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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박중현 논설위원입니다.

sanjuck@donga.com

취재분야

2024-03-26~2024-04-25
칼럼100%
  • [횡설수설/박중현]중국 대체할 亞 14개국, 알타시아의 시대

    1위 중국 1798개, 2위 독일 668개, 3위 미국 479개. 한국무역협회가 국가별로 세계 수출시장 1위에 올라있는 품목들을 분석해 지난해 발표한 결과다. 5204개 품목 중 35%를 차지한 중국이 1등이었다. 한국은 77개로 10위다. 개혁개방 후 수십 년간 명실상부 ‘세계의 공장’ 역할을 하던 중국이 미중 경제패권 전쟁, 내부의 부동산시장 문제 등으로 성장의 벽에 부딪혔다. 주요 2개국(G2)의 고래 싸움에 끼인 글로벌 기업들은 ‘중국을 대신할 아시아’를 찾고 있다. ▷알타시아(Altasia)는 ‘대안’ ‘대체’란 뜻의 얼터너티브(alternative)와 아시아를 합성한 조어다. 올해 3월 영국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가 미중의 지정학적 균열 후 글로벌 제조업체들이 중국을 대신해 생산기지로 삼을 만한 아시아 14개국을 선정해 이렇게 이름 붙였다. 경제 수준이 높은 한국 일본 대만 싱가포르, 인구 대국인 인도 인도네시아 방글라데시, 아세안(ASEAN) 회원국인 베트남 말레이시아 태국 필리핀 캄보디아 라오스 브루나이가 포함됐다. ▷14개국에 흩어져 있는 기술 및 자본력, 값싼 노동력, 풍부한 자원이 합종연횡으로 시너지를 내면 중국을 대신할 생산기지로 잠재력이 충분하다는 분석이다. 재작년 10월부터 작년 9월까지 알타시아 14개국의 대미 수출 규모는 6340억 달러(약 847조 원)다. 같은 기간 중국의 대미 수출 6140억 달러를 웃돈다. 이 중 다수는 아세안,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에 참여하고 있어 역내 무역질서도 잡혀 있다. 미국의 애플 등은 이미 중국에 몰렸던 생산기지를 알타시아 국가로 나누는 ‘차이나 플러스 원’ 전략을 빠르게 추진 중이다. ▷중국을 제치고 올해 인구수 세계 1위에 오른 인도, 4위 인도네시아를 포함한 알타시아의 15∼64세 생산가능인구는 14억 명. 9억5000만 명인 중국을 뛰어넘는다. 인도, 말레이시아, 베트남 등의 제조업 인건비는 중국의 절반에서 3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10년간 갑절로 오른 중국의 임금이 부담스러운 기업들엔 매력적이다. 다만 노동력의 질이 고르지 않다는 게 약점이다. ▷미국, 유럽연합(EU)이 대체 생산기지를 찾는 과정에서 나온 알타시아 개념은 다분히 서구 중심적이다. 그렇다 해도 알타시아 내의 긴밀한 협력은 희토류를 앞세운 중국의 자원 압박, 자국에 생산시설을 세우라는 미국의 요구에 한국이 대항할 지렛대가 될 수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내년에도 중국발 경제 위험이 우리 경제에 악영향을 줄 것으로 본다. 30여 년간 중국이란 하나의 바구니에 담아뒀던 계란을 알타시아로 나눠 옮길 시간 여유가 많지 않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3-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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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중현]“1+1=100” 대신 ‘1+1=3, 4’라 할 순 없었나

    지난달 말 윤석열 대통령은 국민의힘 연찬회에서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와 관련해 발언의 강도를 확 높였다. “도대체 과학이라고 하는 건 (없고) ‘1 더하기 1을 100’이라고 하는 이런 세력들하고 우리가 싸울 수밖에 없다”고 했다. ‘위험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원자력 전문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설명을 부정하는 더불어민주당 등을 겨냥한 것이다. 주목할 부분은 100이란 숫자다. 뚜렷한 과학적 근거나 실효적 대응책 없이 “제2의 태평양 전쟁” 운운하는 야당의 태도는 ‘1+1=2’라는 자명한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을 만하다. 하지만 그들의 오류를 지적하는 데에는 ‘1+1을 3 또는 1+1을 4라는 세력’, 좀 많이 간다 해도 ‘1+1을 10이라는 세력’ 정도로도 족하다. 사전에 준비했든, 즉흥적으로 떠올렸든 대통령 내면의 ‘분노 게이지’는 100보다 낮은 숫자로 표현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문제는 ‘1+1=100’과 싸우겠다는 대통령의 의지가 중간지대에 있는 이들에게 미칠 심리, 정서적 효과다. 대통령의 표적은 ‘오염수 괴담’을 확산하는 세력일 터다. 하지만 머리로는 ‘1+1=2’를 받아들여도 그저 ‘찜찜하다’는 이유로 추이를 지켜보던 이들도 적지 않다. ‘희석한 오염수를 가져오면 마시겠다’는 과학자, 일부러 횟집에 더 자주 가는 사람과 달리 ‘안전한 건 알아도 그걸 왜 마시냐’, ‘그래도 회는 좀…’이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다. 후쿠시마 바닷물의 방사능 검사 데이터가 축적될수록 국민의 인식은 ‘1+1=2’에 점차 수렴하고, 괴담도 수그러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 대통령이 ‘1+1=100이란 사람들’을 강도 높게 비판하면 판단을 유보하던 이들이 합리적, 이성적인 쪽으로 돌아서는 속도가 늦어질 가능성이 있다. 자기가 틀린 걸 알고, 고치려고 마음먹었다가도 옆에서 “넌 그게 틀렸어”라고 지적하면 반대로 엇나가는 게 사람의 심성이다. 윤 대통령의 공격적 숫자 표현과 관련해 현 정부 핵심 정책과제인 노동개혁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진 적이 있다. 올해 초 고용노동부가 일이 많을 때 집중적으로 더 일하고, 놀 때 몰아서 쉬는 주 52시간제 개혁 방안을 내놨을 때다. 경직된 근무시간 체제는 개혁 필요성이 큰데도, 야당과 노동계는 이론적으로나 가능한 ‘주 69시간 근무’ 프레임을 앞세워 반발했다. 그때 윤 대통령이 대선 주자 시절에 했던 발언이 소환됐다. “게임 하나 개발하려면 한 주에 52시간이 아니라 일주일에 120시간이라도 바짝 일하고, 이후에 마음껏 쉴 수 있어야 한다”는 거였다. 구글, 테슬라 같은 빅테크도 초기엔 야근을 밥 먹듯 하며 성장했다는 걸 강조한 것일 게다. 하지만 왜 하필 ‘120시간’인지 알 수 없는 이 말이 개혁의 걸림돌이 됐다. 대통령실은 결국 “연장근로를 하더라도 주 60시간 이상은 무리”란 메시지를 내놔야 했다. 앞으로도 숫자 하나에 개혁 성패가 좌우될 일들이 예정돼 있다. 정부 국민연금 자문기구인 재정계산위원회가 내놓은 연금개혁 방안에는 9%인 보험료율을 12∼18%로 인상하는 방안, 수령개시 연령을 66∼68세로 높이는 방안 등이 포함돼 있다. 하지만 여야 정치권이 부딪칠 최대 관건은 소득 대체율을 40%로 놔둘 것이냐, 50%로 올릴 것이냐가 될 전망이다. 대통령은 미래세대의 부담은 덜고, 연금제도 수명은 늘리는 쪽으로 국민을 설득할 의무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성을 뜻하는 ‘로고스’, 감성적 측면인 ‘파토스’, 화자의 성품과 신뢰성의 반영인 ‘에토스’를 설득의 3요소로 꼽았다. 지금 윤 대통령은 이성적 측면인 로고스를 너무 강조하느라 국민의 파토스를 놓치고 있다. 이런 패착이 반복되면 개혁은 어려워진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3-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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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박중현]다이아몬드 원석값 40% 하락… 원인은 ‘랩 다이아몬드’

    “다이아몬드는 영원하다(A Diamond is Forever)”라는 카피는 역사상 가장 성공한 광고 문구 중 하나다. 다국적 보석기업 드비어스는 1947년 내놓은 이 광고로 ‘결혼반지=다이아몬드’란 인식을 심는 데 성공했다. 이 회사는 생산량을 줄여서라도 가격을 유지하는 고가 전략으로 유명하다. 그러던 드비어스가 고집을 꺾고 다이아몬드값을 낮추고 있다. ▷드비어스는 상품 가치가 높은 ‘셀렉트 등급’ 다이아몬드 원석 값을 최근 1년 새 40% 내렸다. 작년 7월 캐럿당 1400달러였던 원석이 올해 7월 850달러로 떨어졌다. 연구실에서 만드는 보석인 ‘랩 그론 다이아몬드(Lab Grown Diamond·LGD)’ 공급이 늘어난 게 주요 원인이다. LGD의 생산원가는 천연 다이아몬드의 3분의 1 수준이다. ▷LGD는 흑연에 고압·고열을 가하는 등의 방법으로 2∼4주 만에 만들어진다. 성분이 자연산과 동일해 전문가가 아니면 감별조차 어렵다. 예전엔 ‘인조 다이아몬드’라 불리며 가짜 취급을 받았지만, 지금은 가성비가 높아 청년층 사이에서 인기다. 명품업체인 루이뷔통 모에에네시(LVMH)가 LGD 벤처기업에 투자했고, 드비어스도 직접 제조에 뛰어들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소환된 ‘블러드 다이아몬드’ 논란도 LGD 확산의 원인이다. 원래 블러드 다이아몬드는 시에라리온 등 아프리카 분쟁 지역에서 민간인을 착취해 생산하는 다이아몬드에 붙던 이름이다. 지금은 다이아몬드 광석 매장량 세계 1위로 매년 5조 원어치의 원석을 수출하는 러시아가 논쟁의 중심이다. 주요 7개국(G7)은 푸틴의 전쟁 자금줄로 쓰이는 러시아 다이아몬드 수출을 차단할 방법을 찾고 있다. ▷이런 가운데 올해 6월 미국을 방문한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부부에게 7.5캐럿짜리 LGD를 선물했다. “인도 연구실에서 태양열·풍력 에너지를 사용해 친환경적으로 만든 것”이란 설명을 덧붙였다. 인도는 해외에서 사들인 원석으로 세계에서 팔리는 다이아몬드의 90%를 가공해 파는 나라다. 러시아산 원석 수입이 끊기면 많은 이들이 일자리를 잃는다. 이 때문에 논란을 피할 수 있는 LGD 생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LGD를 개발한 업체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공급 확대로 등급이 낮은 1캐럿대 다이아몬드 가격은 100만 원 밑으로 떨어졌다. 합리적, 윤리적 소비를 원하는 청년들의 취향과 잘 맞는다. 작년 글로벌 다이아몬드 주얼리 시장에서 LGD 비중은 처음으로 10%를 넘어섰다. 결혼반지가 진짜냐, 가짜냐를 따지는 게 의미 없는 시대가 오고 있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3-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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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중현]‘세대 간 富의 재분배’ 시금석, 신혼 증여 비과세

    국민 실생활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세금 제도를 한국처럼 매년 갈아엎는 나라도 드물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작년만 해도 법인세율, 소득세 구간, 종합부동산세 제도를 뜯어고쳤다. 세제의 큰 틀에 손대지 않고 ‘핀셋 감세’를 하겠다는 정부의 내년도 세법 개정안이 오히려 이례적인 경우다. 2년 연속으로 거대 야당과 세금 문제 때문에 격돌하긴 부담이 크고, 올해 세수 결손이 40조 원이 넘을 것으로 예상돼 감세 등을 밀어붙이기 어렵게 된 게 이유다. 대형 세제 개편 이슈가 빠지다 보니 올해는 신혼부부 결혼자금에 대한 증여세 비과세 한도 확대가 최대 관심사로 떠올랐다. 지금도 10년간 5000만 원까지 자녀에게 물려줄 때 증여세를 내지 않는데, 결혼하는 자녀에겐 그 한도를 더 늘려 주자는 거다. 혼인신고를 전후해 2년씩 총 4년 안에 부모나 조부모가 재산을 자녀, 손자녀에게 물려주면 기존 5000만 원에 1억 원을 더한 1억5000만 원까지 세금을 면제해준다. 신랑신부가 양가에서 세금 없이 3억 원까지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는 길을 터주는 것이다. 국민의힘은 이런 증여세제 개편이 청년층의 결혼, 출산을 장려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적극 찬성하고 있다. 평균 결혼 비용이 3억3000만 원, 이 중 2억8000만 원이 주거 마련에 쓰인다는 점을 감안했다고 한다. 내년 4월 총선에서 청년층의 표를 늘리는 데 보탬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숨기지 않는다. 반면 ‘부의 대물림’에 이념적 거부감이 강한 더불어민주당은 반발했다. 이재명 대표의 첫 반응이 “또 초부자 감세냐”다. 1억5000만 원씩 결혼자금을 지원할 수 있는 부모가 얼마나 되느냐는 거다. 받을 게 없는 청년에겐 상실감만 줄 것이란 비판도 이어졌다. 다만 세게 반대하다가 오히려 청년층 표가 깎일까 봐 걱정하는 모습도 엿보인다. 이념이나 형평성 문제를 빼고 본다면 비과세 한도 확대는 긍정적 측면이 적지 않다. 올해 상반기 서울의 평균 전셋값은 5억 원 정도다. 직업이 있어도 신혼부부가 부모 지원 없이 저축과 대출만으로 집을 구하기 어렵다. 세무사와 상담하고, ‘가짜 차용증’을 쓰면서 자녀들을 지원하는 부모가 수두룩하다. 세정 당국도 눈에 띌 만한 액수가 아니면 잘 문제 삼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사실상 방치했던 탈세 관행을 양성화, 현실화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사안에는 세제 현실화를 뛰어넘는 의미가 담겨 있다. 바로 ‘세대 간 부의 재분배’를 어느 수준까지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사회적 합의의 문제다. 현재 한국 베이비 부머들의 나이는 60∼68세. 고도 성장기, 집값 폭등기를 거치며 역사상 가장 많은 자산을 축적한 부모 세대다. 부동산, 금융자산을 합해 한국 가계 순자산의 46%를 60세 이상이 갖고 있다. 이에 비해 연봉 많이 주는 일자리는 찾기 어렵고, 비싼 주거비를 감당하기 버거운 자녀 세대들 사이에선 돈을 얼마나 절약하며 살 수 있는지 서로 경쟁하는 ‘거지 배틀’이 벌어진다. 고령층은 돈이 있어도 쓰지 않고, 청년들은 쓰고 싶어도 쓸 돈이 없다. 일본의 선례가 보여주듯, 이 문제로 인한 소비 위축이 경제의 발목을 잡는 날이 머지않았다. 그런 점에서 정부 여당이 증여세 비과세 한도 확대를 비혼(非婚), 저출산의 해결책처럼 내건 것은 핀트가 어긋났다. “재산 물려줄 테니 빨리 결혼하라”는 부모의 독촉에 배우자를 서둘러 찾는 청년은 쌍팔년도 드라마에나 나온다.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친구들한테 ‘비혼 축의금’을 거두는 게 요즘 청년들이다. 결혼 여부와 관계없이 부모 세대의 부를 자녀 세대에게 나눠주는 길을 넓게 열어주고, 이에 대한 사회적 동의를 이끌어내는 게 더 중요한 일이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3-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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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박중현]집 300만 채 지어놓고, 부실공사 집계도 못하는 LH

    “(아니)꼬우면 니들도 이직하든가. 어차피 한두 달만 지나면 사람들 기억에서 잊혀진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의 땅 투기 의혹에 국민의 분노가 들끓던 2021년 3월. 직장인 익명사이트 블라인드에 ‘내부에서는 신경도 안 씀’이란 제목의 글이 불난 데 기름을 끼얹었다. LH 측은 현직 아닌 전직 직원일 가능성을 제기하며 수사를 요청했지만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2년 5개월이 지난 지금 LH가 존폐 위기를 맞았다. 주차장 건설 중 붕괴사고가 났던 인천 검단 아파트처럼 LH 발주 아파트 가운데 무량판(기둥으로만 천장을 받치는 방식) 구조 아파트가 91곳, 이 중 15곳의 주차장이 부실시공됐다는 지난달 말 발표가 시작이었다. 열흘 뒤인 이달 9일에는 갑자기 무량판 구조 단지 10곳, 철근이 덜 쓰인 5곳이 추가로 확인됐다. ▷집계에 빠졌다가 추가된 과정이 황당하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경기 화성시의 LH 단지 감리현장 점검에 나섰는데, 무량판 방식이 아닌 줄 알았던 이 단지 주차장도 같은 방식으로 확인된 거다. “현황조차 취합되지 않는 LH가 존립근거가 있느냐”는 질책 후 찾아낸 게 부실 공사 5곳이다. “철근 빠진 정도가 경미하다”며 실무자들이 보고에서 뺐다고 한다. ▷이한준 LH 사장은 이 사실을 공개하면서 전체 임원 7명의 사직서를 받았고, 자신의 거취도 임명권자 뜻에 따르겠다고 했다. 이와 함께 자력으로 조직 내부 혁신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경찰, 공정거래위원회, 감사원에 조사를 요청했다. 1962년 설립된 대한주택공사, 1979년 세워진 한국토지공사가 2009년 통합돼 만들어진 LH 역사상 최대 위기다. ▷LH가 지금까지 국내에 지은 공공주택은 임대 167만 채, 분양 129만 채 등 총 296만 채다. 전국 주택 수 2200만 채 중 13.5%다. 국민 20명 중 1명꼴인 250만 명이 LH 공공임대 주택에 살고, 분양 아파트를 합하면 거주자 수는 더 늘어난다. 올해 3월 LH가 내놓은 새로운 비전이 ‘고품질 주택 80만 채 공급’이었다. 저가 임대주택 이미지를 탈피하는 게 목표였는데, 이번 사태로 누구도 믿을 수 없는 공염불이 됐다. ▷지난번 땅 투기 부정부패 사건은 관련자 처벌과 임직원 부동산 보유내역 의무공개 등의 조치로 넘어갔다. 하지만 이번엔 입주자 안전을 위협하는 안전사고다. 불안에 떠는 주민이 남아 있는 한 기억에서 적당히 지워질 가능성은 없다. LH 퇴직자가 일하는 설계, 감리 회사와의 부정한 커넥션도 문제로 꼽힌다. 다닐 때나, 퇴직한 뒤에나 ‘신의 직장’ 소리를 듣는 LH는 이제 조직 해체 수준의 대수술이 불가피해졌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3-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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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박중현]일본은행의 조용한 변심… 무제한 돈 풀기 끝났나

    “10년물 국채금리 변동 상한을 최대 1%까지 용인하겠다.” 지난주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BOJ) 총재의 한마디가 세계 금융계를 놀라게 했다. 0.5%였던 상한을 두 배로 높인 이 결정이 ‘아베노믹스’ 일환으로 BOJ가 10년간 고집해온 무제한 돈 풀기의 종료 신호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초기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이 푼 돈은 인플레이션(물가 상승) 역풍을 불렀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작년 3월부터 11차례에 걸쳐 금리를 5%포인트나 올려야 했다. 한국 등 대부분의 주요국이 금리를 높였지만 반대로 움직인 나라가 둘 있다. 하나는 경기침체가 더 걱정인 중국, 다른 하나는 일본이다. ▷BOJ의 단기금리는 ―0.1%다. BOJ에 돈을 맡긴 은행들은 이자를 받는 게 아니라 원금이 깎인다. 금리가 마이너스이다 보니 경기를 띄우려고 할 때 한국처럼 금리를 낮출 수 없다. 그래서 특이한 방법을 쓰는데, 국채금리 상한을 정하고 시장금리가 그 선을 넘으면 돈을 찍어 채권을 사는 식으로 돈을 푼다. 문제는 너무 많이 사들여서 일본 정부의 국채 절반 이상을 BOJ가 보유하는 기이한 상황이 됐다는 거다. ▷부실한 일본의 재정이 국채금리를 통제하는 또 하나의 이유다. ‘잃어버린 30년’간 일본 정부는 막대한 돈을 풀었다. 1989년 14.4%였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이 2021년 263%로 올랐다. 국채의 이자를 갚는 데에만 매년 예산의 4분의 1이 나간다. 국채금리가 높아지면 이자 부담이 커지면서 정부가 쓸 돈이 부족해진다. ▷이번 결정에 글로벌 금융시장이 놀란 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2차대전 후 첫 학자 출신 총재인 우에다는 올해 4월 취임 전 심하게 왜곡된 일본의 통화정책을 고칠 적임자로 꼽혔다. 하지만 이후 3개월간 줄곧 ‘제로 금리’ 유지에 무게를 실어오다가 이번에 방향을 확 틀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3%대로 오른 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조용하지만, 갑작스러운 우에다 총재의 변심에 일본 국채금리는 9년 만에 최고로 치솟았고, 엔화 가치는 폭등했다. ▷일본의 마이너스 금리는 그간 세계 자본시장에 호재였다. 일본에서 저금리로 돈을 빌려 다른 나라에 투자하는 ‘엔 캐리 트레이드’가 활발했다. 일본 국내 금리가 높아지면 이런 투자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 싼 엔화 덕에 마음껏 일본을 찾던 한국 여행객의 부담도 커진다. 다만 엔화 약세로 강화된 일본 상품의 가격 경쟁력에 치이던 한국 수출기업에는 도움이 된다. 새로운 길로 접어든 BOJ의 작은 변화까지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3-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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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박중현]“지구 온난화 시대 끝나고 ‘열대화’ 시대 도래”

    싱가포르의 국부 리콴유 전 총리는 생전에 ‘20세기 최고 발명품이 뭐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주저 없이 “에어컨”이라고 답했다. 싱가포르의 연중 낮 평균 기온은 31도다.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은 저서 ‘미국 자본주의의 역사’에서 20세기 초 미국 남부의 경제활동이 활발해진 이유로 에어컨 발명을 꼽았다. 인류는 화석연료를 태워 생산한 전기와 기술 발전의 힘을 빌려 이렇게 더위를 극복했는데, 대신 지구가 열병에 걸렸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27일 “지구 온난화(global warming)의 시대는 끝났다. 지구 열대화(global boiling) 시대가 도래했다”고 선언했다. 펄펄 끓는 지구 기상이변의 위험성을 ‘온난화’같이 무난한 용어로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앞서 유엔 산하 세계기상기구(WMO)는 올해 7월 첫 3주가 1940년 관측 이래 지구 온도가 최고인 기간으로 기록됐다고 밝혔다. 이 기간 세계 평균 지표면 기온은 16.95도로, 종전 최고치인 2019년 7월의 16.63도를 웃돌았다. ▷지구 온난화란 표현은 1972년 ‘성장의 한계’라는 로마클럽 보고서에 처음 등장했다. 로마클럽은 지구의 유한성을 걱정하는 유럽의 지식인들이 1968년 만든 모임이다. 1985년에는 WMO와 유엔환경계획(UNEP)이 온난화 주범으로 이산화탄소를 공식 지목했다. 화석연료 사용으로 늘어난 이산화탄소가 태양에서 온 에너지를 지구 대기권에 온실처럼 가둬 기온을 끌어올린다는 것이다. ▷온난화에서 열대화로 51년 만에 표현 강도가 업그레이드된 배경에는 각국의 산업화 경쟁이 있다. 기후변화가 뚜렷해지자 국제사회는 2015년 파리기후협정을 통해 금세기 말 지구온도 상승 목표를 ‘1880년 대비 섭씨 1.5도’로 합의했다. 하지만 산업화 단계를 넘어선 선진국들의 탄소 감축 요구에 신흥국들은 ‘사다리 걷어차기’라며 반발한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처럼 탄소 배출과 이상기후의 연관성을 부정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탄소 배출로 지구가 병들었다는 과학적 징후는 뚜렷해지고 있다. 최근 덴마크 코펜하겐대 연구팀은 극지방의 찬 바닷물이 저위도로 흐르는 ‘심층해수 순환’이 2025년 붕괴되기 시작해 2095년에 중단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영화 ‘투모로우’에 나온 지구적 기후 대재앙 시나리오가 현실화할 수 있다는 거다.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최악의 상황을 피할 여지는 남아 있다”며 각국의 즉각적 행동을 촉구했다. ‘지구의 아이들’인 우리 하나하나가 아픈 지구를 위해 뭘 할 것인지 고민하고 실천해야 할 때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3-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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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중현]철 지나도 업데이트 안 되는 野‘기승전, 돈 풀기’

    국회 1, 2당이 이념 양극단을 달리는 한국에 살다 보면 미국 정치에 좌우가 있다는 사실을 종종 잊게 된다. 작년 8월 조 바이든 대통령이 ‘학자금 대출 탕감’ 카드를 꺼냈을 때 “맞아, 미국에선 민주당이 좌파였지”라는 느낌이 확 와닿았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올해 4월 “미국은 원금까지 탕감해준다”고 했던 그 정책이다. 작년 중간 선거를 석 달 앞두고 나온 이 정책의 별명은 ‘역사상 가장 비싼 행정명령’. 미국의 보통 중산층 대학생들은 비싼 등록금을 정부에서 대출받고 졸업 후 취직해 오래 갚는다. 바이든은 4300만 명이 진 학자금 빚 4300억 달러(약 550조 원)를 가구당 2만 달러까지 없애주는 정책을 의회 동의 없이 밀어붙였다. 국민의 빚을 정부 부채로 바꾸는 정책이다. 미국의 예산권은 의회에 있다. 대통령 멋대로 큰돈을 풀겠다는데 ‘전례 없는 포퓰리즘’ ‘명백한 매표 행위’란 비판이 나오지 않았을 리 없다. 결국 법정까지 갔다. 올해 6월 말 미 연방대법원은 ‘의회 승인 없는 추진은 잘못’이라며 정부 패소 판결을 내렸다. 내년 말 대선을 앞두고 정치적 내상을 입은 바이든은 20∼25년간 대출금을 성실히 갚고도 빚이 남은 이들의 잔액을 없애주는 낡은 조항을 찾아내 체면치레를 하려고 한다. 한국의 민주당도 올해 5월 비슷한 정책을 밀어붙였다. 국회 교육위원회에서 민주당이 단독으로 통과시킨 ‘취업 후 학자금 상환 특별법’ 개정안이다. 학자금 대출을 받은 청년이 소득이 없으면 이자를 면제해주는 법이다. 10년간 8650억 원의 예산이 든다. 문제는 월 소득 1000만 원이 넘는 고소득 가구 자녀에게까지 이자를 없애주는 경우가 생기고, 대학에 안 간 약 30% 청년은 역차별을 받는다는 점이다. 그다음 달 미 연방대법원 판결이 나오면서 “미국은 원금까지…”라며 강행 처리를 주문했던 이 대표 발언의 전제는 사실과 달라졌다. 그래도 민주당은 조만간 본회의에서 원안대로 통과시킨다는 방침에 변화가 없다. “국민이 국가 대신 빚을 지면 안 된다”는 말은 요즘 35조 원 추가경정예산 편성을 주장할 때마다 빠뜨리지 않는 이 대표의 입버릇이다. 나랏빚을 늘려 민간의 빚을 덜어주자는 거다. 2021년 7월에도 당시 경기도지사였던 이 대표는 전 국민 재난지원금을 나눠 주자고 주장하다가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반대하자 “국가가 빚지지 않으면 국민이 빚져야 한다”고 했다. 그의 발언은 현대화폐이론(MMT)을 주장하는 국내 학자의 ‘나라가 빚을 져야 국민이 산다’는 책 제목을 연상시킨다. MMT는 ‘독자 통화를 가진 나라의 정부는 무한정 돈을 찍어내도 문제가 없다’는 비주류 경제이론이다. 코로나19 전 미국 민주당 급진파가 강력히 주장했다. 하지만 팬데믹 이후 푼 막대한 재정이 인플레이션 역풍으로 돌아오자 경제 논쟁의 판에서 종적을 감췄다. 글로벌 경제 상황은 이렇게 뒤집혔는데 이 대표의 레퍼토리는 그대로다. 이 대표는 재작년 7월 문재인 정부가 법정 최고금리를 연 24%에서 20%로 인하하기 직전에 “최고금리 적정 수준은 11.3∼15% 정도”라며 더 낮추라고 압박하기도 했다. 이후 기준금리는 오르기 시작했다. 20% 금리 상한에 막힌 제도권 대부업체들은 신용 낮은 이들의 대출을 중단했다. 돈이 급해도 갈 곳 없는 서민 다수는 불법 사채업 고리 대출의 제물로 내몰리고 있다. 경제 환경이 바뀌고, 과거에 폈던 주장의 결과가 의도와 정반대로 나타나면 정책을 고치거나, 업그레이드하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이 대표와 민주당의 요즘 경제정책에선 학습 능력도, 반성도 찾아보기 어렵다. 고장 난 레코드처럼 흘러간 ‘기-승-전-빚 내 돈 풀기’ 노래를 되풀이할 뿐이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3-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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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박중현]거품 꺼지는 中 부동산, 글로벌 금융위기 뇌관 되나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는 2005년 “오늘날 미국인은 집을 사고팔면서 먹고산다”는 내용의 칼럼을 뉴욕타임스에 썼다. 저소득층에 빚을 내서 집을 사라고 부추겨 호황을 누리는 미국 경제를 꼬집은 것이다. 3년 뒤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졌다. 국내총생산(GDP)의 30%를 부동산 개발이 차지하는 중국 경제를 크루그먼식으로 표현하면 ‘중국인은 땅 사용권을 팔아 먹고산다’고 할 만하다. 그런 중국 부동산에 큰 탈이 났다. ▷최근 중국 부동산기업 완다그룹이 채무불이행(디폴트) 위기를 맞았다. 완다의 핵심 계열사가 이달 23일까지 4억 달러(약 5062억 원)의 달러 채권을 상환해야 하는데 갚을 능력은 절반밖에 안 된다. 완다그룹은 1988년 군인 출신의 입지전적 사업가 왕젠린 회장(69)이 세운 부동산 개발업체다. 백화점, 호텔, 테마파크, 극장체인, 엔터테인먼트로 사업을 확장해 왔다. ▷완다의 충격에다 한때 중국 2위까지 올랐던 부동산 개발업체 헝다그룹이 2021, 2022년에 120억 위안(약 142조4000억 원)의 손실을 봤다는 실적까지 공개되면서 위기감이 고조됐다. 재작년 디폴트에 빠져 ‘중국판 리먼브러더스 사태’ 우려가 제기됐던 곳이다. 헝다의 총부채는 작년 말 2조4440억 위안(약 443조 원)으로 한국 국가채무의 40%가 넘는 수준이다. ▷“집은 살기 위한 것이지 투기를 위한 것이 아니다”라는 2016년 시진핑 국가주석의 발언이 부동산 시장 위축의 신호탄이었다. 이후 중국 정부가 ‘디레버리징’(부채 축소)에 나서면서 부동산 대출이 빡빡해졌고, 직격탄을 맞은 게 헝다, 완다 같은 기업들이다. 부동산 기업의 줄도산이 예고되자 중국 정부는 정책금리 인하, 대출상환 연장 등 부양책을 내놓기 시작했다. ▷부동산은 GDP의 20%를 차지하는 수출보다 중국 경제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토지 사용권을 팔아 재정을 충당해온 지방정부들에 특히 치명타다. 땅이 국가 소유인 중국에선 지방정부가 최장 70년짜리 토지 사용권을 판다. 적자 지방정부의 빚이 급증하면서 숨겨진 것까지 모두 합할 경우 부채가 중국 GDP의 절반에 이를 것으로 국제통화기금(IMF)은 추산했다. ▷지난달 중국의 주택판매량은 1년 전 같은 달보다 28% 급감했다. 집값은 2021년 여름 이후 줄곧 하락세다. 21% 실업률에 시달리는 청년은 집을 살 여력이 없고, 싱가포르 등지로 해외이민을 떠나는 자산가가 늘어나면서 주택 수요는 살아날 기미가 없다. 다음 글로벌 금융위기가 중국 부동산에서 촉발될 것이란 전망도 있다. 부동산 버블의 끝은 언제, 어디서나 극심한 경기 침체였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3-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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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박중현]“발암가능물질이지만 먹어도 된다”… 아스파탐 혼란

    인류는 ‘단맛’에 끌리는 쪽으로 진화했다. 곤충부터 포유류까지 대다수 동물은 단맛을 선호한다. 열량은 높고, 위험은 적은 음식이란 교훈이 유전자에 각인된 탓이다. 단맛을 못 느끼는 고양잇과 동물 정도가 특이한 예외다. 인간이 당분 과잉 섭취를 걱정하게 된 건 100년도 안 됐다. 살찌는 건 싫고, 단맛은 즐기고 싶은 현대인을 위해 개발된 게 아스파탐(아스파르템) 같은 인공 감미료다. ▷세계보건기구(WHO) 산하 국제암연구소(IARC)가 지난주 아스파탐을 ‘발암가능물질’로 분류했다. 1965년 미국에서 개발된 아스파탐은 같은 양으로 설탕의 200배 단맛을 낸다. 그만큼 칼로리 섭취를 줄일 수 있고, 혈당도 높이지 않는다. 인공 조미료 글루탐산나트륨(MSG) 개발사 일본 ‘아지노모토’가 대량생산에 성공해 1980년대부터 무설탕 제품에 쓰이고 있다. ▷암 유발 가능성에 따라 IARC는 식품을 5개 군(群)으로 나눈다. 술, 담배, 소시지·햄이 ‘발암물질’로 1군, 거의 확실한 ‘발암추정물질’ 소고기·돼지고기 등 적색육, 튀김이 2A군이다. 아스파탐이 포함된 2B군은 ‘역학조사나 동물실험상 증거가 충분하지 않지만, 섭취 시 발암 가능성을 고려해야 하는 제품’을 뜻한다. 나트륨 함량이 높은 김치, 피클 등 절임 채소가 같은 그룹이고, 커피와 사카린은 이 그룹에 포함됐다가 빠진 적이 있다. ▷통상 IARC가 분류를 바꾸면 WHO 산하 식품첨가물전문가위원회(JECFA)는 일일 섭취 허용량을 조정한다. 하지만 이번엔 1981년 정한 ‘체중 1kg당 40mg 허용량’을 유지했다. ‘바꿀 만한 데이터가 충분치 않다’는 이유다. 체중 60kg 성인이 다이어트 콜라 55캔, 막걸리 33병을 하루에 마셔야 허용치가 넘는다. 한국인의 평균 아스파탐 섭취량은 허용량의 0.12% 수준이어서 위험이 크다고 보기 어렵다. ▷그런데도 ‘발암 가능’이란 꼬리표가 아스파탐에 붙으면서 식품업계는 혼란에 빠졌다. 아스파탐을 소량 사용하는 막걸리 업체들은 원료 교체를 검토 중이다. 오리온과 크라운제과도 스낵류의 단맛을 낼 대체재를 찾고 있다. 반면 펩시콜라 ‘제로 슈거’ 제품에 아스파탐을 쓰는 펩시코는 ‘아스파탐은 안전하다’는 입장을 밝혀 아스파탐을 계속 사용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일로 지난해 1조 원을 넘어선 국내 ‘제로 슈거’ 시장이 타격을 받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하지만 한국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승인한 인공 감미료만 22종이다. ‘단맛 본능’에 충실하면서 건강을 챙기고 싶어 하는 현대인의 ‘헬시 플레저(healthy pleasure)’ 욕망은 어떻게든 대안을 찾을 가능성이 크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3-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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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중현]커지는 中 ‘인질경제’ 위험, ‘차이나 엑시트’ 준비 됐나

    대중 수출 감소로 인한 무역적자 위기감이 고조되던 4월 말.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내용의 리포트를 삼성증권이 내놨다. ‘2026년, 글로벌 1위 업계가 바뀐다’란 제목의 이 보고서는 2026년 현대자동차·기아가 920만 대의 차를 팔아 세계 완성차 업계 1위가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작년 현대차그룹 순위는 세계 3위. 1974년 독자모델 포니를 내놓은 지 49년 만에 글로벌 빅3에 진입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런데 불과 3년 뒤에는 세계 1위라니. 이유를 보면 웃음이 나지만 설득력은 충분하다. 작년 판매량 1위는 1048만 대인 일본 도요타그룹, 2위는 848만 대의 독일 폭스바겐그룹이었다. 둘은 중국 시장에서 각각 2위, 1위로 도요타는 230만 대, 폭스바겐은 330만 대를 작년에 팔았다. 그런데 중국 전기차 업체들의 약진으로 두 기업의 2026년 중국 판매량이 지금의 절반 수준으로 뚝 떨어질 거란 예측이다. 반면 현대차그룹은 2016년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태 이후 6년 연속 중국 판매량이 감소하면서 시장 점유율이 1%대까지 하락했다. 더 떨어질 데는 없고 반등할 일만 남았다. 미국, 인도, 유럽연합(EU)에서도 약진하고 있어 시간은 현대차 편이다. 비자발적 중국 의존도 축소가 현대차그룹에 전화위복이 되는 셈이다. 1992년 한중 수교 첫해를 빼고 30년간 흑자행진을 이어온 대중 무역수지는 한국인에게 한중 경제 관계에 대한 허상을 키웠다. 최대 수출품목인 반도체 경기가 작년부터 침체되자 양국 교역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환상이 깨졌다. 반도체를 들어내고 보니 대중 수출은 2013년부터 이미 꾸준히 줄고 있었다. 반도체를 제외한 대중 무역수지는 재작년부터 적자였다. 지난 6년여를 돌아보면 당연한 일이다. 경북 성주 사드 부지를 제공한 롯데는 온갖 훼방에 시달리다 중국 유통시장에서 철수했다. 중국을 평정했던 한국 게임업체들은 신규 판호(版號·서비스 허가)를 못 받아 멈춰 섰다.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한국 화장품은 중국 판매량 상위 리스트에서 사라졌다. 중국 정부가 인정한 적 없는 ‘유령’ 한한령(限韓令)에 우리 기업이 고전하는 사이 중국 기업의 경쟁력은 높아졌다. 궈차오(國潮·애국 소비) 열풍까지 몰아쳤다. 한층 강화된 중국의 반(反)간첩법이 이달 시행되면서 중국 리스크는 더 커지고 있다. ‘국가기밀 및 국가 안보와 이익에 대한 정탐·취득·매수·불법 제공’을 간첩 행위로 규정한 법이다. 내용이 하도 모호해서 ‘걸면 다 걸린다’는 말이 나온다. 강화되기 전 법으로도 2014년 이후 지금까지 간첩 혐의로 체포, 구금된 일본의 기업인, 학자가 17명이다. 한국인은 처벌된 적이 없지만 언제 우리 기업이나 개인이 중국에서 ‘인질’로 잡혀도 놀랍지 않은 상황이다. 이미 중국이 한국에서 사가는 제품은 중국 기업이 못 만드는 초격차 기술 제품, 고가의 프리미엄 제품으로 축소됐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의 첨단 메모리반도체를 중국이 수입하는 건 중국이 한국에 ‘베푸는’ 혜택이 아니다. 해외에 팔 중국 제품을 생산하는 데 없어선 안 되기 때문이다. “한국의 대중 무역적자 확대는 일각에서 탈중국화 추진을 시도했기 때문”이란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의 발언 역시 이런 이유에서 철저한 허구일 뿐이다. 현대차가 중국에서 겪은 고난은 결과적으로 ‘위장된 축복’이 돼가고 있다. 미국, EU의 글로벌 기업 최고경영자들은 요즘 중국 고위 당국자를 찾아 달콤한 말을 늘어놓고 있다. 하지만 뒤로는 인도, 베트남, 일본, 한국으로 생산시설을 빼낸다. 한국 기업들도 ‘차이나 엑시트(Exit) 플랜’을 세워 대비해야 할 때다. 밖으로 소리 내 떠들지 않으면서 치밀하고도 빠르게.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3-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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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박중현]“10억 달러 흥행될 것” 머스크-저커버그 진짜 혈투?

    온라인으로 게임을 하다 마찰이 생긴 게이머들이 현실에서 직접 만나 주먹다짐을 벌이는 걸 게임계 은어로 ‘현피’라고 한다. 지난주 미국에선 세계 1위 부자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52)와 9위 부자 마크 저커버그 메타 CEO(39)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설전이 현피 직전까지 갔다. 어머니가 “말로만 싸워라. 더 웃기는 사람이 이기는 걸로…”라며 뜯어말리는데도 머스크는 “대결이 아마도 실제로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 ▷각각 전기차, SNS가 주력 사업이어서 부딪칠 일이 없을 것 같았던 둘의 다툼은 머스크가 작년 10월 트위터를 인수하면서 시작됐다. 공화당을 공개 지지하는 머스크가 인수한 트위터는 광고주가 떨어져 나가고, 주가도 급락하면서 머스크의 ‘아픈 손가락’이 됐다. 한편에선 틱톡 등에 페이스북이 밀리는 상황을 타개하려고 저커버그가 트위터와 비슷한 텍스트 중심 SNS ‘스레즈(Threads)’를 내놓기로 하면서 충돌이 예고됐다. ▷스레즈에 대해 평가해달라는 트위터 이용자에게 머스크는 “무서워 죽겠네. 전 지구가 저커버그 손가락에 지배당하겠다”고 조롱했다. “저커버그는 (브라질 무술) 주짓수를 한다”는 말에는 “철창 싸움을 할 준비가 됐다”고 응수했다. 지켜보던 저커버그가 “(싸울) 위치를 보내라”는 글을 올리자 호사가들은 열광했다. 둘과 통화한 종합격투기 단체 UFC의 회장은 “역사상 가장 큰 싸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흥행수입 10억 달러(약 1조3000억 원)짜리 빅게임이 될 거란 평가까지 나왔다. ▷미국 정보기술(IT) 업계 거물 간 말다툼의 원조는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다. 독선적 성격으로 정평이 난 잡스는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를 향해 “상상력이 부족하고 발명한 게 없다”는 인신공격을 서슴지 않았다. MS 윈도에 대해선 “뻔뻔스럽게 (애플의) 아이디어를 훔쳤다”고 비판했다. 게이츠가 ‘애플이 다른 데서 훔친 걸 나도 가져다 쓴 것’이란 취지로 유머를 섞어 받아넘기지 않았으면 큰 싸움이 났을 것이다. 둘의 진정한 화해는 2011년 잡스가 타계한 뒤에야 이뤄졌다. ▷최근엔 팀 쿡 애플 CEO가 공개한 혼합현실(MR) 헤드셋 ‘비전프로’를 놓고 저커버그가 “값만 비싸고 혁신은 없다”고 비판했다. 회사 이름까지 메타로 바꾸면서 메타버스에 투자했지만 성과가 나쁜 저커버그에게 애플의 도전은 큰 위협이 될 수 있다. 시가총액이 웬만한 나라 국내총생산(GDP)급인 미국 IT 공룡 CEO들의 입씨름은 유치해 보인다. 하지만 4차 산업혁명의 챔피언 트로피를 들 가능성이 높은 최강자들이 벌이는 싸움이란 점에서 한편으론 부럽기도 하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3-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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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종목 무더기 하한가… ‘천국의 계단株’ 아닌 ‘주가조작’? [횡설수설/박중현]

    모든 주식 투자자들은 자신이 산 종목이 ‘천국의 계단주(株)’가 되어주길 꿈꾼다. 우(右)상향 곡선에 올라타 멈추는 일 없이 장기간 고공 행진하는 종목을 증권가에선 이렇게 부른다. 2020년 초부터 3년 넘게 코스피 상장사인 방림·동일산업·만호제강·대한방직과 코스닥 상장사인 동일금속은 이런 주식이었다. 하지만 이번 주 수요일 정오를 전후해 이들 5개 종목은 별다른 이유 없이 동시에 하한가까지 곤두박질쳐 50일 전 소시에테제네랄(SG)증권발 주가 폭락 사태의 악몽을 되살렸다. ▷동반 폭락하기 전까지 만호제강은 2020년 초에 비해 315%, 동일산업이 285% 오르는 등 5종목 주가는 3년 반 전에 비해 평균 252% 상승했다. 회사가 보유한 자산의 규모에 비해 주가가 낮다는 점, 실적 개선 등 뚜렷한 호재가 없는데도 장기간 상승한 중소형주라는 점, 시장에서 거래되는 양이 적다는 점이 이들의 공통점이다. SG증권발 주가 폭락 사태를 주도한 라덕연 H투자자문 대표 일당이 주가 조작의 표적으로 삼았던 종목들과 여러모로 흡사하다. ▷5개 종목 중 몇몇은 온라인 주식 커뮤니티 B투자연구소가 집중 추천해온 종목이어서 이곳 운영자 강모 씨에게 의혹의 눈길이 쏠리고 있다. 과거 소액주주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던 강 씨는 해당 주식들이 저평가됐다는 글을 지속적으로 올려 왔다. 강 씨는 “나와 가족도 깡통계좌가 됐다”며 혐의를 부인했지만 검찰은 어제 그의 출국을 금지했다. 증권업계 관계자들은 이들 회사의 주가 흐름 이상을 포착한 증권사들이 신용대출 연장을 거절하자 투자자들이 투매에 나서면서 주가가 폭락한 것으로 보고 있다. ▷강 씨는 시세 조종 등의 혐의로 지난해 12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벌금 4억 원을 선고받은 전력이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21년 한 해 증시 불공정 거래 행위로 기소된 사건 중 61.5%는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재범률도 28%나 됐다. 10명 중 6명은 실형을 피하고, 3명 중 1명은 다시 주가 조작에 나선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주가 조작으로 들통난 이익의 3∼4배에 불과한 ‘솜방망이 벌금’의 영향도 있다. 당국에 걸리지 않은 이익을 생각하면 ‘한 번 감옥에 갔다 와도 남는 장사’란 말이 나온다. ▷그제 불과 28분 만에 증발한 5개 종목의 시가총액이 5066억 원이다. 이런 후진국형 사고가 반복될 때마다 외국 투자가들의 한국증시에 대한 불신은 커지고, 투자 의지도 위축될 수밖에 없다. 주가 조작 범죄자를 시장에서 장기간 격리시키고, 한 번만 걸려도 패가망신하도록 이익을 환수하는 법안들이 국회에 이미 발의돼 있다. 서두르지 않으면 천국의 계단에 오르는 대신에 날개를 잃고 절망 속으로 추락하는 개미 투자자만 더 늘어나게 된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3-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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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중현]민주당은 어떻게 ‘폐급 정책’의 집합소가 됐나

    깡통전세, 역전세난, 전세사기…. 부동산 시장에서 나오는 우울한 뉴스를 접할 때마다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다. 3년 전인 2020년 7월 30일 국회 본회의장. 야당 반대를 무릅쓰고 ‘임대차 2법’을 단독으로 통과시킨 더불어민주당 김태년 원내대표는 주먹을 불끈 쥐고 기뻐했다. 하지만 이를 지켜본 경제 전문가의 반응은 대체로 ‘저게 좋아할 일인가’ 하는 거였다. 폭격과 함께 도시를 파괴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경제학자들이 꼽는 게 가격통제다. 주택 공급은 부족한데 전세 갱신계약을 의무화하고, 전세금 인상 폭을 5%로 묶으면 벌어질 일은 불 보듯 훤했다. 법 시행 후 전셋값은 어김없이 폭등했다. 불과 8개월 뒤 2021년 4·7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김 원내대표는 정책 실패를 고개 숙여 사죄했다. 그래도 선거 결과는 민주당의 대패였고, 그해 말 전셋값은 정점을 찍었다. 올해 하반기부터 본격화할 역전세난은 당시 빚을 내 빌라 전세라도 얻어야 했던 세입자들의 안간힘이 만든 후폭풍이다. 지난 며칠 사이엔 민주당 전·현직 원내대표들 간의 입씨름이 벌어졌다. 렌터카 기반 차량호출 서비스 ‘타다’를 운영했던 경영진은 무죄라는 대법원 판결이 나오고, 2019년 통과시킨 ‘타다 금지법’이 혁신의 걸림돌이 됐다는 비판이 커지자 박광온 원내대표는 “타다의 승소는 국회의 패소란 지적을 아프게 받아들인다”는 반성문을 냈다. 모빌리티 혁명에 역행한다는 전문가들의 비판이 쏟아졌던 법이다. 하지만 법안을 발의했던 박홍근 전 원내대표는 “모빌리티 혁신을 위한 문재인 정부와 국회의 노력을 폄훼한 행위”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요즘 민주당의 정책 테이블엔 제2, 제3의 임대차법, 타다 금지법 후보들이 쌓이고 있다. 조만간 본회의에 올린다는 노란봉투법은 대기업들을 상대로 수백, 수천 개 하청업체들의 파업을 일상으로 만들 가능성이 높다. 여전히 살아 있는 이재명 대표의 트레이드마크, 기본소득은 유사한 정책이 이탈리아 좌파 정부에서 시행됐다가 과도한 재정 부담, 근로의욕 저하라는 예정된 부작용 탓에 정권이 교체된 후 대폭 축소됐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무산되긴 했지만, 민주당이 밀어붙였던 양곡법은 과거 유럽 일부 나라, 태국 등에서 실패해 폐기된 정책이다. 요즘 이 대표는 “35조 원 규모 민생회복 추경 편성”을 요구하고 있다. 지금 한국 경제의 최대 위협 요인은 수출 감소다. 선심성 돈 풀기는 이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 될 뿐 아니라 간신히 잡혀가는 물가를 자극할 가능성이 크고, 지난 정부에서 400조 원 넘게 늘어난 나랏빚을 더 늘려 국가신인도를 깎아먹을 것이란 경제 전문가들의 충고가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민주당 정책이 이렇게 된 이유를 짐작게 하는 글을 문 전 대통령이 지난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렸다. 그는 “경제학을 전문가에게만 맡겨두면 우리의 운명은 신자유주의와 같은 이데올로기에 휘둘리게 된다. (중략) 깨어있는 주권자가 되기 위해 건강한 경제학 상식이 필요한 이유”라고 했다. 그의 주장과 달리 문 정부의 정책들이 부정한 것은 우파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수요-공급 같은 경제학의 기본 원리였다. 13평 공공임대주택을 방문해 “신혼부부에 아이 1명이 표준이고, 어린아이 같은 경우에는 2명도 가능하겠다”며 흡족해한 그의 경제 감각과 상식이 현실과 거리가 있다는 걸 모르는 이는 많지 않다. 문 정부를 계승해 부작용이 불가피하거나, 다른 나라에서 폐기 처분된 정책들로 캐비닛을 채운 거대 야당은 우리 경제의 리스크 중 하나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정책들을 5년간 겪은 덕에 경제 상식이 부쩍 풍부해진 국민들을 10개월 뒤 총선에서 어떻게 설득하려는 걸까.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3-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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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리스, 튀르키예, 그리고 한국의 포퓰리즘[오늘과 내일/박중현]

    #. 2015년 그리스 총선에서 41세 훈남 정치인 알렉시스 치프라스가 급진좌파연합(시리자)을 이끌고 승리하자 아테네 청년들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 몰려들어 환호했다. 돈 좀 빌려줬다는 이유로 그리스인에게 긴축과 개혁을 압박하는 유럽연합(EU)의 지긋지긋한 굴레를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남자’ 치프라스가 벗겨줄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국민이 원하는 건 뭐든지 주라”던 1980년대 파판드레우 총리에 대한 향수도 여전했다.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제일 존경한다는 치프라스 총리는 그리스인들을 행복했던 시절로 되돌려줄 적임자였다. 압력에 굴복하느니 유로존을 탈퇴하겠다던 치프라스 총리의 결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국가파산의 기로에서 결국 EU 채권단의 요구를 받아들여 연금을 깎고, 공무원 수와 연봉을 삭감해야 했다. 지지층은 실망했고 2019년 총선에서 정권은 우파 신민주주의당(신민당)으로 넘어갔다. 신민당 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 총리는 무상의료 폐기, 연금 추가 삭감 등 개혁과 친기업 정책을 밀어붙여 2021, 2022년에 8.4%, 5.9%의 고속성장을 이뤄냈다. 지난 주말 치러진 총선에서 치프라스는 최저임금 14% 인상, 주당 근로시간 35시간으로 단축 등 자극적 공약을 다시 내걸고 정권 탈환에 도전했지만 더블스코어 차이로 미초타키스에게 패배했다. #. 에게해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그리스와 튀르키예는 한국과 일본만큼 뿌리 깊은 앙숙이다. 그리스 총선 1주일 전 튀르키예에선 대선이 치러졌다. 20년간 집권한 철권 통치자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1위였지만 과반이 안 돼 28일 2위 케말 클르츠다로을루 공화인민당 대표와 결선투표를 치르는데 에르도안이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 작년 말만 해도 에르도안은 패색이 짙었다. 경제학적으로 근거가 없는 해괴한 통화정책이 문제였다. 전 세계가 인플레이션을 잡으려고 금리를 올릴 때 그는 “금리를 낮춰야 물가가 내린다”는 터무니없는 지론을 관철하려고 금리를 계속 낮췄고, 말 안 듣는 중앙은행 총재들을 갈아 치웠다. 결과는 작년 86%의 물가 상승률, 사상 최저 수준의 리라화 가치였다. 하지만 그에겐 히든카드가 있었다. 작년 말 에르도안은 남성 60세, 여성 58세이던 은퇴 및 연금 수급 개시 연령을 폐지해 225만 명이 곧바로 은퇴해 연금을 받을 수 있게 했다. 흑해 가스전에서 나오는 천연가스는 모든 가정에 무료로 공급하기로 했다. 선거 5일 전 공공부문 최저임금도 한꺼번에 45% 올렸다. 그의 재집권이 유력해지자 튀르키예 주가는 폭락했다. #. 한국의 역대 경제정책 가운데 에르도안의 통화정책을 떠올리게 하는 대표적 정책이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 성장’이다. 임금을 올리면 저절로 성장이 된다는 소주성을 놓고 주류 경제학자들은 ‘족보가 없는 정책’이라고 했다. ‘유럽의 병자’였던 그리스의 수출, 성장률을 되살린 원인으로 12년 전보다도 낮은 최저임금이 꼽힌다. 한국에선 2018∼2022년 5년간 최저임금이 41.6% 올랐는데 성장엔 보탬이 안 되고 일자리 질만 나빠졌다. 200%가 넘던 그리스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은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하락하고 있는데, 한국은 나랏빚 증가 속도가 제일 빠른 나라 중 하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정치권의 포퓰리즘 경쟁에 재갈을 물릴 재정준칙이 없는 나라는 한국과 튀르키예뿐이다. 그리스의 포퓰리즘은 실패했지만 그 덕에 나라는 살아나고 있다. 튀르키예의 포퓰리즘은 정치적으로 성공적인데 나라가 수렁에 빠져들고 있다. 포퓰리즘에 대처하는 국민들의 자세가 두 나라의 운명을 바꿨다. 내년 4월 총선에서 한국인은 어느 쪽을 선택할까.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3-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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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호 영업사원’들의 들쭉날쭉 성적표[오늘과 내일/박중현]

    영업사원에게 필요한 기술 중 하나가 물건을 팔기 전에 고객 마음부터 얻는 것이다. 지난주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은 그런 면에서 효과가 있었다. 1세대 영어강사 오성식 씨는 “미국인들이 듣기 좋은 달콤한 말들을 밑밥으로 깔고, 그러고 나서 내 얘기를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라고 평가했다. “‘탑건 매버릭’과 ‘미션 임파서블’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리고 제 이름은 몰라도 BTS와 블랙핑크는 알고 계실 것”이라는 부분이 그랬다.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현대차 공장이 있는 텍사스, 조지아 지역구 의원들을 지목해 기립, 박수를 유도한 건 영리한 전략이었다. 한국 기업들의 막대한 대미 투자와 현지 일자리 창출과 관련해 조 바이든 대통령이 자신의 치적으로 자랑하는 모습을 늘 지켜봐야 했던 우리 국민들의 씁쓸함을 달래면서 ‘그거, 한국이 한 거 알지’ 하고 생색을 제대로 낸 느낌이다. 역대 한국 대통령 가운데 ‘대한민국 1호 영업사원’을 자임한 건 윤 대통령이 처음이다. 하지만 국가 이미지와 주력 수출품을 세일즈하는 건 모든 나라의 수장에게 주어지는 당연한 책무다. 천연자원은 전혀 없고, 뭐라도 만들어 해외에 팔아 돈을 벌어들여야 하는 한국 같은 수출 제조업 국가라면 더욱 그렇다. 수출을 경제성장의 원동력으로 키운 ‘세일즈 대통령’의 원조는 박정희다. 다른 개발도상국들이 수입 대체산업 육성에 주력하던 1960년대에 대다수 경제학자들이 불가능하다고 뜯어말리는 수출주도형 국가를 기획하고 추진했다. 1965년부터 1979년까지 180여 차례 수출진흥회의를 직접 주재한 박 대통령은 ‘종합상사 대한민국’ 창립자로 불릴 만하다. 영업의 최고 스페셜리스트로는 이명박 대통령을 꼽을 수 있다. 현대건설 사장을 지낸 그는 특히 중동 지역 영업에 강한 면모를 보였다. 현지에 출장 가는 장관에게는 ‘국왕이 총애하는 몇 번째 부인, 그 부인의 몇 번째 아들을 위해 어떤 선물을 준비하라’는 식의 지시가 떨어졌다. 아랍에미리트(UAE) 바라카 원전 유치 등 실적도 뒤따랐다. 올해 초 윤 대통령의 중동 방문을 앞두고 이 대통령은 친분 있는 순방국에 친서를 전달하는 애프터서비스까지 했다. 영업 판로 개척이란 면에선 노태우 대통령이 발군이었다. 노 대통령은 구(舊)공산권이 붕괴하는 시기 발 빠른 ‘북방외교’로 중국·러시아와 동구권까지 해외시장의 경계를 비약적으로 넓혔다. 영업과 거리가 멀어 보였던 노무현 대통령의 실적도 만만찮다. 지지층의 반대를 무릅쓰고 추진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진가는 시간이 지날수록 빛을 발하고 있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외교력을 집중했던 문재인 대통령은 영업사원으로선 손방에 가까웠다. 안에서 탈원전을 추진하면서 해외에선 원전을 세일즈했다. 초짜 영업사원도 ‘우리 집은 위험해 안 쓰지만, 좋으니 한번 써보라’고 권하진 않는다. 박근혜 정부에서 시작된 중국 한한령(限韓令·한류 제한령)은 계속됐고, 강제징용 문제로 일본과 교역은 악화됐다. 장기 무역적자를 방치하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맞은 김영삼 대통령도 좋은 평가를 받긴 어렵다. 윤 대통령이 미국, 중동을 상대로 얻은 영업실적 대부분은 아직 계약서에 도장이 찍히지 않은 미완성이다. 게다가 지금은 미국 중심 자유진영과 중국·러시아 권위주의 블록으로 글로벌 공급망이 쪼개지는 시대다. 한쪽에서 얻은 성과가 다른 쪽의 불이익이 될 수 있다. 한 정부의 대외영업 종합 성적표는 결국 임기가 끝난 후 찬찬히 계산기를 두드려 봐야 나온다. 고객의 마음을 얻는 건 영업의 시작일 뿐이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3-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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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료체험이라더니 슬쩍 유료전환… ‘다크 패턴’의 덫[횡설수설/박중현]

    “경차 좋지요, 좋은데 데이트할 때는 좀….” “가족여행 다니려면 안전한 게 제일인데, 역시 큰 차가….” 자동차 딜러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다가 당초 예산보다 훨씬 비싸고, 옵션이 잔뜩 붙은 차를 사는 일이 적지 않다. ‘경차 사러 갔다가 벤츠 계약하고 왔다’는 농담이 나오는 이유다. 요즘은 온라인쇼핑몰,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의 마케팅 수법이 오프라인보다 더 교묘해졌다. 그중에도 소비자의 눈과 판단을 흐리는 사기적 상술을 ‘다크 패턴(dark pattern)’이라고 한다. ▷다크패턴은 쇼핑몰, 앱의 안내에 따라 클릭, 터치를 계속하다 보면 속아서 피해를 보거나, 비합리적 지출을 하게 만들어진 사용자인터페이스(UI)다. 영국의 UI 디자이너 해리 브링널이 원치 않는 행동을 하도록 소비자를 유도하는 온라인 마케팅 방식을 통칭해 2011년 다크 패턴이라고 이름 붙였다. 재작년 한국소비자원 조사에서는 국내 100개 전자상거래 모바일앱 가운데 97%에서 다크 패턴이 발견됐다. ▷원하는 상품을 다른 곳보다 훨씬 싸게 파는 온라인 쇼핑몰을 발견하면 소비자는 혹하게 마련이다. 문제는 마음을 정하고 결제 정보를 입력하는 단계가 돼서야 ‘배송료, 세금, 봉사료 별도’ ‘특정 신용카드로 결제하면 가격 할인’ 같은 중요한 정보가 나온다는 점이다. 그것도 화면 하단에 눈에 띄지 않는 작고 흐릿한 글씨로. ‘또 낚였다’는 생각이 나도 들인 손품이 아까워 그냥 결제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공정거래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비슷한 경험을 한 온라인 소비자의 비율이 71.4%다. ▷‘1개월 무료 체험’ 같은 조건으로 유혹해 앱을 깔게 하고, 이 기간이 지나면 소비자에게 알리지 않고 유료로 전환해 자동 결제하게 만드는 건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등 구독 서비스에 많은 수법이다. 통장 지출 내역을 꼼꼼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쓰지 않는 서비스 이용료가 매달 빠져나가는 것도 모르고 지나간다. 물건을 사거나 회원에 가입하는 절차는 간편한데, 구매를 취소하거나 탈퇴하는 방법은 도저히 찾을 수 없는 미궁 같은 앱도 많다. ▷공정위는 현행법으로 제재할 수 없는 6가지 다크 패턴 유형을 규제하기 위해 전자상거래법을 고치기로 했다. 다크 패턴은 일상에 바쁜 소비자들이 온라인으로 상품, 앱을 구매할 때 세세한 데까지 신경 쓰는 걸 귀찮아하는 심리적 허점을 노린다. 속았는데 속은 줄도 모르는 ‘호갱 소비자’가 주요 타깃이다. 결제 버튼을 누르기 전에 한 번 더 따져보는 깐깐한 소비자가 많아지지 않으면 어둠 속에서 지갑을 노리는 다크 패턴을 뿌리 뽑을 수 없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3-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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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쿄 근처 전통가옥을 3천만 원에 샀어요”… 빈집 느는 日[횡설수설/박중현]

    “도쿄 주변 삼나무 전통가옥을 2만3000달러에 사서 살고 있는데 만족스럽다.” 일본인 부인과 몇 년 전 도쿄 북동쪽 이바라키현의 단독주택으로 이주한 호주 출신 40대 소프트웨어 개발자의 사연이 최근 뉴욕타임스에 소개됐다. 집주인 사망 후 지방자치단체가 보유하던 ‘아키야(空き家)’를 경매에서 낙찰받았다고 한다. 열차로 도쿄까지 45분 거리에 건평 250㎡, 대지 330㎡짜리 집을 불과 3000만 원에 샀다니 한국인들에게도 솔깃할 일이다. ▷버블경제의 거품이 걷히고, 고령화와 인구 감소로 버려진 빈집이 아키야다. 노무라증권에 따르면 2018년 850만 채였던 아키야는 2033년에는 2000만 채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집값이 싸다 보니 일본 이주를 원하는 외국인들의 관심이 높다. 최근에는 이들을 상대로 빈집을 수리해 판매하는 업체도 여럿 생겼다. 부동산 세수가 줄어 고민하는 일본의 지자체들로서도 반길 만한 일이다. ▷고령자 비율이 높은 지역에 더 많지만 수도인 도쿄에서도 주택의 10% 정도가 빈집으로 방치돼 있다. 낡은 집을 수리하는 데 큰돈이 들고, 상속세율까지 높아 고령 거주자 사망 후 물려받으려는 자손이 많지 않다. 빈집이 늘면 도시가 슬럼화하고, 범죄 위험도 커진다. 일본의 지자체 가운데 처음으로 교토가 2026년부터 빈집, 사용하지 않는 별장 등 1만5000여 채 소유주에게 ‘빈집세(稅)’를 물리기로 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도 ‘빈집 위험국’이다. 지방 도시에서 황폐화한 폐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문제는 집계 방식마저 통일이 안 돼 있다는 점이다. 5년마다 방문조사 때 당일 비어 있는 집을 집계한 통계청 조사에서 재작년 전국의 빈집은 139만 채로 전체 주택의 7.4%였다. 전기·상수도 사용 여부를 기준으로 하는 국토교통부의 작년 통계는 10만8000채로 이보다 훨씬 적다. 정부는 지난해에야 여러 부처에 흩어져 있는 빈집 관리 업무를 통합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빈집과 달리 도쿄, 교토 도심의 새집 값은 급등세다. 버블 붕괴 후 집을 사려는 이가 줄자 새 주택을 많이 짓지 않아서다. 달러화에 비해 엔화의 가치가 크게 떨어진 ‘킹 달러’ 현상 때문에 한국의 아파트와 비슷한 맨션에 투자하는 외국인이 늘어난 영향도 크다고 한다. 작년 일본 수도권에서 팔린 신축 맨션 중 8.4%는 가격이 1억 엔(약 9억8500만 원)을 넘어서 1980년대 중후반 버블 시기의 집값을 되찾았다. 그런데도 한국인들에겐 비싸게 느껴지지 않는다. 서울의 아파트 중간가격은 올해 2월에야 겨우 10억 원 밑으로 떨어졌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3-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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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중현]마약만큼 끊기 힘든 포퓰리즘의 유혹

    처음엔 ‘재미 한번 보자’는 식으로 시작한다. 일단 발을 들이면 점점 더 깊이 빠져든다. 덜 독하고 부담이 적은 쪽에서 출발하지만, 결국 더 유해하고 파탄에 이르는 길로 접어들게 된다. 의존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이들을 통해 누군가 이득을 챙기는 구조가 굳어지면 다시는 원상태로 돌아가기 어렵다. 포퓰리즘은 이렇게 마약과 비슷한 점이 많다. 그래서 정치인이 국민 세금을 멋대로 퍼주는 인기영합주의 정책을 ‘정치적 마약’이라고 한다. 10년 전만 해도 한국은 마약 청정국이었다. 지금은 생활 속 깊숙이 마약이 침투했다. 서울 강남 한복판 학원가에서 마약 탄 음료를 학생들에게 먹이는 범죄가 벌어졌다. 유명인이 마약하다 걸린 뉴스에도 “그럴 것 같았어”라는 심드렁한 반응이 나올 정도로 익숙해졌다. 10만 명당 마약사범이 20명 미만인 청정국 지위를 한국은 2016년 잃었다. 한국의 중앙 정치무대에 퍼주기 포퓰리즘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도 10년 남짓이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와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가 맞붙은 2012년 대선이 시발점이다. 모든 노인에게 기초연금 월 20만 원을 약속한 박 후보는 기초연금을 5년에 걸쳐 2배(9만→18만 원)로 올리자는 문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임기 첫해 “약속을 못 지켜 죄송한 마음”이라며 대상을 소득하위 70%로 축소했지만 정치적 이득은 톡톡히 챙겼다. 그때 일을 문재인 대통령은 단단히 기억해 뒀던 모양이다. 21대 총선을 하루 앞둔 2020년 4월 14일 그는 헌정사상 첫 긴급재난지원금 지급을 결정했다. ‘고무신 선거’의 부활이란 비판이 나왔다. 하지만 “전 국민에게 지급하자”고 먼저 제안한 건 야당인 미래통합당 쪽이었다. 더불어민주당은 대승을 거뒀고, 4인 가족 기준 100만 원이 전 국민에게 지급됐다. ‘오랜만에 한우 맛을 봤다’는 반응에 문 대통령은 “가슴이 뭉클하다”고 했다. 작년 3월 대선은 한국 포퓰리즘사의 신기원이었다. 이재명 민주당 후보는 실행에 수백조 원이 드는 ‘기본 시리즈’를 앞세웠다. 이행 불가능한 공약이란 지적이 나와도 그는 “앞으로도 그냥 포퓰리즘을 하겠다”고 했다. 포퓰리스트라는 낙인이 정치인에게 불명예가 아닌 시대가 열렸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도 질세라 ‘병사 월급 200만 원’으로 응수했고, 선거 막바지엔 ‘50조 원 자영업자 손실보상’ 공약을 내놨다. 총선을 1년 앞두고 다시 포퓰리즘의 계절이 돌아왔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정부가 보증을 서서 전 국민에게 최대 1000만 원을 최장 20년간 낮은 이자로 빌려주는 ‘기본대출’ 카드를 꺼냈다. 대출 원금에만 수백조 원이 들고, 나중에 갚지 않는 돈을 얼마나 세금으로 메워 넣어야 할지 가늠하기 힘든 정책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모든 정책을 당정이 협의하라”고 내각에 지시한 후 여당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지지율을 의식한 전기·가스요금 동결이었다. 막대한 비용이 들어갈 광주 군공항 이전 특별법, 대구·경북 신공항 건설 특별법도 여야는 주고받기식으로 통과시킬 계획이다. 한국에서도 포퓰리즘에 제동을 걸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명박 정부 말기인 2012년 박재완 장관이 이끌던 기획재정부는 ‘박근혜·문재인 대선캠프 복지공약 이행에 최소 268조 원이 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여야의 반발, 선거관리위원회의 반대로 포퓰리즘의 싹을 도려내는 데 실패했다. 그 후 10여 년간 포퓰리즘은 한국 정치판에 뿌리를 내렸다. 포퓰리즘에 깊이 중독됐다가 빠져나온 나라는 세계적으로 전례를 찾기 어렵다. 한국을 ‘포퓰리즘 청정국’으로 돌이키려면 온 국민이 포퓰리즘 정치와 한판 전쟁이라도 치러야 하는 걸까.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3-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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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중현]尹정부 ‘이권 카르텔’ 전선 이상 없나

    윤석열 대통령이 ‘이권 카르텔’이란 말을 공식 석상에서 처음 쓴 건 재작년 6월 29일이다.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관에서 대선 출마 기자회견을 하면서 그는 “정권과 이해관계로 얽힌 ‘소수의 이권 카르텔’은 권력을 사유화하고, 책임의식과 윤리의식이 마비된 먹이사슬을 구축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후 표현 강도는 점점 세졌다. 같은 해 11월 국민의힘 대선후보 수락 연설에선 “적폐, 부패의 카르텔을 혁파하고 반드시 정권교체를 해내겠다”고 강조했다. 대통령 취임 이후 한동안 잠잠했던 ‘카르텔’이란 말은 작년 12월에 다시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민노총 화물연대의 집단 운송거부 사태에 정부가 법과 원칙에 따라 강경 대응해 화물연대 측이 백기를 든 직후다. 대통령은 “일자리 세습, 기득권의 일자리 지키기를 위한 이권 카르텔”이란 말로 노동계를 비판하면서 이권 카르텔과의 전선에 복귀했다. 이후 현 정부 개혁과제 중 최우선 순위로 떠오른 노동 카르텔과의 전쟁에서 정부여당은 우세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정부의 회계 투명성 강화 요구는 필요성이 너무 자명해서 ‘노조 탄압’이란 노동계의 반발이 국민들에게 먹혀들지 않고 있다. 경찰 수사로 드러난 건설 현장 노조의 폭력적 행태들은 기득권을 지키려는 노동계 이권 카르텔의 실체를 확인시켜 줬다. 지지율까지 끌어올린 승전고에 고무됐던 것일까. 지난달 15일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대통령은 예상치 못한 쪽으로 전선을 확대했다. 5대 은행, 3개 이동통신사였다. 정부의 인허가를 받아 과점적 지위를 누리는 이들이 고금리, 고물가로 고통받는 국민을 상대로 높은 대출금리, 비싼 통신요금을 통해 이익을 챙기는 걸 비판하면서 대통령은 ‘카르텔’을 거론했다. 역대 정부에서 비슷한 일을 경험한 은행들은 앞다퉈 대출금리를 낮췄고, 통신사들은 중간요금제 출시 계획을 내놨다. 그런데 그 정도로는 역부족이었다. 과도한 상여금 등 기업의 도덕적 해이가 경범죄라면, 카르텔은 조직범죄다. 해법의 스케일도 달라져야 했다. 금융위원회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경쟁을 촉진해 과점구조를 타파하기 위해 해당 분야에 진출할 새로운 사업자를 찾기 시작했다. 경제 검찰인 공정거래위원회도 은행, 통신사 조사에 뛰어들었다. 문제는 규제 강도가 세계 최고인 한국 은행업에 진출하려는 기업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급기야 최근엔 새로 허가할 특화은행 모델로 금융당국이 검토해온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이 파산하는 일까지 생겼다. 글로벌 금융권이 요동치는 지금은 건전성에 큰 탈이 없는 국내 은행에 당국이 오히려 고마워할 상황이다. 통신 부문도 수조 원을 투자하면서 선진국보다 크게 낮은 수익률에 만족할 제4 이동통신사업자 후보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음식점 소주, 맥주 가격이 6000원, 7000원으로 오른다는 말이 나온 뒤에는 주류업체들도 고물가를 틈타 독점적 이득을 챙기는 집단으로 지목됐다. 카르텔이라 부르지 않았을 뿐 정부가 대하는 태도는 은행, 통신사와 다름없었다. 하지만 곧바로 공장 출고가가 100원 오를 때 식당 술값이 1000원 단위로 오른다는 사실이 확인돼 정부만 머쓱해졌다. 술값을 올려 전기·가스요금 상승을 벌충하려는 식당 주인들까지 이권 카르텔로 매도할 순 없었을 것이다. 1년 8개월 전 대통령이 지목한 카르텔은 정치권력을 장악한 좌파 운동권 세력과 이들과 연계해 이권을 챙기는 집단이었다. 지금은 정부가 원하는 방향에 어긋나게 움직이는 기업, 세력에 카르텔이란 이름이 붙고 있다. 문재인 정부 때 ‘적폐’란 말이 비슷한 식으로 쓰였다. 넓어져 가는 이권 카르텔 전선에서 나오는 이상 신호에 정부는 귀를 기울여야 한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3-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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