼프의 시선이 벌써 많이 의식된다면 이 대표는 트뤼도의 ‘핫 마이크 사건’ 교훈을 되살려 “존경한다고 했더니 진짜 존경하는 줄 알더라”식의 꼬투리 잡히기 쉬운 언어습관을 고치는 게 좋겠다. 더욱이 ‘먹사니즘’에 진심이라면 탄핵 정국 와중에 정부의 원전 도입 계획을 축소하는 것 같은 도그마에 빠진 민주당의 정책 기조부터 바꿔야 한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5-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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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박중현]2024년 증시 ‘밸류업’ 외치다 ‘밸류다운’… 올해는 나아질까

    ‘2891.35’. 작년 7월 11일 코스피가 3,000 선 코앞까지 갔을 때만 해도 한국 증시는 순항할 것처럼 보였다. 이틀 후 미국 필라델피아 유세 중 간발의 차이로 총격을 피한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선 후보가 주먹을 쥐고 “파이트!”를 외친 후 코스피는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당선 가능성이 높아진 그의 고관세, 인플레이션감축법(IRA) 공약이 한국 경제에 충격을 줄 거란 우려 때문이었다. 지난달 코스피는 글로벌 금융위기 후 16년 만에 6개월 연속 하락해 2399.49로 마감했다. ▷작년 1월 2일 윤석열 대통령은 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의 증권·파생상품시장 개장식에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 참석했다.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한 금융투자소득세 폐지 방침을 밝혔고, 소액주주 이익 제고를 위한 상법 개정도 검토하겠다고 했다. ‘기업 밸류업(가치 제고) 프로그램’은 이렇게 시동이 걸렸다. 고대역폭메모리(HBM), 자동차 수출의 호조와 대기업들의 잇단 자사주 매입·소각으로 상반기엔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7월의 트럼프 총격 사건, 일본 중앙은행의 기준금리 인상과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 우려로 나타난 8월 5일 ‘블랙 먼데이’ 쇼크에 한국 증시는 속절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미국, 일본 등 다른 나라 주가가 조속히 복원된 것과 달리 한국의 주가 하락엔 브레이크가 없었다. 작년 한 해 증시 성적표는 코스피 ―9.6%, 코스닥 ―21.7%. 큰 폭 상승한 미국 나스닥(31.4%), 일본 닛케이(19.2%), 중국 상하이지수(15.3%)와 정반대의 극심한 ‘밸류 다운’으로 끝났다. ▷하반기 서학개미들은 인공지능(AI) 반도체 선두주자 미국 엔비디아, 트럼프 당선에 기여해 ‘퍼스트 버디(친구)’가 된 일론 머스크의 테슬라를 향한 ‘투자 이민’을 서둘렀다. ‘국장 탈출은 지능순’이란 말이 상식이 되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대화 주제는 엔비디아, 테슬라 주가가 됐다. 작년 말 한국인의 해외 주식투자 중 미국 비중은 관련 통계 집계 후 처음 95%를 넘었다. 국내 투자자가 보유한 미국 주식 가치는 174조 원에 이른다. ▷12·3 비상계엄 선포는 국가 수장이 제 나라 증시를 향해 던진 폭탄이 됐다. 더 떨어질 게 남았나 싶었는데, 12월 한 달간 코스피는 2.3% 더 내렸다. 연초 대통령이 툭 던졌던 ‘상법 개정’은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더 악화시킬 것이란 기업들의 반발만 불렀다. 주가는 그 나라 정치·경제·사회적 실력의 총화란 명제가 작년처럼 뚜렷이 입증된 예도 드물다. 작년 증시를 망친 문제 중 뭐 하나 시원하게 풀린 것 없이 새해를 맞았다는 게 큰 고민거리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4-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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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박중현]엔진의 혼다-기술의 닛산 합병…새 도전 만난 현대차-기아

    1973년 아랍석유수출국기구(OAPEC) 회원국의 원유 금수 조치로 시작된 1차 오일쇼크는 세계 경제의 흐름을 바꿨다. 국제유가가 4배로 뛰면서 미국에선 기름 많이 먹는 제너럴모터스(GM), 포드, 크라이슬러의 대형 세단 대신 작고 연비 좋은 일본 차를 찾는 소비자가 폭증했다. 이때 약진한 ‘일본 차 3총사’가 도요타, 혼다, 닛산. ‘내구성의 도요타, 엔진의 혼다, 기술의 닛산’이라 불려 각 회사의 개성도 뚜렷했다. ▷도요타에 이은 일본 내 2·3위, 글로벌 순위 7·8위 혼다와 닛산이 합병을 추진한다는 소식이 세계 자동차업계를 뒤흔들고 있다. 닛산이 최대 주주로 있는 4위 미쓰비시자동차도 합병 대상이다. 일본 2∼4위 완성차 업체가 한 지붕 안으로 들어가는 대규모 지각변동이다. 세 회사의 작년 세계 판매량은 총 813만 대. 1123만 대인 1위 도요타와 923만 대인 2위 독일 폭스바겐보다 적지만 730만 대인 현대차·기아를 넘는 3위 수준이다. ▷내연차 기술에 집착하다가 전기차 시대에 늦게 대응한 일본 차는 중국 시장 판매량이 급감하고, 한때 완전히 평정했던 동남아 시장에서도 값싼 중국 전기차에 밀리고 있다. 중국 비야디(BYD)의 글로벌 판매 대수는 1년 안에 혼다를 추월할 것으로 보인다. 애플 아이폰을 위탁 생산해 돈을 번 대만 폭스콘이 전기차 진출을 위해 닛산을 인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합병 속도가 빨라졌다. 100년에 한 번 있을 법한 ‘카마겟돈(Car+아마겟돈)’에 직면해 오랜 경쟁 기업이 한 몸이 돼 생존하는 길을 선택했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태 후 저조한 중국 실적, 러시아 시장 철수 등 악재를 이겨내고 글로벌 3위에 오른 현대차·기아에 두 회사의 통합은 달가운 일이 아니다. 폭스바겐이 흔들리면서 머잖아 현대차·기아의 글로벌 2위 자리까지 점쳐지는 상황이었다. 닛산의 악화된 내부 사정 탓에 합병의 시너지가 크지 않을 거란 전망도 있다. 하지만 도요타에 이어 다양한 경쟁 차종을 보유한 ‘일본산 공룡’이 등장하는 건 만만찮은 도전이다.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최고경영자(CEO)는 요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을 등에 업고 “전기차 보조금을 없애자”고 주장하고 있다. 각국의 보조금을 받아 회사를 키워 놓고, 이젠 사다리를 걷어차겠다는 심보다. 중국 BYD는 한국 진출을 예고해 놓은 상태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최근 싱가포르 현대차 혁신센터를 찾아 “우리가 걸어온 여정은 훌륭했지만, 최고의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했다. 거센 도전이 더 많이 닥친다는 건 그만큼 정상이 가까이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4-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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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중현 칼럼]‘개혁 주체’에서 ‘개혁의 적’으로 바뀐 尹의 운명

    “요즘 트럼프가 한국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는데? 윤석열 대통령이 불쑥 비상계엄을 선포하더니 탄핵 절차에 들어가 ‘청구서’ 보낼 상대가 없어져서….” 합리적 설명이 불가능한 초현실적인 일을 마주할 때 사람들은 그런 상황이 촉발하는 희극적 측면을 찾아내 스트레스 압력을 낮추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 농담도 그런 이야기 중 하나다. 도널드 트럼프 차기 미 대통령의 내년 1월 20일 취임을 앞두고 그의 입에 오르내린 나라의 정상들은 좌불안석이다. 그런데 트럼프가 관세 부과, 방위비 분담 등 요구안을 꺼내들기 전에 이번 사태가 터져 한국은 차기 정부가 들어설 4∼6개월 뒤까지 ‘수취인 불명’ 상태가 됐다. 7일 프랑스 파리를 방문한 ‘미치광이 전략의 달인’ 트럼프가 “지금 세상이 미쳐 가는 것 같다”고 했는데, 시리아 정부 전복, 프랑스 정국 불안과 함께 한국도 이유 중 하나일 거다. 물론 지금 한국이 처한 상황은 농으로 넘길 수 있을 만큼 가볍지 않다. 트럼프 재집권 충격에 대비해 일본은 고 아베 신조 전 총리 부인을 급파하고,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그룹 회장은 143조 원의 대미 투자를 약속했다. 프랑스는 노트르담 대성당 재개관식에 트럼프를 초대했고, 캐나다 총리는 그를 만나러 플로리다까지 날아갔다. “트럼프 취임 첫 100시간 안에 한국에 영향 미칠 일이 많이 생길 텐데, 한국엔 대처할 사람이 없다”는 경고가 현실이다. 트럼프 리스크가 아니더라도 한국은 심각한 대내외 도전에 직면해 있다. 미중 갈등으로 인해 반도체·자동차 수출 전망엔 먹구름이 끼었다. 저출생·고령화로 인한 소비 위축은 만성화 조짐이 뚜렷하다. 재도약할 방법은 구조개혁뿐이다. 그런데 연금·노동·의료·교육 등 이른바 ‘4대 개혁’을 추진하던 윤 정부가 자폭하면서 개혁 엔진이 멈췄다. 더 큰 문제는 개혁의 주역이어야 할 대통령이 개혁의 안티테제(antithese·반대), 개혁 이름을 걸고 딴생각을 한 ‘빌런’으로 각인됐다는 점이다. 향후 좌건 우건 어떤 정부가 들어서건 ‘윤석열 브랜드’ 정책들은 ‘개혁을 개혁이라 부를 수 없는’ 금기어가 될 공산이 크다. 정권 재창출로 집권한 박근혜 정부의 관료들조차 전임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 녹색성장을 입에 올리지 못했으니, 이번엔 그때보다 강도가 심하고 훨씬 오래갈 것이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가 시작된 지 며칠밖에 안 됐는데 반동의 신호는 뚜렷해지고 있다. 반도체 연구개발(R&D) 직종 주 52시간제 예외를 인정해야 한다던 경제계의 목소리에선 힘이 빠지고 있다. 의대 정원 확대보다 의료 개혁에 더 중요한 실손보험 개편 작업은 중단 위기다. 노동계에선 윤 정부의 건설현장 노조 폭력 근절 조치를 되돌려 놓으란 요구가 나온다. 올해 5월 여야가 타협할 뻔했다가 윤 정부가 걷어찬 ‘보험료율 13%, 소득 대체율 44%’의 국민연금 개혁안조차 향후 미래 세대에 부담이 커지는 쪽으로 개악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2년 반 전 여소야대 속에서 0.73%포인트 차이로 당선된 정치 초보 대통령으로선 주요 개혁 한두 개만 성공해도 다행이었다. 하지만 실행할 두뇌도, 정치력도 없으면서 과욕을 부려 경제·사회 전 분야로 개혁 범위를 키웠다. 부산 엑스포 유치전 참패, 합리적 근거를 못 대는 의사 정원 2000명 증원 등 수많은 ‘딜러 미스’를 지켜보며 합리적 보수층은 기대를 접었지만 그래도 마지막으로 바란 게 있었다. 상법, 양곡관리법 개정 등 시장경제 원칙과 개혁을 거스르는 입법을 차단하고, 이전 정부의 비현실적 탈원전 정책 등을 원상 복구하는 골키퍼 역할이라도 정상 임기 종료 때까지 다해 달라는 거였다. 그런데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제 혼자 힘으로 판을 뒤집겠다며 공을 몰고 나가더니 계엄을 선포해 게임 자체를 중단시켜 버렸다. 윤 대통령은 지지자들이 자신에게 부여한 미션을 철저히 오독했다. 젊은 날 그가 사법시험에 8번 낙방한 것도 이렇게 출제자 의도를 멋대로 해석하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오답을 무모하게 써냈기 때문이었을 거란 생각까지 든다. 이제 시대착오적 ‘반(反)영웅’이 돼버린 그는 포기해서도, 실패했어도 안 되는 중차대한 국가 개혁의 기회를 걷어찬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의 미래를 후퇴시킨 일, 그것이 윤 대통령이 저지른 최대 죄과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4-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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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박중현]노노 상속 급증… 부도 늙는다

    노인 연령을 ‘65세 이상’으로 규정한 노인복지법이 제정된 1981년 한국인의 평균 수명은 66.1세였다. 20대 초에 결혼했다 해도 그 시절 부모가 타계할 때 자녀들의 나이는 40대 중반을 넘지 않았다. 그해 한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1826달러. 대대로 재산을 물려받은 극소수 부유층을 제외하면 자녀에게 물려줄 만한 재산이 있는 집도 거의 없었다. ▷지난해 상속세가 부과된 피상속인(사망자) 중 80세 이상인 경우는 1만712건으로 전체 상속 건수의 53.7%였다. 이들이 물려준 재산은 20조3200억 원으로 사상 처음 20조 원이 넘었다. 사망자 연령을 고려할 때 재산을 물려받은 자녀들의 나이는 적어도 50대 중반이 넘을 것이다. 한국인 남성과 여성의 올해 평균 기대수명은 각각 86.3세와 90.7세. ‘노노(老老) 상속’은 이미 우리 사회의 보편적 현상이 됐다. ▷문제는 노인이 돼버린 자녀가 물려받은 재산은 좀처럼 소비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녀 양육 및 교육, 주택 구입 등 제일 돈이 많이 드는 시기가 지나 버렸기 때문이다. 한국보다 20년 앞서 같은 일을 겪은 일본이 2년 전부터 ‘부(富)의 회춘’ 정책을 추진하는 이유다. 일본은 피상속인 중 80세 이상 비중이 70%가 넘고, 상속인의 52%는 60세 이상이다. ▷생전에 일찌감치 재산을 물려주도록 유도하는 게 일본 정책의 핵심이다. 이를 위해 부모 사망일 7년 이전에 자녀에게 연간 110만 엔(약 985만 원)까지 물려준 재산에 대해서는 세금을 면제해 준다. 60세 이상 조부모가 18세 이상 손자녀에게 준 교육비는 1500만 엔까지, 결혼·육아비는 1000만 엔까지 세금 면제다. 한 세대를 건너뛰어 젊은이들에게 노인층의 돈이 신속히 전달되게 하겠다는 것이다. ▷높은 세율은 부의 이전을 어렵게 한다. 한국의 상속·증여세 최고세율 50%는 일본(55%)에 이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두 번째로 높다. 수입이 적은 청년층은 서울에서 집 한 채를 상속받을 경우 내야 할 수억 원의 세금을 감당하기 어렵다. 고령층이 남긴 재산 중 절반은 자신이 살던 아파트 등 건물이어서 상속 절차가 복잡해지는 문제도 생긴다. ▷조만간 65세 이상 인구 비중이 20%를 넘어 초고령사회에 진입하는 한국에선 소비 침체가 만성화하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 가구 순자산의 44%를 쥐고 있는 60세 이상 가구주의 지갑은 닫혀 있고, 소비 성향이 강한 청년과 돈 나갈 데 많은 30, 40대는 쓸 돈이 없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사회적 합의만 가능하다면 부의 세대 간 이전이 그 해법이 될 수 있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4-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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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중현 칼럼]‘덜 하기’에서 ‘더 하기’로… 풍향 바뀌는 ‘일자리’ 시대정신

    “사람 수 많아봐야 소용없어요. 기술 개발 마지막 단계에선 몇몇 핵심 인력이 얼마나 시간을 집중적으로 투입하느냐에 따라 성패가 갈립니다.” 20여 년 전 방문한 한 대기업 연구소의 소장이 들려준 얘기다. ‘시라소니’ 같은 싸움꾼들이 수십 명과의 난투에서 살아남는 비결로 ‘적이 많아도 상대는 결국 주변 4명뿐’이라고 했다던 ‘싸움의 법칙’을 연상시키는 말이어서 오래 기억에 남았다. 한국이 글로벌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는 메모리 반도체, 리튬이온 배터리, 유기발광다이오드 같은 기술이 모두 이런 식으로 개발됐다. 그 소장은 연구원들이 노닥거리는 시간이 아깝다며 커피 자판기 전원 줄을 가위로 자르고, 추석 연휴에 귀향 중인 연구원 차를 돌리게 해 일 시킨 일화로 ‘악명’ 높은 인물이었다. 지금이라면 ‘갑질 상사’로 낙인찍히고, 주 52시간제 위반으로 고발됐을 것이다. 최근 한국 반도체 산업이 글로벌 초격차 경쟁에서 뒤처지는 이유로 예전과 달리 핵심 인재들도 필요한 만큼 일할 수 없게 만드는 여건을 꼽는 이들이 적지 않다. 신제품 출시가 코앞이어도 주 52시간 규제에 맞춰 오후 6시면 연구실 불을 끄고 퇴근할 수밖에 없어서다. 여야가 입법을 추진 중인 ‘K칩스법’에 반도체 연구개발(R&D) 인력의 주 52시간제 예외 조항을 넣어 달라고 산업계가 요청하는 이유다. 제조업 강국 독일에선 요즘 근로자의 과도한 ‘병가(病暇)’가 논란거리다. 전기차 업체 테슬라가 독일 공장 직원들이 너무 자주, 그것도 금요일에 집중적으로 병가를 낸다는 이유로 직원 집을 불시에 찾아 꾀병 여부를 확인한 게 계기였다. “테슬라 공장은 인원이 부족하고, 작업량이 많아 병가가 많은 것”이라고 금속산업노조가 반발하자 메르세데스벤츠 최고경영자(CEO)가 “독일의 높은 병가율은 기업 입장에선 문제”라며 테슬라 역성을 들었다. 독일 근로자의 1인당 평균 연간 병가 일수는 19.4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고 수준이다. 과도한 병가가 없다면 마이너스 0.3%였던 작년 독일의 경제 성장률이 플러스 0.5%로 높아졌을 거란 분석도 있다. 두 달 전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 의뢰로 ‘EU 경쟁력의 미래’ 보고서를 낸 마리오 드라기 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미국과의 경쟁에서 유럽이 뒤처진 이유로 첨단 산업에 대한 투자 부족, 낮은 생산성과 함께 노동시간 감소를 꼽았다. 지난달 중의원 선거에서 과반 의석을 얻지 못해 야당과 연정을 통해 간신히 정권을 유지하게 된 일본 자민당의 이시바 시게루 총리는 요즘 청년, 주부의 알바 근로시간 연장을 가로막는 ‘103만 엔(약 930만 원)의 벽’과 씨름하고 있다. 자신을 다시 총리로 만들어준 연정 파트너 국민민주당의 총선 핵심 공약이 ‘103만 엔 벽 허물기’였기 때문이다. 103만 엔은 일본에서 23세 미만 대학생 자녀가 알바로 돈을 벌었을 때 부모가 부양 공제를 받을 수 있는 연소득의 상한이다. 그 이상 벌면 연말정산 때 공제를 못 받는다. 지금은 150만 엔으로 높아진 배우자 공제 기준도 예전에 103만 엔이었기 때문에 이 선을 직원들의 배우자 수당 지급 기준으로 삼는 기업이 많다. 통상 하루 4∼5시간, 주 3∼4일 일하는 주부, 청년 알바가 근로시간을 늘렸다가 소득이 이 선을 넘으면 가족 전체로 볼 때 경제적으로 손해여서 더 일할 의지를 꺾는 제약이 된다는 비판이 많다. 한국에선 주 5일, 15시간 이상 일하는 근로자에게 휴일 하루 치 일당을 더 주도록 하는 ‘주휴수당’이 일본의 103만 엔처럼 근로시간 연장 기회를 막는 벽이다. 주휴수당은 근로 여건이 열악하던 1953년 일본의 법을 베껴 만든 제도로 전 세계에 몇 안 되는 나라에만 남아 있다. 높은 최저임금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려는 자영업자가 많아 ‘15시간 미만 초단기 알바’는 한국 파트타임 일자리의 표준이 됐다. 수입이 더 필요한 근로자는 따로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 한국은 선진국 중 최장 근로시간의 오명을 벗기 위해 덜 일하고, 더 많은 여가를 제공하는 유럽식 근로 형태를 지향점으로 삼아 왔다. 지금도 야당과 노동계는 ‘주 5일제’로도 부족하다며 ‘주 4.5일제’를 요구한다. 하지만 선진 각국은 다른 나라보다 강한 산업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개인들은 더 많은 경제적 보상을 위해 근로시간을 늘리는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트럼프 정부의 ‘정부효율부’ 수장을 맡은 일론 머스크가 “주 80시간 일할 용의가 있는 초고지능(super high IQ) 혁명가를 모집한다”고 한 건 그런 의미에서 상징적이다. 일자리와 관련한 시대정신이 빠르게 바뀌는데 한국만 다른 길로 가선 곤란하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4-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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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중현 칼럼]이재명이 지나간 자리

    #. 결국 ‘희망 고문’으로 끝났다. 차가 다니는 28개 한강 다리 중 유일하게 통행료를 받는 일산대교 무료화와 관련해 대법원은 이달 10일 경기도에 최종 패소 판결을 내렸다.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대선에 출마하기 위해 지사 자리를 던진 2021년 9월 3일 마지막으로 결재한 사안이다. 다리를 자주 이용하는 김포, 고양시 주민들로선 화가 나겠지만 법원은 “통행료 부담 정도가 이용자들의 교통권을 제약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일산대교의 사업시행자 지정을 취소한 경기도의 공익처분, 통행료 징수금지 조치가 위법했다는 것이다. 민자 사업으로 건설된 일산대교의 운영권은 국민연금이 100% 갖고 있다. 당시 이 지사는 “보상금액은 2000억 원대”라며 자신의 결정에 따른 부담이 크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국민연금이 7000억 원의 기대수입을 포기해야 했고, 불이익은 국민연금 가입자 2200만 명에게 돌아갈 판이었다. 다리를 이용하지 않는 도민들이 낸 세금을 일부 지역민을 위해 쓰는 게 타당한지도 논란이었다. 문재인 정부 때였는데도 국민연금이 소송을 내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다. #. 지난달 말 대법원은 경기 성남시 백현동 ‘옹벽 아파트’ 커뮤니티센터의 사용승인 신청을 거부한 성남시의 처분이 적법하다며 아파트 시행사 측의 상고를 기각했다. 성남시는 2021년 6월 아파트 거주동 사용은 승인하면서도 최고 51m 높이 수직옹벽에 붙여 지은 커뮤니티센터 3∼5층에 대해선 안전성 보완 대책을 마련하라며 승인을 보류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성남시장이었을 때 그의 지인인 김인섭 전 한국하우징기술 대표가 인허가에 간여하고, 알선 대가로 70억 원 넘게 받은 혐의로 올해 8월 2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은 그 아파트다. 주민들은 3년 넘게 관련 시설을 이용하지 못할 뿐 아니라 아파트 전체 준공 승인이 떨어지지 않아 재산권 행사에 제약이 많다. 중세 성벽처럼 치솟은 옹벽의 안전성도 문제지만, 주민들은 아파트 가치가 떨어질까 봐 전전긍긍이다. 그렇다고 이 대표가 책임감을 느낄 이유는 없다. 최근 공직선거법 재판에서 과거 ‘협박’이라고 했던 표현을 ‘압박’으로 바꾸긴 했지만 박근혜 정부 국토교통부의 요구에 떠밀려 토지 용도를 4단계 높여줬을 뿐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 정부, 지방자치단체들이 세금이 안 걷혀 난리인 와중에 경기도는 다른 재정 문제까지 겹쳐 고민이 많다. 이재명 지사 시절인 2020∼2021년 ‘재난기본소득’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빌려 쓴 ‘지역개발기금’을 갚아야 할 시기가 닥친 것이다. 당시 경기도는 1차 재난기본소득으로 도민 1인당 10만 원씩 1조3400억 원, 외국인까지 추가한 2차 때 1조4000억 원, 중앙정부 지원금 대상에서 빠진 소득 상위 12%에게 25만 원씩 나눠준 3차에 6300억 원을 썼다. 부족한 재원은 공공투자, 도로 건설 등에 쓰도록 적립해둔 지역개발기금에서 1조5000억 원을 빌렸는데, 올해 1583억 원을 시작으로 계속 상환해야 한다. 당시 이 지사는 “초과세수가 충분하다” “걱정 붙들어 매셔도 된다”며 재원 문제에 관한 비판을 일축했다. 하지만 세수가 넘쳐나던 부동산 극성기에 문제없을 것 같던 부담이 부동산 경기가 꺼진 지금 경기도의 재정 사정을 압박하고 있다. #. 지난주 10·16 재·보궐선거를 치른 전남 영광군과 곡성군에선 이르면 내년부터 1인당 연 100만 원의 기본소득이 지급될 전망이다. 이 대표는 유세 때 “군민 1인당 예산이 연 1500만 원이 넘는데, 이런저런 예산을 아껴 100만 원씩 기본소득을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동네가 확 살 것”이라고 했다. 영광의 경우 인구 5만1430명에게 100만 원씩 지급하는 데 한 해 514억3000만 원이 든다. 영광과 곡성의 재정자립도는 경기도, 성남시는 물론이고 전국 평균보다 현저히 낮다. 어떻게 재원을 마련할지, 얼마나 오래 지급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 김민석 민주당 최고위원은 얼마 전 ‘국민 배심께 드리는 이재명 무죄 이유서’라는 제목의 글을 페이스북에 올려 11개 혐의로 4개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의 무죄를 주장했다. 그 이유로 ‘사악한 검찰의 잔인한 테러’ 등과 함께 이 대표가 “기록적 행정 성과를 낸 압도적 차기 후보”란 점을 들었다. 야당의 유력 대선 후보인 것이 유무죄를 가를 이유가 된다는 논리를 납득하기 힘들 뿐 아니라 ‘기록적 행정 성과’가 실제로 있긴 했는지 의문이다. 이 대표가 수장을 맡았던 성남시, 경기도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잘 살피면 답이 보일 것도 같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4-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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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박중현]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들이 말하는 ‘부자 나라 되는 비결’

    “남북한은 ‘제도(institution)’의 역할을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입니다. 분단 이전 남북한은 비슷한 수준이었지만, 다른 제도 속에서 시간이 흐르면서 경제 격차가 10배 이상으로 벌어졌습니다.” 대런 애스모글루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는 올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뒤 열린 공동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강연 때마다 남쪽은 온통 불야성이고, 북쪽은 암흑천지인 한반도 야경 위성사진을 소개하며 제도의 중요성을 역설해 왔다. ▷저서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그는 대중의 재산권을 보호하고, 공정한 경쟁이 이뤄지게 하는 ‘포용적 제도’가 소득·권력의 분배를 개선하고 혁신을 일으켜 부유한 나라를 만든다고 했다. 반면 권력자에게만 부가 돌아가는 ‘착취적 제도’는 기술, 산업의 혁신을 저해해 국가를 가난하게 한다. 특히 세계의 모든 나라가 부국, 빈국으로 나뉜 이유를 설명할 이론적 요소가 한반도의 남북 간 차이에 모두 포함돼 있다고 설명한다. ▷그렇다고 한국이 우쭐할 일만은 아니다. 애스모글루 교수는 올해 5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은 아직 군사독재 시절의 관치경제, 부정부패의 잔재가 남아 있어 완전한 포용적 경제 제도를 이루기에 갈 길이 멀다”고 꼬집었다. 노벨상 공동 수상자인 같은 대학 사이먼 존슨 교수는 포용적 제도를 구축한 대표적 국가로 한국을 꼽으면서도 “강력한 제도를 구축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무너지는 건 금방”이라고 경고했다. ▷애스모글루와 존슨 교수, 시카고대 제임스 로빈슨 교수 등 이번에 함께 상을 받은 제도경제학 분야의 석학 3명은 연구, 저술을 통해 공조해 왔다. 스웨덴 노벨위원회는 “이들이 국가의 번영과 제도 사이의 인과관계를 밝혀 냈다”고 평가했다.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가 1776년 펴낸 ‘국부론’의 원제가 ‘국부의 본질과 원인에 관한 연구’다. ‘어떻게 해야 나라가 부유해질까’라는 경제학의 근원적 질문에 답을 추구해온 이들에게 노벨상이 돌아간 셈이다. ▷저서 ‘좁은 회랑’에서 애스모글루 교수는 독재적 국가권력을 민주적 사회가 견제하는 것을 구약성서에 나오는 괴수 ‘리바이어던’에 족쇄를 채우는 일로 표현했다. 성공한 국가를 만드는 과정이 그만큼 어렵고 길도 좁다는 의미다. 수상 인터뷰에서 그는 “북한은 더 많은 어려움에 직면할 것이다. 희망컨대 언젠가 더 민주적인 시스템을 갖춘 한국과 통일되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문제는 북한 정권이란 리바이어던은 주민을 풍요롭게 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고, 외부의 도전을 차단하느라 콘크리트 담을 높게 쌓는 일에만 골몰하고 있다는 점이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4-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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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박중현]50년 시한에 쫓기는 제7광구 한일 공동자원 개발

    “해저 자원을 두 나라 이상이 공동 개발한다는 발상은 1969년 (유럽) 북해 대륙붕 분쟁 사건에 대한 국제사업재판소 판결에 의해 제기된 바 있으나, 실제 실천에 옮기게 되는 것은 한일 간 대륙붕 협정이 처음이다.” 1978년 1월 8일자 동아일보는 ‘세계 최초의 석유 공동개발’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그해 6월 한일공동개발구역(JDZ) 협정 발효로 개발이 시작되는 ‘제7광구’의 의미를 이렇게 소개했다. ▷어제 한일 정부가 JDZ 협정에 따른 6차 한일 공동위원회를 도쿄에서 개최했다. 1985년 5차 회의 때 만난 후 39년 만에 마주 앉은 것이다. 협정은 발효로부터 50년이 지난 2028년 6월에 종료된다. 자동 종료 시점으로부터 역산해서 3년 전인, 내년 6월부터는 양국 중 어느 쪽이라도 종료를 선언할 수 있다. 협력을 계속할 생각이 있다면 양국이 더는 협상을 미룰 수 없는 시점이다. ▷제주도 남쪽 200km 바닷속 7광구가 처음 주목받은 건 1969년 유엔 아시아극동경제개발위원회가 관련 보고서를 펴내면서였다. 이 보고서는 “한국 서해와 동중국해 대륙붕에 바다 기준 세계 최대 매장량의 석유가 있을 수 있다”고 했다. 이듬해 박정희 정부는 발 빠르게 7광구에 대한 영유권을 선포했다. 수심 200m 이내의 대륙 연장부인 대륙붕이 어느 나라 땅에 연결됐느냐에 따라 개발권을 부여하던 당시 국제법은 한국에 유리했다. ▷1973년 아랍석유수출국기구(OAPEC) 회원국들은 ‘욤키푸르 전쟁’에서 이스라엘을 지원한 서방을 상대로 석유 금수조치를 개시했다. ‘1차 오일쇼크’다. 배럴당 3달러였던 국제유가가 12달러로 뛰었다. 거리만 보면 한국보다 7광구에 가까운 일본은 마음이 급해져 강하게 권리를 주장했다. 자원을 개발할 기술, 재원이 부족한 한국은 1974년 공동 개발을 결정했다. ▷한국석유공사와 일본석유산업단이 1978∼1987년, 2002년 두 차례 7개 시추공을 뚫는 등 공동 탐사를 벌였지만 경제성 있는 유정을 찾지 못했고, 일본은 소극적 태도로 돌아섰다. 탐사·시추를 공동으로 해야 하는 조항 때문에 한국도 발이 묶였다. 1982년 바뀐 국제해양법이 200해리 배타적경제수역(EEZ)을 인정하는 등 거리 중심으로 바뀌면서 7광구 상당 부분이 일본에 귀속될 가능성이 커지자 고의로 개발을 미룬다는 분석까지 나왔다. ▷하지만 협정이 종료되더라도 7광구는 한일 대륙붕이 중첩되는 곳이어서 상대국 동의 없는 일방적 개발은 어렵다. 게다가 중국은 한일 협정 초기부터 7광구가 중국에서 뻗은 대륙붕이라는 주장을 펴며 인접 지역에 시추공을 뚫고 있다. 한국과 일본이 마음을 열고 7광구를 협력의 장으로 키워 내지 못하면 괜히 주변국 좋은 일만 시킬 수 있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4-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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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중현 칼럼]‘커트라인’ 선상의 정치인들, 과거로 회귀하는 정책 시계

    “어르신들 모두에게 지급하지 못하는 결과에 죄송한 마음입니다.” 2013년 9월 말. 박근혜 대통령은 기초연금 대선 공약을 축소하기로 한 데 대해 청와대 국무회의를 통해 공식 사과했다. “모든 어르신들께 20만 원을 지급할 경우 2040년에 157조 원의 재정 소요가 발생해 미래 세대에 과도한 부담을 넘기는 문제가 지적됐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18대 대선 승리에 결정적 기여를 한 박 대통령의 ‘경제민주화’ 핵심 공약이 기초연금이었다. 하지만 집권 후 재정 부족 문제가 심각해지자 박근혜 정부는 소득 하위 70% 노인에게 월 10만∼20만 원씩 차등 지급하겠다고 말을 바꿨다. 야권의 비판이 쏟아졌고, 대국민 약속 위반에 반발해 진영 보건복지부 장관이 사퇴하는 ‘항명 파동’까지 벌어졌다. 이달 초 윤석열 정부가 첫 연금개혁안을 공개하면서 현재 최대 월 33만5000원 수준인 기초연금을 단계적으로 40만 원으로 올리겠다고 밝혔다. 소득 하위 50% 이하 노인은 2026년에 월 40만 원까지 인상하고, 2027년에는 하위 50∼70% 노인으로 범위를 넓히겠다는 계획이다. 현 정부 임기 마지막 해에 ‘기초연금 40만 원’ 대선 공약을 달성하겠다는 것이다. 올해 5월 21대 국회 막바지에 여야의 국민연금 모수개혁안이 바짝 접근했을 때 정부가 이를 걷어찬 이유는 ‘국민연금만이 아닌 연금체계 전반의 구조개혁 필요성’이었다. 지금 가장 시급한 구조개혁 대상은 고령화 진전에 따라 재정 투입이 천문학적으로 늘어날 기초연금이다. 건전 재정, 약자에 대한 선별 지원을 강조하는 보수 정부라면 대상을 하위 50% 이하로 줄여 두텁게 지원하거나, 하위 50∼70%의 지급액을 동결하려는 시늉이라도 했어야 한다. 기초연금 사안에 대한 박 정부와 윤 정부의 결정적 차이는 대통령 지지율이다. 최근 윤 대통령 지지율은 ‘레임덕 커트라인’으로 불리는 20%까지 떨어졌다. 11년 전 60%가 넘던 박 대통령 지지율의 3분의 1 수준이다. 김건희 여사와 관련된 각종 의혹, 끝이 안 보이는 의정 갈등으로 악재가 산적한 현 정부에 지지율을 더 깎아내릴 수 있는 개혁을 기대하는 건 난망한 일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윤 대통령과는 종류가 다른 ‘사법 커트라인’에 쫓기고 있다. 공직선거법 위반, 위증교사 혐의에 대한 1심 판결이 한두 달 안에 나올 것으로 전망된다. 그가 최종심이 나올 때까지 국회의원직, 당 대표직을 내려놓을 리 없겠지만, 둘 중 하나라도 유죄 판결이 나오면 야권과 지지층의 동요는 불가피하다. 사법 리스크 대응에 온통 정신이 팔려서일까. 이 대표의 ‘민생개혁’ 시계는 3년 전에 멈춰 선 느낌이다. 19일 민주당은 이 대표의 대표 정책인 ‘지역화폐법’을 본회의에서 단독으로 처리했다. 앞서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전 국민 25만 원 민생회복 지원금법’을 뒷받침하는 법안이다. 이 대표가 아무리 지역화폐의 장점을 주장하더라도 지역화폐 할인액을 정부 재정으로 보조해주는 효과는 국가 경제 전체로 볼 때 미미하다는 게 대다수 경제학자의 의견이다. 25만 원법, 지역화폐법은 대선 후보 시절 ‘기본소득 공약’의 변주란 점에서 시간이 지나도 전혀 발전이 없는 재탕, 삼탕 정책이란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금주 초 취임 두 달을 맞은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는 ‘심리적 커트라인’에 몰리고 있다. 김 여사 문제, 의정 갈등 해법을 놓고 용산 대통령실과의 신경전에 시간을 허비하다 보니 ‘중수청’(중도·수도권·청년층) 공략에 뭐든 가시적 성과를 내야 한다는 초조감을 피할 수 없다. 그런 그가 요즘 간절히 매달리고 있는 사안이 내년 1월 시행 예정인 금융투자소득세의 폐지다. 각자 나름의 리스크에 쫓기고 있는 윤 대통령, 이 대표, 한 대표의 이해가 한 점에서 모인 것이 금투세 문제다. 윤 대통령과 한 대표는 청년층이 다수 포함된 1400만 주식 투자자를 의식해 금투세 폐지를 강하게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금투세 도입을 전제로 깎아준 증권거래세를 원상 복구하는 데 대해선 입도 뻥끗 않는다. 물론 지지율에 득이 될 게 없어서다. 이 대표는 ‘부자 과세’ 강행을 주장하는 당내 세력 및 ‘개딸’을 의식하면서도 한편으론 주식 투자자들의 눈치를 보고 있다. 자신에게 몰아칠 사법 리스크 방어를 위해 어느 쪽 하나 포기하기 싫어서다. 민주당이 어제 금투세 문제를 놓고 정책토론까지 벌였지만 이 대표 의중이 ‘유예’ 쪽이어서 결국 시행이 미뤄질 공산이 크다. 2023년 2년 유예에 이은 두 번째다. 금투세 논의는 사실상 2020년 말 법 도입 이전 상태로 돌아간다. 단 1%의 지지율 하락도 버텨낼 능력이 없는 커트라인 선상의 정치인들 때문에 한국의 정책 시계가 과거를 향해 표류하고 있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4-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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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중현 칼럼]한국 좌파, ‘부자와의 공생’ 배울 수 있을까

    1983년 10월 4일 세계적으로 선례를 찾기 힘든 대규모 기업인 시위가 스웨덴에서 발생했다. 10만 명 가까운 스웨덴 기업인들이 열차, 버스, 승용차를 타고 수도에 집결했다. 전국에서 모인 기업인들이 ‘세금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피켓을 들고 거리를 행진하면서 스톡홀름 도심이 마비됐다. 성정이 차분하기로 유명한 스웨덴인, 그중에서도 돈 많은 기업인들이 이런 대규모 집회를 연 건 노조와 집권 사회민주당이 도입을 추진하는 ‘노동자 기금’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노동자 기금 법안은 매년 모든 기업의 순이익 20%를 기금에 적립하도록 의무화하고, 이 돈으로 노조가 기업 지분을 사들여 경영에 참여하도록 하는 내용이었다. 기업인만 배불리는 부(富)를 노동자가 공유하도록 하자는 취지였는데, 20∼30년 뒤면 모든 기업의 최대 주주가 노조가 될 판이었다. 힘들게 번 돈을 뺏어 가는 것도 모자라 이걸 지렛대로 노조와 정부에 기업을 헌납하게 된 기업인들이 들고일어난 것이다. 경제계의 반대에도 사민당은 다른 좌파 정당과 손잡고 그해 12월 노동자 기금 법안을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3년 뒤 스웨덴의 세계적 가구업체 이케아(IKEA)는 네덜란드로 본사를 옮겼다. 60%의 법인세 최고세율, 70%의 상속세 최고세율과 함께 노동자 기금이 주요 원인으로 꼽혔다. 테트라팩 등 다른 간판 대기업의 해외 이전도 줄을 이었다. 당연히 일자리가 감소하고 경제는 침체됐다. 금융위기까지 이어지면서 스웨덴의 경제성장률은 1990년대 초 마이너스로 떨어졌다. 1991년 집권한 우파 정부가 노동자 기금을 폐지했을 때 사민당, 노조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최근 한국 국회에서 상속세 개편을 둘러싼 여야의 신경전이 한창이다. 수십 년째 바뀌지 않은 상속세 체계를 고쳐 수도권에 집 한 채 정도 가진 이들의 배우자, 자녀 상속 부담을 줄여주겠다며 여야가 경쟁적으로 감세안을 내놓고 있다. ‘부자 감세’ 비판을 입에 달고 살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당내의 일부 반발에도 상속세 감면 의지를 굳힌 것으로 보인다. 지난 대선 때 0.73%포인트 차로 정권을 잡지 못한 이유가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중산층에서 표가 덜 나왔기 때문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민주당은 윤석열 정부가 제안한 상속세 최고세율 인하, 최대주주 할증 폐지엔 여전히 부정적이다. 50%인 상속세 최고세율을 40%로 낮추고, 실질 상속세 부담을 60%로 늘리는 최대주주 할증을 없애는 건 극소수 부유층에 혜택이 가는 일이라 득표에 도움이 안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조국혁신당에선 실질 상속세 부담을 70%로 높이는 법안까지 나왔다. 여당 역시 표와 직결되는 중산층 세 부담 완화에만 화력을 집중하고 있다. 이대로라면 최고세율 인하, 할증과세 폐지는 여야의 상속세제 최종 합의안에서 빠질 가능성이 커 보인다. 널리 알려진 대로 한국의 상속세 최고세율은 55%인 일본과 함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고 수준이다. 상속세 할증은 대기업 최대주주가 주식을 물려줄 때 ‘경영권 프리미엄’을 고려해 과세표준 금액을 20% 늘려 잡는 것이다. 획일적 할증 기준을 적용해 경영권 가치에 세금을 더 물리는 나라는 선진국 중 한국뿐이다. 1980년대 기업 유출 사태를 겪은 후 스웨덴 사민당의 기업 정책 방향은 180도 달라졌다. 1990년대 중반 재집권한 사민당 정부는 대기업 해외 이전에 대해 사과하고, 국민과 기업을 대상으로 ‘기업 환경을 악화시킬 정책을 다시는 펴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장기 집권을 하면서도 약속을 잊지 않았다. 2005년 스웨덴에서 상속세가 폐지된 이유다. 상속세 대신 도입된 자본이득세는 물려받은 주식 등을 처분하는 시점에 내기 때문에 기업 활동을 중단하거나, 지분을 팔기 전에는 피상속인이 세금을 내지 않는다. 스웨덴 좌파는 노동자 기금 사태와 ‘세금 망명’을 겪으면서 기업의 지분과 오너십을 노동자가 뺏어서 나눠 가져야 할 대상이 아니라 공장, 생산설비처럼 사업을 영위하고,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한 수단으로 받아들였다. 스웨덴을 최고의 복지국가로 이끈 사민당은 지금까지도 ‘기업의 일자리가 최고의 복지’란 강령을 유지하고 있다. 실패에서 배운 교훈을 기억하는 ‘친기업 좌파’ 덕에 스웨덴의 선진국 위상은 굳건하다. 스웨덴 인구 중 억만장자 비중은 미국보다도 훨씬 높다. 스웨덴 좌파가 수십 년 전 깨달은 ‘부자와의 공존 방법’을 한국의 좌파가 배우려면 기업인들의 집단시위, 기업들의 세금 망명이라도 겪어봐야 하는 걸까.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4-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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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박중현]프랑스에서 체포된 ‘어둠의 메신저’ 텔레그램 창업자

    텔레그램의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 파벨 두로프(40)의 별명은 ‘러시아의 마크 저커버그’다. 저커버그가 운영하는 세계 최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페이스북 이용자가 30억 명인데 텔레그램은 9억5000만 명으로 3분의 1 수준이다. 하지만 자기 메시지가 노출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텔레그램의 인기는 양지의 모든 SNS를 압도한다. ▷‘어둠의 메신저’ 텔레그램의 지분 100%를 갖고 있는 두로프가 지난 주말 파리 외곽 부르제 공항에 자신의 전용기를 착륙시켰다가 프랑스 사법당국에 체포됐다. 프랑스 당국은 각국 정부의 범죄 수사 협조 요청을 거부해온 두로프가 텔레그램을 통해 이뤄지는 마약 밀매, 아동 착취, 테러 등의 범죄를 방조한 것으로 본다. 수배 중인 줄 알면서 입국한 이유가 불분명하지만 장기 징역형이 불가피할 거란 전망이 나온다. ▷메시지 암호화, 대화방 폭파 기능 등을 갖춘 텔레그램은 보안성이 높은 것으로 유명하다. 게다가 두로프가 사업 초기부터 ‘정치적 중립성’을 강조하고, 각국 정부의 범죄자료 제공 요청을 완강히 거부한 덕에 구린 게 많은 글로벌 범죄자들이 안심하고 머무는 놀이터가 됐다. 러시아에서 메신저 회사를 운영하던 두로프가 10년 전 독일로 망명한 것이나 텔레그램 본사를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에 둔 명분도 개인정보 보호다. ▷한국에선 마약 유통·판매의 70% 이상이 텔레그램을 통해 이뤄진다는 분석이 나온다. 주식 사기범들도 텔레그램에 리딩방을 개설해 투자자를 유혹한다. 42년 형을 받은 ‘N번방 사건’ 주범 조주빈의 활동 무대도 텔레그램이었다. 각국 사법당국은 텔레그램의 막대한 운영자금이 어떤 식으로든 범죄 수익과 연관됐을 것으로 의심한다. ▷텔레그램은 정치인들에게도 ‘필수 애플리케이션’이 됐다. 재작년 7월 권성동 국민의힘 대표 직무대행이 “내부 총질이나 하던 당 대표가 바뀌니 달라졌습니다”라는 윤석열 대통령의 메시지를 받은 앱도 텔레그램이다. 지난달엔 한동훈 대표 후보자의 김건희 여사 텔레그램 메시지 ‘읽씹’ 논란이 국민의힘 전당대회를 뒤흔들었다. 더불어민주당 정성호 의원은 올해 1월 성희롱 논란이 있는 총선 후보의 징계 수위를 테러로 입원 중이던 이재명 대표와 텔레그램으로 상의하는 모습이 포착됐다. ▷텔레그램 측은 이용자 간 대화가 끝난 뒤엔 자사 서버에 메시지가 전혀 남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물론 엄밀하게 검증된 적은 없다. 텔레그램 이용이 많은 만큼 어떤 계기로 메시지의 일부가 공개되기라도 한다면 2010년 미국의 기밀자료가 대거 폭로된 ‘위키리크스 사건’급 충격이 올 수도 있다. 국내에서도 두로프 체포로 잠 못 이루는 텔레그램 이용자들이 적지 않을 것 같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4-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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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중현 칼럼]‘트럼프 집권 2기’를 보는 한국인의 독특한 시각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에서 지난주 사퇴했지만 조 바이든 대통령에 대한 한국인의 호감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 비해 높았다. 작년 9월 한국갤럽의 조사에서 한국인의 바이든 선호도는 52%, 트럼프는 24%였다. 총알이 귀를 스친 뒤 주먹을 흔들며 “파이트”를 외치는 트럼프에게 환호한 한국인이, 트럼프와의 TV토론에서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 후 25일 만에 사퇴한 바이든을 안타깝게 지켜본 이들의 절반에 채 못 미쳤다는 의미다. 미국 대통령으로 바이든을 신뢰한다는 한국인 비율은 미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센터의 재작년 8월 조사 때 70%까지 높아지기도 했다. 취임 첫해인 전년도보다 3% 오른 것이었다. 문재인 정부 때 무너졌던 한미동맹 복원의 안도감이 우리 대기업들의 투자를 미국으로 빨아들이는 바이든 정부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넘어선 셈이다. 이에 비해 취임 첫해인 2017년 17%였던 트럼프 당시 대통령에 대한 한국인의 호감도는 2018, 2019년에 각각 44%, 46%까지 치솟았다가 2020년에는 17%로 낮아졌다. 그가 싱가포르, 판문점에서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만나면서 한반도 화해 무드가 고조됐을 때 정점을 찍었다가 하노이의 회담이 파국으로 끝난 후 대북 관계가 꼬이면서 원상 복귀했다. 특이한 건 현시점에서 차기 미 대통령으로 가장 유력한 트럼프를 우리 사회의 좌우 양극단이 동시에 지지했다는 점이다. 지난 정부 말 광화문 우파 집회에선 김정은의 뒤통수를 친 트럼프를 칭송하는 구호가 자주 들렸다. 다만 작년 6월 윤석열 대통령이 바이든이 개최한 백악관 국빈 만찬에서 ‘아메리칸 파이’를 부른 뒤 그런 구호는 감소했다. 남북 관계 개선을 최우선 가치로 보는 좌파 지지층에서는 여전히 트럼프에 대한 선호가 적지 않다. “김정은이 나를 그리워할 것”이란 트럼프의 최근 발언에 이들 중 상당수는 마음이 움직였을 것 같다.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를 최고 가치로 내세우고, 동맹국을 이익을 챙길 비즈니스 상대로 보는 트럼프를 좌파 세력이 지지하는 나라는 세계적으로 찾아보기 어렵다. ‘아르헨티나의 트럼프’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 헝가리의 오르반 빅토르 총리처럼 우파 포퓰리스트나 권위주의 정권의 지도자가 그와 궁합이 맞는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겠다는 트럼프의 집권에 기대가 클 것이다. 한때 ‘장사꾼’ 트럼프가 낫다고 봤던 중국은 “중국 제품에 60∼100% 관세를 물리겠다”는 그를 환영하기 어렵다. 남북 관계를 제외하고 트럼프의 공약, 발언이 한국의 ‘먹고사는 문제’에 미칠 영향은 대부분 부정적이다. 수입품에 ‘10% 보편관세’를 물리겠다는 공약이 실현되면 미중 갈등 속에서 중국 대신 미국 시장을 공략하고 있는 한국의 수출은 타격을 피하기 어렵다. 한국 수출이 올해 일본을 제치고 세계 5위에 오르는 것조차 부담스러운 일이 될 수 있다. 역대 최대로 커진 한국의 대미 무역수지 흑자를 트럼프가 대놓고 문제 삼을 가능성이 커서다. 바이든 정부의 반도체법,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맞춰 미국에 수십조 원을 투자 중인 우리 반도체·배터리·전기차·태양광 기업에 트럼프 재집권은 재앙이 될 수 있다. “취임 첫날 IRA를 폐기할 것”이란 약속이 실현될 경우 미 정부가 약속했던 보조금, 세제 혜택은 공수표가 된다. 빚에 짓눌려 사는 한국의 중산층, 자영업자, 중소기업에도 악영향이 올 수 있다. 트럼프는 “취임하면 기준금리를 낮출 것”이라고 호언장담한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시장은 그가 집권할 경우 고금리가 더 장기화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법인세, 소득세를 낮추겠다는 그의 감세정책이 이미 경고음이 켜진 미국의 재정 사정을 악화시켜 미 국채 발행을 늘리고, 이로 인해 미국 국채 값이 하락(국채 금리는 상승)할 것이란 우려다. 보편관세로 발생할 인플레이션까지 고려하면 고물가, 고금리는 트럼프 2.0시대의 ‘노멀’이 될 가능성이 크다. 본질적으로 트럼프는 포퓰리스트다. 그의 공약, 발언에는 자신의 결정으로 인해 미래에 벌어질 문제들에 대한 책임감이 결여돼 있다. 미국 정치 전문가들이 ‘푸틴보다 트럼프가 예측하기 어렵다’고 할 정도로 변덕도 심하다. 최근 “대만은 미국 반도체 사업의 100%를 가져갔다. 미국에 방위비를 지급해야 한다”는 돌발 발언으로 세계 반도체 주가를 흔들어놓은 것 같은 일이 언제든 벌어질 수 있다. 이런 트럼프의 2기 집권 가능성이 높다. 이런 때 한국의 리더들이 이념 편향에 사로잡혀 냉정한 계산 없이 멋대로 상황을 판단한다면 나라 전체가 낭패를 보게 된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4-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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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중현 칼럼]‘대왕고래’를 보는 두 남자의 다른 시선

    윤석열 대통령이 ‘동해 심해 석유가스전’의 탐사시추 계획을 승인했다고 처음 알린 게 지난달 3일이다. 탐사 자원량이 최대 140억 배럴로 21세기 최대의 석유개발 사업인 남미 가이아나 광구보다 크다는 해설도 덧붙였다. 이렇게 ‘산유국의 꿈’이 현실이 될 수 있다는 놀라운 뉴스가 한 달도 안 된 지금 국민의 관심권에서 까마득히 멀어졌다. ‘불확실성이 큰 사안인 만큼 냉정해지자’는 신중론이 한국 사회에서 이렇게 제대로 먹힌 적이 있었나 싶다. 메신저의 문제가 결정적이었다. 산업통상자원부 자원개발 담당 국·실장이나, 한국석유공사 사장같은 실무자나 전문가가 발표하는 게 제격이었다. 그랬다면 자연스럽게 후속 뉴스가 이어지면서 국민의 기대감은 더 커졌을 것이다. 대통령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지지율 20%대의 대통령이 마이크를 직접 잡고 이 소식을 전하는 바람에 이 사안은 정치이슈로 변질됐고 메시지는 훼손됐다. 대통령 입을 통해 대왕고래 석유가스전을 발표하는 결정은 대통령 스스로 내렸을 가능성이 크다. 광구 분석을 맡은 액트지오사에 대한 잇따른 의혹 제기, 대통령이 발표자로 적절한지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는데도 용산 대통령실, 정부 안에서 누구도 판단 미스로 질책 받지 않았고, 대통령이 ‘격노’했다는 말도 안 나오는 데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the Buck Stops Here’(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는 윤 대통령이 거듭 강조한 모토 아닌가. 포항 영일만 앞바다에서 천연가스·석유가 나올 가능성이 있다는 굿 뉴스마저 정치 논쟁으로 폄하되는 현실이 대통령으로선 답답할 수 있다. 정부가 밝힌 최대 추정 매장량을 현재 가치로 따지면 자그마치 1조4000억 달러, 한화 약 1900조 원이다. 부화하지도 않은 달걀을 놓고 병아리 수를 세는 식의 셈법이긴 해도 한국사회의 난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금액이다. 절반 정도인 1000조 원만 돼도 당장 1100조 원을 넘긴 국가채무 대부분을 갚을 수 있다. 1000조 원은 현재 국민연금 기금 총액과도 맞먹는 금액이다. 연금 지속성을 확보하기 위해 기성세대를 위한 구연금, 미래세대를 위한 신연금으로 계정을 나누자는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제안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예산이 600조 원이다. 말로만 연금개혁을 추진한다고 비판 받는 대통령에게 대왕고래는 개혁을 미뤄온 좋은 변명거리가 될 수 있다. ‘중산층 세금’이 돼버렸다는 지적이 제기되는 상속세, 종합부동산세를 과감히 깎아주거나, ‘자녀 출생 1인당 1억 원’ 같이 파격적인 저출생 해법을 추진하는 용도로도 쓸 수 있다. 전혀 다른 의미에서 대왕고래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에게 날개를 달아줄 수 있다. 그의 고정 레퍼토리인 ‘기본소득’의 최대 약점인 재원조달 문제를 단박에 해결해 줄 수 있어서다. 지난 대선 때 이 전 대표가 내놨던 기본소득 공약대로 국민 1인당 연간 100만 원, 청년에겐 200만 원씩 나눠주는 데 필요한 금액은 한 해 60조 원이다. 1000조 원이면 이런 기본소득을 17년 동안 나눠줄 수 있다. 선례도 있다. 미국 알래스카주는 석유 등 천연자원 수입 일부를 활용한 영구기금을 만들어 1년 이상 거주 주민에게 많게는 한 해 200만 원 넘는 돈을 나눠준다. 이 전 대표식 기본소득에 가까운 모델이다. 게다가 이 전 대표는 고유가 때문에 일시적으로 이익이 늘었던 정유회사, 기준금리 상승으로 돈을 번 은행에 횡재세를 물려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대왕고래에서 가스, 석유가 쏟아진다면 그야말로 ‘국가적 횡재’다. 문제는 대왕고래 심해유전의 성공 가능성이 긁지 않은 복권과 같다는 점이다. 높다면 높고, 낮다면 낮은 20% 확률을 뛰어넘어 가스·석유가 대량으로 발견된다 해도 실제 상업 생산이 이뤄지는 건 10여 년 뒤인 2035년 이후다. 윤 대통령은 물론이고, 이 전 대표도 정치권에서 은퇴했을 시점이다. 나랏빚을 늘려서라도 국민 손에 돈을 쥐여주자고 주장해 온 이 전 대표가 “십중팔구 실패할 사안”이라며 부정적 반응을 보인 데에는 이런 이유도 있을 것이다. 1969년 노르웨이 앞바다에서 북해 유전이 발견됐을 때 그 나라 정당들은 머리를 맞대고 토론을 벌였다. 결론은 원유, 가스 판매에서 나오는 이익 대부분을 펀드에 넣어 재투자하자는 것이었다. 그때 세운 펀드 운용의 원칙은 ‘현 세대의 필요를 충족하되, 미래 세대의 가능성을 침해하지 않는다’였다. 그렇게 노르웨이는 ‘자원의 저주’를 현명하게 피한 나라가 됐다. 자녀·손주 세대를 위한 연금보험률 인상 같이 지극히 당연한 사안도 합의가 안 되는 한국에선 기대할 수 없는 모습이다. 눈앞의 표만 좇는 포퓰리즘, 진영이익 챙기기에 푹 빠진 지금 한국 정치판을 본다면 고개를 내밀려고 하던 대왕고래가 바닷속으로 다시 숨어버릴 것 같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4-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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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중현 칼럼]타협 없는 정책 몰아치기, ‘무기력 공무원’만 늘린다

    한국에서 ‘5년 단임 대통령제’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가장 높은 직업군을 꼽는다면 단연 정부 중앙부처 공무원들일 것이다. 미국식 4년 중임 대통령제든, 영국식 내각책임제든 현재의 단임 대통령제에서 탈피해 대통령과 국회의 임기를 맞추지 않으면 나라의 미래가 어둡다고 생각하는 공무원들이 많다. 행정 권력과 입법 권력이 따로 노는 여소야대 정국이 만들어질 때마다 시급한 국가 현안이 정쟁에 휩쓸려 산으로 가는 걸 수없이 경험했기 때문이다. 지난달 말 21대 국회가 문 닫기 직전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여당이 주장한) 소득대체율 44%를 받겠다. 이번 국회에서 합의 처리하자”고 했다. 여야 국민연금 개혁안의 소득대체율 차이가 1%포인트로 좁혀지자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이 예상 못 한 파격 카드를 던졌다. 당시 김진표 국회의장도 “원 포인트 본회의라도 열어 처리하자”고 거들었다. 여당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채 상병 특검법’ 등과 연금개혁을 뒤섞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기 어렵게 만드는 ‘정략적 꼼수’라며 반발했다. 대통령실 역시 “22대 국회로 넘겨 논의하자”며 발을 뺐다. 이 대표도 예상했을 반응이다. 합의되지 않아도 대결 대신 양보, 타협을 선택하는 지도자 이미지 강화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다른 가능성도 있다. 차기 대통령 자리가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진 상황에서 다음 정부의 숙제로 넘어갈 경우 지지층의 반발까지 부를 수 있는 연금개혁을 선심 써가며 부담 없이 털어낼 좋은 기회라는 판단이다. 이 상황을 지켜보면서 “대통령이 이 대표 제안을 과감히 받았으면…” 하고 기대한 공무원들이 적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26년째 9%로 묶인 보험료율을 13%로 높이는 것에 대한 여야 합의는 의미가 작지 않다. 60%였던 소득대체율을 2028년까지 40%로 낮추기로 한 노무현 정부의 연금개혁에 비해 44%가 퇴보라는 걸 공무원들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당초 50%를 주장한 민주당, 같은 진영의 학자들 주장보다는 많이 물러난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한 공무원들이 보험료율, 소득대체율 등 모수(母數)개혁과 구조개혁의 병행을 주장하며 반대한 여당이나 대통령실보다 덜 개혁적이라고 할 수 없다. 108석으로 쪼그라든 여당을 배경으로 거대 야당과 협상해야 하는 윤 대통령이 임기 내에 더 나은 개혁을 추진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은 현실적이고 합리적이다. 게다가 대통령은 연금개혁에 대한 구체적 가이드라인을 입 밖에 내놓은 적조차 없다. 이달 들어 윤 대통령은 정책에 대한 열의가 더 강해진 모습이다. 머뭇거리다간 정책 주도권을 야당에 완전히 뺏길 수 있다는 초조함이 묻어난다. 총선 직전 다급하게 진행한 24차례 민생토론회를 고려할 때 지지율 21%, 부정 평가 70%란 성적표를 받아든 지금은 정책 몰아치기가 더 가속화할 공산이 크다. 하지만 국내외 선례를 봐도 국가수장 개인이나 가족 문제로 지지율이 폭락한 정부가 정책으로 점수를 만회하는 데 성공한 경우는 대단히 드물다. 개헌, 탄핵만 빼고 뭐든 원하는 건 밀어붙일 수 있는 거대 야당을 상대하면서는 더 어렵다. 아무리 대통령이 기강을 강조한다 해도 국회만 가면 판판이 정책이 무산되는 과정에서 공무원들의 무기력증, 복지부동은 더 심해질 것이다. 대통령이 걷어찬 ‘연금개혁 합의 제안’에 탈출의 실마리가 있다. 차기 정권을 노리는 이 대표, 민주당이 이득이 된다고 생각할 제안을 내놓을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부동산 정책에 관한 한 민주당은 트라우마가 있다. 1기 신도시 재건축을 비롯한 현 정부의 주택 공급 확대 정책에 무작정 반대하다가, 혹시 차기에 권력을 잡았을 때 ‘부동산 악몽’을 다시 겪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실거주 1주택자’에 대한 종합부동산세 완화 주장이 민주당에서 먼저 제기된 건 수도권 중산층 공략에 꼭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고준위 방폐장 특별법 처리 등 장기 과제는 현 정부 내에 풀지 못하면 차기 정부가 독박을 써야 할 난제다. 이 대표를 윤 대통령보다 더 ‘대통령스럽게’ 보이도록 만든 연금개혁 합의 거절은 실수였다. 거부권을 행사할 법안과 따로 떼어 대응했어야 했다. 불리한 정치구도 속에서 정부가 정책 주도권을 놓치지 않으려면 야권이 거부할 수 없는 명분을 세우고, 면밀한 실행 전략을 통해 성공 사례를 쌓는 게 중요하다. 이런 때 일방적 정책 홍보에 치중한 민생토론회를 계속 열자고 주장하는 공무원은 대통령의 ‘격노’에 민감한 아첨꾼일 가능성이 있다. ‘열심히 하다 보면 언젠가 성과가 나는 것’이란 정책에 대한 인식을 대통령부터 바꾸지 못하면 5년 단임 대통령, 여소야대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은 공무원만 더 늘어나게 된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4-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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