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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박중현 논설위원입니다.

sanjuck@donga.com

취재분야

2024-03-19~2024-04-18
칼럼100%
  • 일자리 풍년, 기이한 불황[횡설수설/박중현]

    “매달 40만 개 일자리가 창출되는 지금은 경기침체가 아니다.”(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 “물가를 잡으려면 5% 이상 실업률이 5년은 이어져야 한다.”(래리 서머스 전 미 재무장관) 최근 미국 전현직 재무장관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경기침체(recession) 논쟁의 핵심 쟁점은 일자리다. 각각 조 바이든, 빌 클린턴의 민주당 정부에서 재무장관을 맡은 둘은 같은 ‘신케인스 학파’로 경제를 보는 시각이 같은데도 이 부분에선 한 치 양보 없이 대립 중이다. ▷2분기 미국의 경제성장률이 1분기에 이어 마이너스로 나타나자 논란은 더 치열해졌다. 통상 ‘2개 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률’을 경기침체로 보지만 바이든 정부와 옐런 장관은 실업률을 근거로 부인하고 있다. 미국 실업률은 지난달까지 넉 달 연속 3.6%다. 시장경제 체제에서 4% 미만 실업률은 이직 준비자의 마찰적 실업만 존재하는 완전고용 수준으로 받아들여진다. ▷미국 경기침체를 공식 판정하는 전미경제연구소(NBER)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12차례 경기침체에서 매번 실업률은 6% 이상으로 오르고 근로자 임금은 하락했다. 반면 지금은 기업이 인력 부족을 호소하고 임금이 오르는데 침체 경고음이 울리고 있다. 이 기이한 현상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고용이 충만한 경기하강(jobful downturn)’이라고 표현했다. ▷수수께끼를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해석이 나왔다. 코로나19 이후 풀린 유동성 때문에 저축, 자산가치가 늘어난 미국인이 일을 덜 한다는 설, 베이비부머들이 인생관을 바꿔 서둘러 퇴직해 근로자가 부족하다는 분석, 긴축 속도가 너무 빨라 실물경기와 시차가 생겼다는 설명 등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고용 없는 성장’의 정반대지만 ‘고용과 성장이 따로 논다’는 면에선 유사한 현상이란 해석도 있다. ▷한국도 사정이 비슷하다. 식당, 카페들은 종업원을 못 구해 영업시간을 줄이고, 알바 중개 플랫폼에는 ‘사람을 찾아 달라’는 주문만 쌓이고 있다. 중소기업 생산직, 알바 일자리는 MZ세대 눈높이에 맞지 않고, 원할 때 필요한 만큼 일할 수 있는 배달 일자리 등이 늘어난 게 원인으로 꼽힌다. 지난 정부가 만든 세금알바 등도 경기와 실업률의 괴리를 키웠다. ▷경기침체냐 아니냐, 침체 강도는 깊을까 얕을까 의견들이 분분하지만 대다수 전문가들이 동의하는 건 저성장과 일자리 호황은 동시에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점이다. 특히 자신들에게 유리한 통계를 골라 내놓으며 경제 현실을 호도해온 과거 정부들의 행태를 고려하면 일자리가 넘쳐나는 경기침체에 헛된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2-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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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박중현]칩4 동맹

    “8월까지 ‘칩4(Chip4) 동맹’ 참여 여부를 확정해 알려 달라.” 지난달 말 미국 조 바이든 정부는 한국 정부에 이런 메시지를 전달했다. 칩4는 올해 3월 미국이 한국 대만 일본에 제안한 반도체 동맹이다. 작년 초 “21세기엔 반도체가 편자의 못”이라며 중국을 뺀 반도체 공급망 재편 의지를 밝힌 바이든 대통령이 이제 마감시간을 정해 한국의 선택을 요구하고 있다. ▷칩4 동맹은 미국이 추진하는 프렌드쇼어링(friend-shoring) 전략의 산물이다. 설계 장비 생산 등 반도체 산업의 전 영역을 국경 안에 두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만큼 우방, 동맹국과 연합해 반도체 공급망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동맹이 완성되면 미국으로선 중요한 대중 견제 시스템을 확보하게 된다. ▷미국은 휴대전화, PC의 두뇌 역할을 하는 시스템반도체 분야에서 인텔 퀄컴 엔비디아 등 최고의 설계업체들을 보유하고 있다. 문제는 이들이 설계만 하고 생산은 해외 파운드리 업체에 맡긴다는 점이다. 파운드리 분야 1, 2위는 대만 TSMC(54%)와 삼성전자(16%)로 대만, 한국을 합한 비중이 80%다. 기억장치로 쓰이는 메모리 반도체에선 삼성전자, SK하이닉스의 점유율이 압도적이다. ▷설계, 생산에서 존재감이 없는 일본이 낀 이유는 장비산업의 큰손이기 때문이다. 반도체 장비 시장은 미국 어플라이드머티리얼즈와 램리서치, 일본 도쿄일렉트론, 네덜란드 ASML 등 4개 업체가 70%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이 장비 판매를 중단하면 대만, 한국 반도체 기업은 생산을 멈출 수밖에 없다. 미국 한국 대만 일본 등 4개국이 연합하면 석유업계에서 OPEC가 갖는 것 같은 영향력을 반도체 산업에서 발휘할 수 있다. ▷문제는 한국 참여 시 중국의 반발이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태를 경험한 한국 기업들로선 반도체 수출의 40%를 차지하는 중국 반응을 걱정할 수밖에 없다. 중국은 2025년까지 반도체 자립도 70%를 달성한다는 ‘반도체 굴기’를 추진하고 있는데 아직 30%에 못 미쳤다. SMIC 등 파운드리가 약진한다고 하지만 시스템반도체 점유율은 10% 수준이다. ▷대만, 일본은 이미 칩4 동맹 참여 의사를 밝혔지만 한국은 장고 중이다. 4개국이 함께 움직이면 중국도 한국만 표적 삼기 어려울 것이란 전망도 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미국의 ‘기술’과 중국의 ‘시장’ 중 하나를 굳이 골라야 한다면 기술 쪽을 선택해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시장을 잃으면 다른 데서 개척할 수 있지만 첨단기술에서 단절되면 산업 경쟁력 자체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한국 경제에 어려운 선택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2-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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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중현]‘국뽕’은 값이 비싸다

    얼마 전부터 서울 지하철이 다른 나라, 특히 일본 지하철보다 얼마나 훌륭한지 소개하는 영상을 유튜브가 추천하기 시작했다. 각국 지하철을 타본 서구 여행객들이 “한국 지하철의 쉬운 환승, 쾌적성, 저렴한 가격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사람이 다가가면 자동으로 작동해 전기를 절약하는 에스컬레이터가 놀라웠다”는 식이다. 나 자신도 몰랐던 ‘국뽕 취향’을 구글 알고리즘에 들킨 것 같아 좀 민망해진다. 교통카드 한 장으로 여러 지하철 노선과 버스를 갈아탈 수 있고, 가격도 저렴한 한국의 대중교통 시스템은 경쟁력이 높다. 운영 주체가 여럿이라 환승이 복잡하고 값도 비싼 일본, 낡아서 냉난방도 잘 안되는 미국, 유럽의 지하철과 비교하면 감탄이 나올 만하다. 문제는 이런 국뽕 콘텐츠들이 숨겨진 비용에 대해선 충분히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7년째 요금이 묶인 서울 지하철은 매년 1조 원씩 적자를 낸다. 준공영제 버스 역시 연간 수천억 원 적자다. 이런 상황이 계속될 수 없다는 걸 모두가 알지만 요금 인상, 노인 무임승차 혜택 축소 등 인기 없는 정책에 총대를 메는 정치인은 드물다. 어쩌다 방문한 외국인들은 “한국 최고”라고 칭찬하고, 유튜버들은 그런 모습을 콘텐츠로 만들어 돈을 벌지만 누적되는 적자는 결국 국민이 언젠가 세금으로 메워야 한다. 그래도 외국인의 칭찬에 유독 약한 한국인들 사이에서 국뽕 콘텐츠는 인기가 높다. 부정적 감정, 경쟁심을 느끼는 나라와 비교한 콘텐츠는 카타르시스가 배가된다. 어깨 으쓱한 기분에 그치면 다행이지만 정부의 정책이나 정치가 이런 감정에 편승하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에 불만을 품은 일본 정부가 반도체 소재 수출을 규제한 2019년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 조국 당시 법무부 장관은 ‘죽창가’를 소환했고,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겠다”는 문재인 대통령은 거북선 횟집을 찾았다. 일본 의류점 고객에게 유튜버들은 카메라를 들이댔고, 청소년들은 일본 필기구를 내버리는 영상을 올렸다. 반일감정을 자극해 ‘토착왜구’를 공격하는 건 정치적으로 손해 보지 않는 게임이었다. 이때 시작한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자립 3년의 성과는 아직 결론 내기 어렵다. 일부 품목은 국산화에 성공했지만 다른 많은 소재, 부품의 대일 의존도는 여전히 높다. 그나마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대형 고객을 놓칠 수 없었던 일본 기업들이 한국에 공장을 지은 게 다행스러운 일이다. 부랴부랴 수입처를 다변화하고, 대체품을 개발하는 데 기업들이 얼마를 썼는지는 집계된 적이 없다. 만만찮은 비용이 들었을 것이다. 윤석열 정부 들어 대상이 중국으로 급선회했다. 중국을 빼고 자유민주 진영 국가끼리 글로벌 공급망을 짜려는 미국 움직임에 한국은 적극 동참하기로 했다.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은 “중국을 통한 수출호황 시대는 끝났고, 중국을 떠나 새로운 활로를 찾아야 한다”고 한다. 대중 수출·수입 의존을 줄여야 한다는 데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쉽지 않아 문제다. 당장 식자재 가격이 오르자 ‘알몸배추 파동’ 후 줄었던 중국산 김치 수입이 사상 최대로 늘었다. 중국 폭죽 수입이 어려워지자 독립기념일 불꽃놀이 행사가 곳곳에서 취소된 미국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세계에서 일본을 우습게 아는 나라가 둘인데 중국과 한국이고, 중국을 우습게 보는 나라는 딱 하나가 있는데 그게 바로 한국’이란 말이 있다. 국민 80%가 중국에 부정적 이미지를 갖고 있어 정치적 유혹도 있을 것이다. 이런 때일수록 국뽕의 비용을 철저히 따져봐야 한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2-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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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박중현]‘주 52시간 근로’ 숨통 트기

    ‘판교 등대’ ‘구로 등대’ ‘오징어잡이 배’. 경기 성남시 분당구나 서울 구로구에 위치한 게임업체 빌딩들은 한때 이렇게 불렸다. 촉박한 게임 출시 일정을 맞추려면 밤샘근무가 예사여서 늘 새벽까지 불이 켜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18년 7월부터 단계적으로 주당 근로시간이 52시간으로 단축된 뒤 오후 7시면 건물에 불이 꺼진다. 한국 게임업체들이 한 해 내놓는 신작 게임의 수와 출시 속도도 급감했다. ▷어제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은 ‘노동시장 개혁 추진 방향’이란 제목으로 브리핑을 하면서 “주(週) 최대 52시간제의 기본 틀 속에서 운영 방법, 이행 수단을 현실에 맞게 개편하겠다”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공약인 ‘주 52시간 근무제 유연화’에 시동을 걸겠다는 신호다. 지금은 주 단위인 근로시간 규제가 노사 합의를 통해 월 단위로 바뀌고, 1∼3개월로 돼 있는 선택적 근로시간제 정산 기간도 연장될 가능성이 있다. ▷주 52시간제 운영이 유연해지면 기업들은 인력 운용에 다소 숨통이 트이게 된다. 신제품 출시를 앞두고 핵심 인력의 업무가 급증하는 반도체 등 첨단산업이나 게임 분야의 기업, 에어컨 생산·설치 등 계절성이 강한 기업들이 특히 반길 만한 변화다. 반면 소규모 게임업체 근로자들은 새로운 게임을 내놓을 때마다 회사에서 숙박하며 일하는 이른바 ‘크런치 모드’가 다시 시작되는 것 아니냐는 걱정을 하고 있다. ▷정보기술(IT), 금융 등 연봉이 높은 업계 관계자들은 정부 개혁안 중 ‘화이트칼라 이그젬프션(White-collar Exemption)’ 도입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일정 연봉 이상 전문직에게 근로시간 규제를 적용하지 않는 제도로, 미국에선 연봉 13만4004달러(약 1억7400만 원) 이상 근로자는 연장근로 시간에 제한이 없다. 네이버 직원 평균연봉은 작년 1억2915만 원에서 올해 10% 인상됐고, 카카오는 작년 1억7200만 원에서 올해 15%가 올랐다. 미국 기준으로 봐도 상당수 직원이 대상이 될 수 있다. ▷한국은 선진국 중 연간 근로시간이 제일 길어 줄일 필요가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중국 등 후발국과 경쟁도 포기할 수 없는 처지다. 중국 노동법상 법정 근로시간은 하루 8시간, 주 44시간이지만 많은 중국 기업들이 ‘996(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주 6일 근무) 문화’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기업들과 경합하려면 일이 몰릴 때 집중적으로 일하고, 나중에 그만큼 쉴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1년 단위 총 근로시간 안에서 기업과 근로자가 협의해 근무 형태를 조정하는 일본, 프랑스의 제도를 참고할 만하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2-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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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권 따라 출렁대는 4대강의 운명 [오늘과 내일/박중현]

    류우익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에게서 ‘한반도 대운하 구상’에 대해 처음 들은 건 2006년 하반기 어느 날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에게 대운하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집권 후 첫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인물이다. 그가 설명한 ‘단군 이래 최대 토목공사’의 첫인상은 ‘황당하다’는 거였다. 한강과 낙동강을 잇기 위해 조령산맥에 터널을 뚫고, 갑문과 리프트를 이용해 배가 산을 넘도록 한다는 부분이 특히 그랬다. 기술적으로 가능하다 해도 막대한 건설 비용만큼의 경제성을 확보하긴 어려워 보였다. 당시 많은 전문가들도 “부산에서 인천까지 배로 화물을 실어 나르는 게 훨씬 효과적”이란 의견을 냈다. 청계천의 성공을 발판으로 대권을 잡은 이 대통령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집권 초 대운하에 드라이브를 걸었다가 광우병 촛불시위로 지지율이 뚝 떨어진 뒤에야 포기하고 수자원 활용 중심의 ‘4대강 살리기 사업’으로 전환했다. 2009년 말 착공된 4대강 사업은 2년 만에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 바닥을 준설하고, 16개 보(洑)를 만들면서 임기 중 마무리됐다. 정권교체 같은 정권연장을 통해 취임한 박근혜 대통령은 4대강 사업을 곱게 보지 않았다. 단기간에 밀어붙인 부작용도 실제로 있었다. 건설업체 사장 출신 이 대통령의 ‘가격 후려치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동원됐던 건설업체들은 손해를 줄이려고 담합을 했다가 막대한 과징금을 물었다. 환경단체들은 보 때문에 강물이 ‘녹조 라테’가 됐다고 비판했다. 좋아한 건 ‘22조 원짜리 자전거길’을 이용하는 라이더들 정도였다. 박 정부에서 4대강은 금기어가 됐다. 박 정부 임기 3년 차인 2015년 하반기 43년 만에 최악의 가뭄이 닥치자 극적 반전이 시작됐다. 4대강 보에 모인 물이 필요해진 것이다. 국토교통부 공식 문건에 ‘4대강 활용 방안’이란 표현이 다시 등장했다. 야당 소속 지자체장도 4대강 물을 끌어 쓰자고 했다. 국토부 공무원, 관련 공기업 관계자들 사이에서 “아버지를 아버지라 못 부르는 홍길동 신세에서 이제야 벗어났다”는 말이 나왔다. 그렇게 4대 강은 복권(復權)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박 대통령 탄핵 후폭풍이 4대강에 밀려왔다. ‘4대강 재(再)자연화’를 공약한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후 보름도 안 돼 규모가 큰 6개 보의 상시 개방, 4대강 정책 결정과 집행 과정에 대한 감사원 감사를 지시했다. 4대강 사업은 청산해야 할 적폐로 낙인찍혔다. 보를 개방해 강줄기가 약해지고 강바닥이 허옇게 드러났지만 환경론자들은 모래톱에 온 왜가리, 백로 사진을 찍어 올리며 “자연이 돌아왔다”고 환호했다. 지난주 환경부 금강홍수통제소는 4년간 물을 흘려보내던 공주보의 수문을 닫아 물을 채우기 시작했다. 가뭄도 가뭄이지만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 “4대강 사업을 잘 지키겠다”고 약속했고, 6·1지방선거에서 여당 출신 세종시장이 당선됐기 때문이다. 지금 감사원은 4대강 사업이 아니라 ‘문 정부의 4대강 보 해체 결정’의 타당성을 감사하고 있다. 4대강 보가 완공된 게 11년 전이다. 그 사이 기후변화가 빠르게 진전돼 올해 전 세계는 최악의 가뭄에 시달리고 있다. 미중 신냉전 속에서 반도체를 안보의 방패로 삼은 대만은 작년에 물 부족이 심해지자 농민이 쓸 물까지 반도체 업체에 제공했다. 이렇게 강산과 세계가 급변하고 있지만 4대강을 둘러싼 논란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끝없는 돌림노래처럼 되풀이되고 있다. 이젠 이념, 진영이 아닌 과학에 판단을 맡겨 4대강의 오염을 줄이면서 모은 물을 가장 효과적으로 쓸 방법을 고민할 때도 되지 않았나.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2-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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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중현]‘문라이팅’ 말고 풀타임으로 일할 자유

    윤석열 대통령이 부친에게서 대학 입학 선물로 받아 검사가 된 뒤에도 들고 다니며 읽었다는 애독서가 밀턴 프리드먼의 ‘선택할 자유’다. 직접 고쳤다는 대통령 취임사에 ‘자유’란 말이 35번 들어간 데도 이 책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러시아에서 직업이 매력적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흔히 불법적이거나, 아니면 법규에 저촉되지 않는 ‘부업’의 기회가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모스크바에서 가구집기, 시설이 고장 날 경우 국영 수리점에 전화하면 몇 달을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부업자’를 고용하면 대개는 국영 수리점 직원일 게 뻔한 일이지만, 가구는 신속히 고쳐질 것이다.” 구소련 공산주의 계획경제의 비효율과 이중성을 꼬집은 내용인데 원문에 사용된 부업이란 단어는 ‘문라이팅(moonlighting)’, 부업하는 사람은 ‘문라이터(moonlighter)’다. 해가 떠 있는 낮에 하는 일이 본업이라면 밤에 달빛 아래서 하는 일이 부업이다. 문재인 대통령을 생각하면서 ‘월광 소나타’를 쳤다는 전 청와대 대변인을 떠올리게 만드는 표현이기도 하다. 지난 정부에서 한국의 부업인구, 복수의 직업을 가진 ‘N잡러’는 크게 늘었다. 작년 월평균 부업인구 수는 50만 명을 넘어섰다. 부업하는 걸 감추는 사람이 적지 않아 실제로는 더 많을 것이다. ‘기그(Gig) 이코노미’의 확산으로 부업이 늘어나는 건 세계적 추세지만 한국 부업인구는 노동자의 자발적 선택보다 정부 정책, 제도의 실패로 늘었다는 점이 문제다. 지난 정부 초 최저임금이 2년 만에 30% 가까이 급등하자 식당, 카페, 편의점 주인들은 주 15시간 이상 일하면 하루치를 더 얹어줘야 하는 주휴수당을 아끼려고 직원들의 근무시간을 잘게 쪼갰다. 그 바람에 한곳에서 풀타임으로 일하던 직원, 알바생들은 두세 곳 일터를 옮겨 다니는 N잡러가 됐다. 주 15시간 미만 초단기 근로자 수가 올해 4월 역대 최대인 154만 명으로 불어난 이유다. 경직적 주 52시간제가 중소기업에 적용되자 초과근무 수당이 줄어든 근로자들은 부업을 찾아 나서고 있다. 코로나19로 영업시간이 제한된 동안에는 자영업자 사장들도 생계유지를 위해 택배, 음식배달 오토바이를 몰아야 했다. 본업만으로 원하는 소득을 얻을 기회가 제도적으로 제한되면서 구소련에서 그랬듯 부업이 생계유지의 중요한 수단이 된 것이다. 프리드먼은 자본주의 사회가 반드시 지켜내야 할 본질적 경제적 자유로 ‘자기 소득을 어떻게 쓸지 선택할 자유’, ‘재산을 소유할 자유’와 함께 ‘자기가 소유한 자원을 가치관에 따라 사용할 자유’를 꼽았다. 신체, 두뇌가 유일한 자원인 노동자에게 원하는 만큼 일할 수 있는 자유는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다. 윤 대통령은 지난달 국회 시정연설에서 ‘글로벌 스탠더드에 부합하는 노동개혁’을 강조했다. 그런 기준으로 볼 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한국, 터키에만 남아 있는 주휴수당은 가장 먼저 없어져야 할 뒤떨어진 제도다. 주 52시간제와 관련해 한국처럼 월 단위로 근로시간 제한을 맞추도록 하는 선진국도 거의 없다. 임금을 많이 받는 전문직 노동자는 근로시간 규제 대상에서 제외하는 게 세계적인 트렌드다. 대통령선거, 지방선거로 이어지던 정치의 계절은 끝났다. 코로나19도 진정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이제 새 정부는 대선을 통해 약속한 노동개혁에 본격적으로 나서야 한다. 조각난 일자리, N잡러를 양산한 각종 제도를 손봐 국민에게 마음껏 일할 자유를 돌려주는 게 그중 제일 급한 일이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2-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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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중현]성공하고도 실패한 文의 ‘주류세력 교체’

    몇 주간 우리 사회는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특이한 정권 교체를 경험했다. 후임 하는 일이 마뜩지 않다고 퇴임할 대통령이 불편한 감정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내비친 적은 없었다. 5년 만에 정권이 교체되면 자존심 때문에라도 덕담하고 떠나는 게 정상인데 문재인 전 대통령은 그러지 않았다. 그 대신 “다음 정부는 우리 정부의 성과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다시피 하는 가운데 출범하게 돼 우리 정부의 성과, 실적, 지표와 비교를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어디 잘되나 보자’는 앙심이 느껴진다. 그래서 퇴임하는 날 청와대 앞에 모인 지지자들에게 “다시 출마 할까요”라고 한 말도 단순한 농담같이 들리지 않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문 전 대통령의 캐릭터 탓으로 돌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되기 전인 2017년 1월 펴낸 책 ‘대한민국이 묻는다’에서 이유를 찾는 게 설득력이 있을 것 같다. 이 책에서 그는 “가장 강렬하게 하고 싶은 말은 우리 정치의 주류세력들을 교체해야 한다는 역사적 당위성”이라고 썼다. 주류 교체 의지는 취임 후 곧바로 실행에 옮겨졌다. 전직 대통령 둘을 감옥에 보냈고, 비주류였던 김명수 대법원장을 필두로 사법부 주류도 싹 바꿨다. 2020년 4·15총선에선 팬데믹으로 인한 ‘국기 결집 효과’와 재난지원금의 힘을 빌려 180석 거대여당을 키워냈다. “한국 사회의 주류가 산업화 세력에서 민주화 세력으로 완전히 교체됐다”는 평가가 나왔다. 윤석열 검찰총장이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수사한 뒤에는 검찰 수뇌부까지 바꿨다. 권력 핵심부만 교체된 게 아니다. 실패한 경제정책으로 혹평받는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 세금 일자리 등은 지지세력 확장에 효과가 있었다. 최저임금 선상에 몰려 있던 20대 직장인들은 따로 임금협상을 안 해도 연봉이 5년간 40% 넘게 올랐다. 그중엔 여성이 많다. 20대 여성 58%가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를 찍은 게 국민의힘의 반(反)페미니즘 때문만은 아니었다. 세금 일자리로 생계에 도움을 받는 노인도 수십만 명이다. 포퓰리즘 정책은 수많은 이해 관계자를 만들었다. 문 전 대통령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나는 5년 만에 주류세력 교체와 지지층 확장에 모두 성공한 대통령’이라고. 마지막 주까지 유지된 40%대 지지율이 그런 생각을 뒷받침했을 것이다. 정권 교체의 책임을 묻는 질문에 “저는 한 번도 링 위에 올라가 본 적 없다”고 답한 데에서 ‘대선에서 진 건 내가 아니다’라는 속내가 엿보인다. 그가 뭐라고 생각하든 ‘문재인의 주류세력 교체’는 결국 실패로 끝났다. 바로 그 주류에게 칼을 들이댔다가 고초를 겪고 물러난 검찰총장이 대통령이 됐다. 주류 교체를 목표로 폈던 편 가르기 정치, 정책들은 더 많은 국민들에게 환멸을 줬다. 지지세력만 바라본 규제 일변도 부동산 정책, 성장률을 깎아먹은 ‘소득주도 성장’은 ‘경제에 무능한 좌파’ 이미지를 강화했다. 문 전 대통령이 애지중지 키운 주류가 이젠 교체의 대상이다. 그들의 적폐를 새 정부가 낱낱이 파헤치길 바라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거대 야당은 다음 총선까지 최소 2년간 국회를 쥐락펴락할 기세고,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 이후 임기가 1년 이상 남은 공공기관장 257명은 바꿀 수도 없다. 정권 말 밀어붙인 ‘검수완박’은 자신들에게 손댈 생각도 말라는 뜻이다. 차라리 다행스러운 일이란 생각도 든다. 대통령이 작심하고 사회의 주류를 바꾸겠다고 나설 때 국민이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는지, 그 끝은 또 얼마나 허망한지 이미 충분히 경험하지 않았나.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2-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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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쁜 엔低, 나쁜 원低 [횡설수설/박중현]

    한국과 일본의 화폐 가치가 요즘 경쟁하듯 하락하고 있다. 지난주 금요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1255.9원으로 2년여 만의 최고 수준이었다. 같은 날 도쿄 외환시장의 엔-달러 환율은 20년 만의 최고인 131엔으로 상승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이달 기준금리를 올릴 것이란 전망에 달러화가 강세를 보이면서 원화, 엔화 가치가 나란히 시험대에 올랐다. ▷지금의 ‘엔저’는 아베 신조 전 총리의 경제 정책인 ‘아베노믹스’의 연장선에 있다. 2013년 아베 전 총리의 지명을 받아 취임한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는 디플레이션 극복을 명분으로 마이너스 금리, 무제한 돈 풀기 정책을 10년째 유지하고 있다. 낮은 엔화 가치로 일본 수출 기업들의 가격 경쟁력을 높여 경제를 살리는 게 목적이다. ▷문제는 일본의 생산시설이 이미 해외로 대거 빠져나갔다는 점이다. 일본 자동차 기업 차량의 3분의 2가 해외에서 생산된다. 엔저의 수출 확대 효과가 크게 줄었다. 반면 천연가스, 원자재 등 수입 가격 인상 부담은 엔저로 배가되고 있다. 기대한 효과 대신 무역수지가 적자로 돌아서고, 수입품 값이 올라 일본 소비자만 가난해진다는 게 ‘나쁜 엔저’ 논란의 핵심이다. ▷엔저와 달리 ‘원저’는 한국 정부가 의도한 게 아니다. 달러 강세와 중국의 성장률 하락이 겹치면서 위안화를 따라 원화가 급락했다. 원저를 이용한 수출 확대로 1997년 외환위기를 극복했을 정도로 과거엔 원저가 수출에 호재였다. 지금은 경쟁국인 중국 대만 일본의 화폐 가치가 동시 하락해 수출 증대 효과가 희석되고 있다. 증시에서도 환차손을 피하려는 외국인들의 ‘셀 코리아’가 나타나고 있다. ▷원유,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3, 4월 연속 무역수지 적자가 나면서 한국도 ‘나쁜 원저’를 고민해야 할 처지다. 작년 100대 기업의 해외법인 매출이 국내 매출과 맞먹을 정도로 한국 기업의 생산시설도 이미 해외로 많이 이전돼 수출 증대 효과가 줄었다. 미국, 유럽연합(EU)이 ‘자국 내 생산’을 강조하면서 반도체, 배터리 분야 신규 투자도 대부분 해외에서 이뤄진다. ▷일본은행은 최근 마이너스 금리를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사실 방향을 바꾸기도 어렵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이 256%로 금리를 올리면 정부 이자 부담이 폭증해 엔화 가치가 더 떨어질 수 있다. 재정 사정이 일본보다 나은 한국은 금리를 올려 원화 가치를 지킬 수 있지만 막대한 가계부채 탓에 경기 침체가 우려된다. 서둘러 초격차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하면 한국 경제도 일본의 뒤를 이어 더 깊은 함정에 빠지게 된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2-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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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박중현]단순 노무직 찾는 청년들

    일본의 싱어송라이터 나가쿠보 도루(長久保徹)가 1985년 자신의 노래에 사용한 ‘프리아르바이터(free+arbeiter)’란 말은 “취직의 틀에서 벗어났어도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계속 노력하는 사람”이란 뜻이었다. 2년 뒤 취업정보업체 리크루트가 이 말을 줄인 ‘프리터’를 ‘원할 때 필요한 만큼 일하는 청년’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기 시작했다. 일본 경제의 버블이 한창이어서 짧게 일하고도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던 시절이었다. ▷동아일보 취재팀 분석에 따르면 작년 한국의 15∼29세 청년 취업자 중 배달 판매 경비 등 ‘단순 노무직’으로 일하는 청년의 수가 41만3000명이었다. 40만 명이 넘은 건 처음이고 전년 대비 증가율도 11.3%로 전체 청년 취업자 증가율 3.0%보다 훨씬 높았다. 양질의 일자리 취업이 어려워 비숙련 단기 일자리에 머물러 있는 프리터족(族)이 많아졌다는 뜻이다. ▷같은 단순 노무직이라도 용돈 벌려고 일하는 것과 생계를 유지하려고 일하는 건 다르다. 일본의 프리터도 경기가 좋던 시절 취직을 거부하고 파트타임으로 일하며 높은 임금을 챙긴 1980년대 ‘거품기(期) 프리터’와 버블이 꺼진 1990년대 이후 취업이 안 돼 저임금을 받으며 생활비를 번 ‘빙하기 프리터’로 나뉜다. 지금 단순 노무직으로 일하는 한국 청년들은 마음에 차는 직장을 찾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일하는 경향이 강하다. ▷청년의 단순 노무직 증가는 코로나19 이후 음식배달, 택배 등 배달 일거리가 급증한 영향이 크다. 유통, 배달업체들이 적자까지 봐가며 배달 속도 경쟁을 벌이는 바람에 배달비가 건당 최대 1만 원까지 치솟아 배달 일만 해도 돈을 웬만큼 버는 청년이 늘어났다. 문재인 정부 5년간 41.6%나 오른 최저임금도 한몫했다. ▷대학진학률 70%가 넘는 한국 청년들의 ‘하향 취업’은 생산연령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한 한국 사회에 큰 손실이다. 20, 30대에 전문성과 숙련도를 높일 기회를 놓치면 나이 들어 청년층, 외국인 노동자와 질 낮은 일자리를 놓고 다투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일본에선 청년기에 프리터로 살다가 40, 50대에 부모 연금에 의지하는 ‘기생형 싱글’이 사회 문제다. ▷다행히 전문 기술을 쌓기 위해 전문대에 ‘유턴 입학’하는 대학 졸업자들이 늘고, 미취업 청년 대상으로 삼성이 진행하는 소프트웨어 교육에도 지원자가 몰린다. “평생 알바 하며 사는 게 낫지 않나”라는 청년들의 말은 아직까지 취업난에 지쳐서 하는 푸념에 가깝다. 이들이 탈진하기 전에 괜찮은 일자리를 더 만들고, 교육 과정도 손봐야 한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2-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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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중현]대한민국 포퓰리즘史 3대 장면

    #1. “40%의 근거가 뭡니까?” 2019년 4월 16일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앞으로도 국가채무비율 40% 선을 유지하겠다”고 보고하던 홍남기 경제부총리에게 문재인 대통령은 이런 질문을 던졌다. 누가 봐도 돈을 더 쓰기 위해 나랏빚을 늘리자는 주문이었다. 건국 이후 지켜지던 ‘재정은 국가경제 최후의 보루’라는 정부 재정운영 철학이 이 질문 하나로 무력화됐다. #2. “국민들에게 힘과 위로를 드리기 위해 헌정사상 처음으로 긴급재난지원금 지급을 결정했습니다.” 문 대통령은 21대 국회의원 선거 하루 전인 2020년 4월 14일 국무회의에서 이렇게 밝혔다.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 두기가 시작된 지 3주 만에 소득하위 70% 국민에게 돈을 나눠주기로 한 것이다. 선거는 더불어민주당의 완승으로 끝났고, 나중에 대상이 전 국민으로 확대돼 4인 가족 기준 100만 원씩 지원금을 받았다. #3. “새 정부 출범 100일 동안 50조 원을 투입해 정부의 영업제한으로 인한 피해를 보상하겠습니다.” 작년 11월 8일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이렇게 약속했다. 이 밖에도 병사 월급 200만 원, 기초연금 10만 원 인상 등 공약 이행에 5년간 266조 원을 쓰겠다고 했다. 취임을 19일 앞둔 지금까지 재원 마련 방안은 나오지 않았다. 최빈국에서 시작해 70여 년 만에 선진국 문턱을 넘었던 한국 경제의 쇠락 원인을 찾아 누군가 나중에 ‘대한민국 포퓰리즘의 역사’를 쓴다면 반드시 포함될 3개 장면이다. 한국은 후발국 중 드물게 큰 재정위기를 겪지 않았던 나라다. 좌파든, 우파든 역대 정부는 “국민이 원하는 건 다 주라”던 그리스 파판드레우 정부처럼 결정적 레드라인을 넘지 않았고, 포퓰리즘 정부란 비판은 모욕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랬던 한국이 3년 만에 확 달라졌다. 첫 장면의 주인공으로 꼽히는 게 문 대통령으로선 억울할 수도 있겠다. 복지 확대 약속에 쓸 돈은 부족한데 공무원들이 다른 선진국보다 낮은 40% 국가채무비율을 고집하는 게 답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40%를 “재정건전성의 마지노선”이라며 박근혜 정부를 비판한 건 4년 전 그 자신이었다. 무릇 역사에는 고정관념을 깨고 흐름을 바꾼 인물이 기록되는 법이다. 그가 물길을 안 텄다면 작년 말 대선을 치르던 이재명 민주당 후보가 “국가채무비율 100%가 넘으면 문제가 생기나”라고 당당히 주장할 수 있었겠나. 1차 재난지원금 지급 결정은 과단성 면에서 포퓰리즘사에 오래 남을 장면이다. 100년 만의 팬데믹이 문 대통령의 ‘헌정사상 최초’ 결정을 거들었다. 10조 원 넘는 돈을 선거 전날 국민에게 나눠주기로 결정한 이 시점을 시작으로 선거만 있으면 적자국채를 발행해서라도 추가경정예산을 짜는 게 관행이 돼 가고 있다. 윤 당선인의 ‘50조 원 공약’은 포퓰리즘 경쟁에서 늘 손해 보던 우파가 작심하고 공세로 돌아서 좌우 구분 없는 포퓰리즘의 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기초연금’ 공약으로 박근혜 정부 출범에 기여했던 김종인 전 국민의힘 총괄선거대책위원장의 손길이 느껴지긴 해도 결국 공약은 윤 당선인 것이다. “앞으로도 포퓰리즘 하겠다”고 장담하는 후보와 경합하면서 이 공약이 없었다면 0.73%포인트 차이 승리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포퓰리즘의 신기원을 열었던 이재명 후보의 공약들이 선거 패배로 미수(未遂)에 그친 반면 윤 당선인 공약은 역사에 남는다. 그의 공약이 선거용 ‘할리우드 액션’이길 기대하며 표를 던진 유권자들은 이 장면이 미완(未完)의 역사로 남길 바라고 있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2-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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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박중현]영리병원

    20년 전 김대중 정부는 각종 규제를 대폭 풀어주는 경제자유구역을 지정하고, 이곳에 외국인이 투자하는 ‘영리병원’의 설립을 허용한다고 발표했다. 한국의 의료법은 의사 개인과 비영리 법인만 병원을 세울 수 있도록 허용하는데 경제자유구역 등에는 해외자본이 50% 이상 투자해 수익을 내는 병원을 세울 수 있게 한다는 것이었다. 중국인 등 외국인 환자, 해외 의료쇼핑을 다니는 한국의 고소득층이 이곳에서 돈을 쓰게 만든다는 구상이었다. ▷하지만 곧바로 의사 단체의 반발에 부딪혔다. “영리병원을 허용하면 공공 의료체계가 무너지고 서민 의료비 부담이 커진다”는 주장이었다. 이런 반대 때문에 10년이 지난 뒤에야 세부 시행규칙이 정비되고 공식 명칭도 ‘투자개방형 병원’으로 바뀌었다. 당시 정부 관계자는 “한국 건강보험은 적용이 안 되지만 내국인을 치료하지 못한다는 규정은 없다”고 했다. ▷2017년 중국계 뤼디(綠地)그룹이 설립허가를 신청한 제주 서귀포시 녹지국제병원은 ‘국내 1호 영리병원’이 될 예정이었다. 지역 여론의 반대가 있었지만 제주도는 국제 관광지로서의 위상 등을 고려해 ‘외국인만 진료한다’는 조건을 걸어 승인했다. 원래 계획과 달리 한국인 환자를 못 받게 된 병원 측은 이런 제한을 취소해 달라는 소송을 제기하며 개원을 늦췄다. 석 달이 지나도 병원이 문을 열지 않자 제주도는 2019년 허가를 취소했다. ▷제주지방법원이 이달 5일 내국인 진료 제한 취소소송 1심 판결을 내놨는데 병원 측이 이겼다. “진료 대상을 제한할 근거가 없다”는 이유였다. 따로 제기된 병원 허가취소 무효화 소송도 올해 1월 병원이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다. 다만 모든 소송을 병원 측이 이겨도 영리병원이 문을 열긴 어렵다. 이미 지분 대부분을 한국 기업에 팔았기 때문이다. ‘1호 영리병원’ 등장까지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최초 작명에 문제가 있었다는 지적도 있다. 동네의원, 종합병원도 돈 버는 건 마찬가진데 ‘영리’라는 말 때문에 ‘의료를 돈벌이 수단으로 본다’는 비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아픈 것도 서러운데 돈 많은 사람만 좋은 치료를 받는 건 참을 수 없다’는 정서도 걸림돌이다. ▷대다수 선진국에선 값이 싸지만 서비스 수준이 낮은 공공의료와 별도로 비싼 비용을 내야 하지만 고급 서비스를 제공하는 영리병원이 공존한다. 병원에 대한 투자가 늘면 의사의 보수가 올라 낮은 건강보험 수가 때문에 나타나는 ‘내외산소(내과·외과·산부인과·소아과)’ 기피 현상을 줄일 수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인 한국 의사와 자본이 연결되면 ‘아시아 의료허브’의 실현이나 고급 일자리 창출을 기대할 수 있다. 언제까지 피하기만 할 문제가 아니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2-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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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중현]성공한 한국은행 총재 만들기

    “아무래도 잠재성장률이 5%가 안 되는 거 같아요. 그래서 직원들 시켜서 시스템을 다시 돌리고 있어요.” 2003년 9월 그의 사무실에서 만난 당시 한국은행 조사국장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전임 김대중 정부가 경기 부양을 위해 신용카드 발급 기준을 지나치게 완화한 탓에 신용불량자가 폭증하는 ‘신용카드 사태’가 시작되고, 외환위기 이후 눌려 있던 노사분규까지 폭발하고 있었다. “잠재성장률을 7%로 끌어올리고, 10년 안에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를 열겠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성장 공약은 첫해부터 삐걱거렸다. 물가 상승을 유발하지 않고 한 나라 경제가 성장할 수 있는 한계가 잠재성장률이다. 지금은 2% 안팎 잠재성장률에 익숙해졌지만, 1998년 외환위기로 마이너스 성장을 했다가 이듬해 11.5% 플러스로 돌아서 고속성장을 계속하던 당시 ‘5% 붕괴’는 경제의 기초체력에 큰 탈이 났다는 뜻이었다. 며칠 후 익명의 ‘한은 고위 관계자’를 인용해 ‘잠재성장률 4%대 예고…한국 저성장 시대 진입’이란 제목의 1면 톱, 3면 전면 기사를 썼다. 비판적 보도에 대한 정권의 반응이 날로 과격해지던 시절이었다. 신문이 배달되자 한은에선 큰 소동이 벌어졌다. “사실무근이다. 한은 관계자 중 그런 말을 한 사람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는 자료가 기자실에 배포됐다. ‘정권 실세’ 청와대 관계자가 한은 부총재에게 전화해 “당장 부인 보도 자료를 내고 발설자를 색출하라”고 주문했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다. 그래도 기자가 입을 열지 않는 한 취재원을 찾아낼 순 없었다. 박승 총재 등 당시 한은 수뇌부도 적발되면 인사 등에서 불이익을 당할 게 뻔한데 국가 경제를 걱정했다는 이유로 발언자를 찾아낼 의지는 없었을 것이다. 석 달 후 한은은 ‘한국 경제의 장기 성장기반 확충을 위한 과제’란 제목의 보고서를 슬그머니 내놨다. “2000∼2003년 잠재성장률은 4.8%로 추정된다”는 내용이 한 줄 들어 있었다. 그해 한국은 3.1% 성장했다.11년이 지난 2014년 박근혜 정부 2년 차에 한은 총재에 취임한 이주열 ‘전 조사국장’을 만났다. “총재가 되기까지 두 번 큰 위기를 겪었는데, 그중 한 번이 당신이 쓴 기사”라고 말해 같이 웃었다. 그는 문재인 정부에서 연임됐다. ‘소득주도 성장론자’를 요직에 대거 중용한 현 정부도 중앙은행 총재까지 실력이 검증되지 않은 비주류로 바꿀 자신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의 임기 8년이 편치만은 않았다. 우파, 좌파 가리지 않고 경제가 어려워질 때마다 집권 세력은 한은에 무리한 주문을 했다. 세월호 사고 후 침체된 경기를 끌어올리려고 박근혜 정부는 한은에 금리 인하를 압박했다. 현 정부 여당 국회의원들은 재정을 퍼 쓰는 것도 모자라 한은이 국채를 인수해 돈을 더 찍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흔들리는 듯한 순간도 있었지만 미국의 긴축에 앞서 작년 8월부터 금리를 올리는 등 ‘인플레 파이터’로서 본분을 지켜냈다. 오늘로 이 총재의 임기가 끝난다. 후임은 공석이다. 신구 권력의 인사권 기 싸움 끝에 이창용 전 국제통화기금(IMF) 아시아태평양 담당국장이 후보로 지명됐지만 인사청문회 문턱을 넘어야 한다. 이견이 별로 없는 준비된 총재감인데도 정치적 부담을 지고 출발해야 하는 게 안타깝다. 스태그플레이션 우려는 커지고, 몇 년 뒤 잠재성장률 1%대가 무너질 것이란 우울한 전망이 나온다. 미국의 대공황, 일본 경제의 ‘잃어버린 30년’에는 중앙은행의 실패한 통화정책이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은의 신임 수장이 반드시 성공한 총재가 돼야 하는 이유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2-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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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박중현]현대차 중고차 판매 허용

    미국 온라인 중고차 판매업체 카바나는 2015년 11월 테네시주 내슈빌에서 5층 빌딩 크기의 ‘자동차 자판기’를 공개했다. 인터넷에서 중고차의 3차원 영상, 수리 내용 등을 보고 차를 고른 고객은 이곳에 찾아와 자기 이름이 새겨진 동전을 발급받는다. 동전을 투입구에 넣으면 투명 빌딩 안에 주차된 차를 로봇 팔이 꺼내준다. 7일 이내 반품도 가능하다. 코로나19로 중고차를 살 때도 대면거래를 꺼리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카바나는 ‘중고차 업계의 아마존’으로 각광받고 있다. ▷이렇게 중고차를 온라인으로 사고팔려면 판매자를 믿을 수 있어야 하는데 한국 소비자들의 중고차 시장에 대한 신뢰는 낮다. 중소벤처기업부가 최근 중고자동차판매업을 ‘생계형 적합 업종’에 포함시키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됐다. 현대자동차, 기아, 한국지엠, 르노코리아, 쌍용차 등 완성차 업체들의 중고차 시장 진입 기회가 열린 것이다. 업체 대부분이 6개월 안에 ‘인증 중고차’ 사업에 나설 예정이다. ▷벤츠 BMW 테슬라 등 수입차 업체들은 이미 국내에서 인증 중고차 사업을 벌여 왔다. 신차 구매 고객이 이전에 타던 자사 중고차를 적절한 가격에 보상해 주고, 중고차는 수리해 보증을 붙여 판매한다. 신차 고객은 부담이 줄어 좋고, 중고 수입차를 원하는 고객은 안전한 차를 탈 수 있다. 국내 완성차 업체들은 중고차 업계의 반발에 밀려 역차별을 받아 왔다. ▷소비자단체들은 완성차업체의 중고차 시장 참여를 환영하고 있다. 일부 양심적이지 못한 중소업체들이 미끼, 허위 매물을 인터넷에 올려놓고 이를 보고 찾아온 고객에게 비싸고, 품질 낮은 중고차를 파는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년 5월에는 중고차 매매 사기단에 속아 할부로 트럭을 샀다가 빚을 감당하지 못한 60대가 극단적 선택을 하는 일도 있었다. ▷현대차는 첫 구입 후 5년, 주행거리 10만 km 미만이면서 품질 테스트를 통과한 자사 차량만 거래하고, 중소업체와의 상생을 위해 시장점유율도 2024년까지 전체의 5.1%를 넘기지 않을 방침이다. 작년 한국의 중고차 거래 대수는 387만2000대로 신차 판매 대수의 2.2배다. 완성차 업체의 진입으로 소비자의 신뢰가 높아지면 시장 규모는 더욱 커질 것이다. ▷3년 전 나왔어야 할 정부의 결정이 늦어지면서 중고차 시장 발전이 지체됐다는 비판도 나온다. 대기업에 밀려 고사할 것이란 중고차업계의 주장에 정부가 너무 눈치를 봤다는 것이다. 상생만큼 중요한 게 소비자의 편익이다. 카바나처럼 새로운 아이디어, 판매방식으로 도전하는 ‘중고차 벤처’의 등장을 지원하고 격려하는 게 정부가 할 일이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2-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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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은 총재 지명[횡설수설/박중현]

    독립된 중앙은행은 수많은 호황과 불황을 겪은 자본주의 체제가 경기 급등락을 줄이기 위해 고안한 발명품이다. 정부와 정치권은 흔히 낮은 금리를 통해 경기를 더 띄우고 싶어 하지만 ‘파티의 흥을 깨는 사람’에 비유되는 중앙은행은 물가 인상 가능성이 보이면 금리를 올릴 준비부터 하기 때문에 긴장관계가 불가피하다. 제롬 파월 미 연방준비제도 의장은 전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파격적 금리 인하를 기대하고 임명한 ‘비둘기파’지만 조 바이든 정부에선 인플레이션에 맞서 긴축을 추진하는 ‘매파’로 변신하고 있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70) 임기가 이달 31일 끝난다. 이 총재는 코로나19 사태 발생 직후인 재작년 3월 기준금리를 한꺼번에 0.5%포인트 내려 경기 하강 속도를 늦추고, 미국 금리 인상에 앞서 작년 8월부터 금리를 올려 상황에 대처해 왔다. 한은 설립 이후 최장기(43년) 근속자, 박근혜 정부 때 취임해 문재인 정부에서 연임된 44년 만의 8년 연임 총재 기록도 세웠다. 다만 급등한 집값을 잡는 데 금리라는 ‘소 잡는 칼’을 지원했다는 비판도 있다. ▷이 총재는 올해 말까지 기준금리가 1.75∼2.00%로 오를 것이라는 시장의 기대에 무게를 실으며 향후 2, 3번 정도 금리를 더 올릴 것이라고 예고한 상태다. 하지만 차기 총재가 임명된 뒤 이 같은 예고가 그대로 실현될지는 미지수다. 급등하는 물가를 잡기 위한 금리 인상은 불가피하지만 고유가 고환율에 우크라이나 사태가 겹친 복합 위기를 감안하면 통화당국은 말 한마디가 조심스러운 상황이다. ▷더 큰 문제는 정권 교체와 맞물려 통화정책 수장 자리에 공백이 생길 수 있다는 점이다. 차기 한은 총재 4년 임기 대부분은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과 겹친다. 문 정부가 지명권을 고집할 경우 마찰이 발생해 차기 총재 인선과 취임이 크게 늦어질 수 있다. 다행히 윤 당선인이 후보를 제안하고, 현 청와대가 인사 검증과 국회 인사청문회 절차를 대행해 문 대통령이 지명하는 식으로 공백을 최대한 줄이자는 말이 나오고 있다고 한다. ▷긴박한 경제 안팎 사정을 고려할 때 차기 한은 총재에겐 어느 때보다 탁월한 식견과 실력이 요구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국제유가, 원자재 가격이 급등해 무역수지, 성장률 전망이 흔들리고, 미국 금리 인상을 앞두고 원-달러 환율이 급등하는 등 대외 환경과 국내 경제가 긴밀히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 작년 말 종료된 한미 통화스와프를 재개하려면 탄탄한 국제 네트워크도 필요하고, 정부의 포퓰리즘 요구를 견제할 강단도 필요하다. 현 정부든, 차기 정부든 ‘자기 사람 챙기기’ 같은 사심(私心)을 끼워 넣으면 곤란하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2-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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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박중현]경제정책 작명

    Y노믹스, 윤노믹스, SY노믹스, 윤석열노믹스….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가 20대 대통령에 당선되자 그가 추진할 경제정책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아직 차기 정부 정책의 전체적인 윤곽이 드러나지 않아 공식화된 이름도 없지만 세간에선 예전 작명법에 준해 다양한 이름을 만들어 붙이기 시작했다. ▷국가 수장의 성(姓), 이니셜에 이코노믹스(경제학)를 결합한 ‘∼노믹스’의 원조는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다. 레이건 정부는 2차 오일쇼크로 침체에 빠진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정부 역할을 축소하고, 세금을 낮추는 레이거노믹스를 1980년대에 추진했다. 조 바이든 정부는 반도체, 배터리 등 첨단제품을 자국 내에서 생산하도록 유도하고, 사회간접자본(SOC) 투자를 대폭 늘리는 바이드노믹스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일본에선 아베 신조 총리 때 아베노믹스부터 총리 이름을 경제정책 작명에 쓰기 시작했다. ▷한국에선 김대중 정부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을 강조하며 사용한 DJ노믹스가 처음이다. 노무현 정부는 7% 성장론, 균형발전 등이 담긴 노(盧)노믹스, 이명박 정부는 세금 인하와 규제 완화를 핵심으로 한 MB노믹스를 추진했다. 지하경제 양성화 및 재정·세제 구조조정을 통한 복지 확대를 추진한 박근혜 정부의 정책은 근혜노믹스 또는 박근혜노믹스로 불렸다. 하지만 출범 이듬해 세월호 참사 후 경기가 가라앉자 최경환 경제부총리 주도의 종합 경기부양책이 나왔고, 그때부터 초이노믹스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경제정책은 임기 초 J노믹스로 명명됐다. 최저임금 인상, 주 52시간제 확대 등으로 근로자 소득을 높여 경제를 키운다는 소득주도성장이 핵심이다. J노믹스란 이름은 현 정부 첫 대통령경제보좌관을 지낸 김현철 서울대 국제경제학부 교수가 제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J’는 대통령 이름 첫 자의 이니셜일 뿐 아니라 글자 모양처럼 처음엔 잠깐 경제가 주저앉더라도 잠시 뒤 빠르게 우상향하며 살아날 것이란 기대가 담긴 작명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윤 당선인은 감명 깊게 읽은 책으로 미국 신자유주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의 ‘선택할 자유’를 꼽을 만큼 자유시장 경제를 강조해 왔다. 하지만 그의 공약 대부분은 실패한 현 정부 부동산, 일자리, 탈원전 정책에 대한 반작용 성격이 강하다. 경쟁적으로 쏟아낸 포퓰리즘 공약까지 뒤섞여 전체를 관통하는 철학과 비전이 아직 뚜렷하지 않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전문가 의견을 반영해 걸러낼 건 걸러내고, 더할 건 더해 전체 그림을 완성한 뒤 작명을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2-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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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중현]‘정치 손해’ 감수하는 리더가 ‘경제 미래’ 연다

    “다음 어느 쪽이 정권을 잡아도 안 할 것 같았다. 정치적 손해가 가는 일을 할 수 있는 대통령은 나밖에 없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6년 1월 신년 기자회견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추진을 선언한 뒤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실제로 14개월간 이어진 한미 FTA 협상 과정에서 노동계, 농민의 반대시위가 이어졌고 반미(反美) 성향 지지층이 이탈했다. 2007년 12·19대선에서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가 당선되고 5일 후 열린 청와대 회의에 참석한 경제부처 장관들은 “우리 정부가 시작한 일이니 쇠고기 수입 문제까지 털고 가자”고 주장했다. 그해 초 광우병과 관련해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한국이 엄격한 기준을 들이대자 미국이 반발하면서 한미 FTA 협상은 결렬 위기를 맞았다. 3월 노 대통령이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에게 전화해 문제 해결을 약속하고 4월에 협상이 타결된 만큼 그 약속을 지키자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그날 회의의 결론은 ‘쇠고기 문제는 차기 정부로 넘긴다’는 것이었다. 노 대통령은 “당신들은 피도 눈물도 없습니까. 나를 여기서 더 밟고 가려고 합니까”라며 감정이 격해져 눈물까지 내비쳤다고 회의 참석자들은 전한다. 정치적 손해를 감수하기로 마음 먹었어도 막상 정권이 교체되자 노 대통령 마음이 흔들렸던 것 같다. 결국 광우병 쇠고기 문제는 이명박 정부의 최대 정치 리스크가 됐다. 이 대통령은 한미 FTA 비준을 앞당기기 위해 미국산 쇠고기 수입 개방을 결정했다가 취임한 지 몇 달도 안 돼 광화문 촛불시위에 직면했다. 청와대 뒷산에 올라 촛불들을 바라보며 이 대통령도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곧이어 닥친 글로벌 금융위기, 한미 FTA에 부정적인 오바마 정부의 태도 때문에 지연되다가 결국 임기를 1년여 남긴 2011년 말 한나라당이 국회 비준동의안을 단독 처리해 이듬해 3월 15일 발효됐다. 다음 주 발효 10주년을 맞는 한미 FTA의 성적표는 흠잡을 데가 없다. 한국의 대미(對美) 수출액은 10년 전보다 70% 늘었고, 이 기간 대미 연평균 수출액 증가율은 6%로 전체 수출액의 3배 속도였다. 자동차, 반도체 수출이 급증했고 원유 수입은 늘었다. 최대 걸림돌이던 농축수산물은 수입이 30% 증가하는 동안 수출이 82%나 급증했다. 미국산 쇠고기는 작년 수입 쇠고기 중 55%로 광우병 공포는 한국인의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졌다. 노무현이 판을 깔고 이명박이 마무리한 한미 FTA의 과실은 뒤이은 정부들이 거뒀다. 너무 좋은 성과 때문에 탈까지 났다. 미국 쪽의 큰 무역적자를 문제 삼은 트럼프 정부는 한미 FTA를 깰 것처럼 하면서 개정을 요구했다. 2012년 대선 때 ‘한미 FTA 재협상’을 공약했던 문재인 대통령은 미국 자동차 수입 등에서 일부 양보하면서까지 FTA를 지키기 위해 진땀을 흘려야 했다. ‘세계 10대 경제 강국’은 이렇게 좌파, 우파 정부의 정치적 수난을 거름 삼아 만들어졌다. 하지만 10년 번영의 주춧돌이 됐던 ‘FTA 선도국가’ 한국의 위상은 요즘 흔들리고 있다. 미중 경제패권 전쟁, 강대국의 자국 이기주의로 인한 신(新)냉전 속에서 한국은 어느 편에 설지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국내적으론 노동, 규제, 연금 개혁 등 경제의 미래를 좌우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20대 대통령 당선인이 해결해야 할 문제 중 어느 하나 녹록한 게 없다. 그렇더라도 노무현, 이명박 대통령이 그랬듯 미래를 향해 발을 내디뎌야 한다. 정치적 손해, 때로는 눈물까지 감수해야 하더라도.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2-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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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중현]대선후보 배우자가 ‘웨이터’를 대하는 태도

    경험 많은 미국 기업의 오너, 최고경영자(CEO)들이 사람을 판단할 때 중요한 기준으로 꼽는 원칙 중 하나가 ‘웨이터 룰(Waiter Rule)’이다. 중역을 뽑을 때 여러 차례 지원자와 같이 식사하면서 그가 식당 종업원을 어떻게 대하는지 유심히 살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웨이터가 실수로 지원자 옷에 물을 쏟았는데 “오늘 샤워 못 한 걸 어떻게 알았지”라고 농담할 정도면 합격이다. 고용주에겐 공손하던 지원자가 종업원에게 무례한 태도를 보인다면 같이 일할 건지 재고하거나, 꼭 써야 한다면 이런 점을 고려해 리스크를 관리한다. 고용주 같은 갑(甲)을 만날 때 지원자는 당연히 ‘좋은 사람 코스프레’를 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갑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면서 밥을 먹다 보면 을(乙)인 종업원을 대할 때 감추고 싶은 성격이 은연중 드러나는 일이 생긴다. 종업원의 사소한 실수에 버럭 화내는 사람은 CEO 앞에선 착한 척해도 동료, 하급자를 대할 땐 다를 수 있다. 요컨대 ‘당신에겐 친절해도 웨이터나 다른 사람에게 무례하다면 그는 친절한 사람이 아니다’라는 게 이 룰의 핵심이다. 20대 대선을 앞두고 여야 유력 대선 후보 배우자들이 평소 주변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짐작하게 하는 녹취, 문자메시지 등 증거물이 잇따라 폭로됐다. 본인과 남편들이 거듭 사과했지만 이미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칠 주요 변수가 됐다. 해외 언론이 이번 선거를 ‘민주화 이후 가장 역겨운 대선’이라고 평가한 이유 중 하나도 배우자 문제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부인 김혜경 씨의 경우 지난해 경기도청 총무과 5급 사무관 배모 씨, 당시 비서실 7급 공무원 A 씨가 경기도 법인카드로 결제한 음식들을 사저로 실어 나른 일이 A 씨에 의해 폭로됐다. 배 씨는 “어느 누구도 시키지 않은 일을 (자신이) A 씨에게 요구”했다고 해명했지만 어느 날은 초밥, 다른 날은 백숙을 김 씨가 원한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설명하지 못했다. 자기가 값을 안 치른 음식이 집에 배달돼도 문제 삼지 않은 김 씨는 이런 서비스를 당연한 일로 여긴 모양이다. 또 자기 집 옷장을 정리하고, 로션을 채워 넣은 A 씨에 대해 “첫날 인사한 것이 전부”라고 한 걸 보면 그를 투명인간 취급한 것 같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 부인 김건희 씨는 한 인터넷 매체 직원과 52차례 통화한 녹음파일이 폭로됐다. “미투는 돈 안 챙겨주니까 터지는 것 아니냐”는 황당한 말, “이재명이 된다고 동생 챙겨줄 것 같아. (캠프 와서) 잘하면 1억도 줄 수 있다”는 일종의 취업 제안까지 했다. 김 씨와 ‘누나, 동생’ 사이가 된 사람은 손해 볼 것 같진 않지만, 남편이 대선을 치르는 와중에 정체가 애매한 인물과 이런 수다를 떨었다는 데서 인간관계의 허술함이 드러났다. 부인들의 드러난 민낯은 대선 후보들에게 정치적으로 큰 타격일 뿐 아니라 낯 뜨거운 일이다. 그래선지 TV 토론에서 두 후보는 상대 배우자 공격을 피하려는 기색이 역력하다. 국민도 민망하긴 마찬가지지만 평소 대선 후보 부인들의 ‘웨이터 대하는 태도’를 엿볼 기회가 생겼다는 점은 그나마 긍정적이다. 더욱이 대선 후보들이 오래 같이 살면서도 배우자의 이런 품성과 약점을 눈치채지 못했거나, 알고도 방치했다면 ‘나라의 CEO’가 되겠다는 후보들의 사람 보는 눈을 의심해 봐야 한다. “정치인은 주인이 되기 위해 머슴 행세를 하는 사람”이라는 샤를 드골의 말처럼 선출되기 전 한없이 고개를 숙이던 정치인과 그의 가족이 집권 후 표변하는 걸 국민은 수없이 경험했다. 대선 후보가 배우자 리스크를 스스로 걷어내지 못한다면 국민이 대신 판단해줄 수밖에 없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2-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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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돈 무제한 포커판의 대선 후보들[오늘과 내일/박중현]

    코로나19 때문에 2년을 못 보고 있지만 서울 은평구 한 동네에서 같이 자란 친구 7명이 연말이면 만나는 포커모임이 있다. 여기서 언제부턴가 굳어진 규칙이 ‘테이블 머니’다. 시작할 때 1인당 판돈 상한을 정해 딱 그만큼만 꺼내 놓고 이 돈을 잃으면 탈락하는 방식이다. 우승자가 회식비, 친구들 택시비, 방 내준 집 아이들 용돈까지 책임져야 해 대부분 적자다. 포커는 돈 많은 사람에게 유리한 게임이다. 승부욕 강한 사람이 지갑에서 돈을 더 꺼내기 시작하면 판은 길어지고, 나중에 많이 잃어 낯 붉히는 사람이 나오기 마련이다. 세계적 포커대회에도 비슷한 룰이 있다. 참가자들은 동일 액수의 대회용 칩으로 경기를 치른다. ‘돈 놓고 돈 먹기 도박’이 아닌 실력, 두뇌를 겨루는 게임이 되게 하는 요소가 바로 ‘판돈 제한’이다. 이번 대선은 판돈에 제한이 없는 도박판이 됐다. 5년간 수백조 원이 들 ‘기본소득’ 공약을 내걸었다가 여론 악화로 한발 뺐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요즘 가는 곳마다 조 단위 ‘맞춤형 기본소득’을 약속하고 있다. 농어촌 살면 연 100만 원, 청년들도 100만 원, 문화예술인이어서 100만 원, 60세가 넘었는데 국민연금 수령 연령은 안 돼 120만 원, 예비군 훈련 가면 하루 20만 원, 18세 자녀까지 아동수당. 그럼 농촌에서 장년 부모를 모시고 아이를 키우는 청년이 수공예품을 만들면서 예비군 훈련을 받으면? 지금까지 한 공약을 모두 이행하는 데 얼마가 들지 이 후보 본인도 정확히 모른다는 데 ‘손모가지’를 걸까 생각해 봤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도 ‘임기 시작 100일 내 자영업자·소상공인 50조 원 지원’이란 화끈한 베팅을 했다. 다만 이 후보가 너무 가볍게 ‘콜’하는 바람에 김이 샜다. 윤 후보 측은 대통령이 된 뒤 문재인 정부 예산의 거품을 줄여 재원의 상당 부분을 만들겠다고 했는데 “국가채무비율 100%가 넘으면 문제가 생기나”라는 게 신조인 이 후보는 빚을 내서라도 나눠주자는 쪽이다. 이에 윤 후보는 ‘병사 월급 200만 원’ ‘농업직불금 두 배’를 외치며 공세를 강화했다. 문제는 ‘5년 대통령 권력’이 걸린 단판 도박의 자금을 세금 내는 60% 국민, 나중에 커서 세금을 낼 자녀, 손자들이 대줘야 한다는 점이다. 이기면 대통령, 지면 감옥이란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 게임’에 열중한 플레이어들에게 미래 세대가 낼 세금쯤은 승률을 높이는 데 필요한 불쏘시개일 뿐이다. 경험상 이런 상황에서 최소한의 책임감이라도 기대하는 건 무의미하다. 이럴 때 돈을 꿔줬다간 십중팔구 판이 끝난 뒤 떼이게 된다. 한국 선거에서 퍼주기 경쟁은 처음이 아니다. 제동을 걸려는 시도도 있었다. 2012년 4·11총선과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와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가 맞붙은 12월 대선을 앞두고 이명박 정부의 ‘합동 복지 태스크포스’는 “여야 복지공약을 모두 이행하는 데 최소 268조 원이 든다”고 발표했다. 정치권이 반발하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까지 “선거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어 부적절하다”고 경고해 거기서 멈췄다. 선관위는 재작년 4·15총선 직전 문 대통령이 ‘전 국민 재난지원금’ 지급을 결정한 한국 포퓰리즘의 중대 분기점에도 브레이크를 걸지 않았다. 이런 일을 막으려면 이미 50%를 넘긴 국가채무비율에서 차기 정부가 높일 수 있는 상한을 법으로 정해야 한다. 대선후보 공약의 소요 예산을 객관적으로 계산해 ‘판돈 상한’을 정하는 방법도 찾을 필요가 있다. 지금대로라면 국가경영 능력, 비전이 아니라 미래의 국민 재산을 제 돈인 양 당겨쓰는 베팅 실력이 향후 대한민국 대통령의 조건이 될지도 모른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2-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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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터뷰]하준경 교수 “전환기 ‘적극 재정’은 투자”… 김소영 교수 “정부는 지원, 시장중심 성장”

    《대통령 선거를 49일 앞두고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와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의 경제 공약 경쟁이 가열되고 있다. 반대 진영 공약을 따라가며 포퓰리즘 경쟁을 벌인다는 비판이 나오지만 기본 원칙, 방향의 차이는 여전히 적지 않다. 두 캠프에서 ‘경제 브레인’ 역할을 맡은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이 후보 직속 전환적공정성장전략 위원장)와 김소영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윤 후보 선대위 경제정책본부장)를 각각 인터뷰해 두 후보 경제공약의 요체가 무엇인지 물었다. 동아일보 객원 논설위원으로도 활약했던 두 교수는 경제학계에서 명망이 높은 학자들이다.》‘李캠프’ 하준경 교수 ―이 후보가 문재인 정부 부동산 세금정책과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다. “집값을 잡기 위한 문 정부의 땜질식 접근 때문에 국민이 알기 어려울 정도로 세제가 복잡해지고 부작용도 발생했다. ‘이재명 정부’의 세제 원칙은 세금으로 인한 국민의 고통을 덜어준다는 것이다. 취득세는 높고, 보유세가 없는 게 ‘중국식’, 취득세는 거의 없고 보유세가 높은 것이 ‘미국식’인데 선진국으로 갈수록 개발이 어려워져 미국식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처럼 집값이 높아진 상태에서 미국처럼 시가의 1∼1.5% 보유세를 물리면 부담이 너무 커진다. 그래서 세금 부담은 늘지 않게 제한하고, ‘토지배당’을 통해 국민에게 혜택을 돌려줘 고통을 줄여주거나, 그것도 힘들면 과세시점을 (집 처분 또는 경우에 따라 사망 시까지) 이연해 주거나 하는 방법을 찾고 있다.”기본소득은 목표 아닌 수단 ―기본소득은 추진할 것인가. “한다는 게 기본 방향이다. 다만 기본소득은 목표가 아니라 하나의 수단이란 점이 중요하다. 4차 산업혁명, 디지털 전환으로 기본소득이 필요한 미래가 올 수 있는 만큼 점진적으로 실험해 보고 다른 정책과 경쟁도 시키되 국민이 좋다고 하면 확대하고, 국민이 싫다면 못 하는 것이다. 초기에는 청년, 아동 등 범주를 제한한 ‘범주형 기본소득’도 추진해볼 수 있다. 정권 초 ‘기본소득 위원회’를 만들어 대안을 제시하고 국민 동의를 구할 것이다.” ―기본주택 100만 채 공약 재원은 어떻게 마련하나. “재건축·재개발 용적률을 높이는 등 인센티브를 주고 늘어난 주택을 청년주택으로 일부 환수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쓸 수 있다. 공공의 인허가권에서 발생하는 부분은 가능한 한 공공이 가져오는 게 맞다. 동시에 시장원리에 따라 집을 담보로 신용을 창조해 집을 더 짓는 방법을 쓰면 비용을 많이 줄일 수 있다. 제일 중요한 건 주택공급을 충분히 늘리는 것이다.” ―재정이 확대되고 나랏빚이 크게 늘어날 것이란 우려가 있다. “확장재정이 아니라 적극재정이다. 공약 중 많은 부분이 ‘투자’ 개념이다. ‘135조 디지털 전환 투자’ 중 국비는 85조 원 정도만 투입된다. 나머지는 민간자금을 펀드 등의 방식으로 끌어들인다. 또 국비 중 60조 원 정도는 문재인 정부 한국판 뉴딜 정책 등을 재구성해 마련한다. 임기 초엔 투자가 많아 일시적으로 부채비율이 늘어도 뒤로 갈수록 투자를 통해 경제가 성장해 채무비율의 분모인 국내총생산(GDP)이 커지면 비율은 떨어진다. 정부 국가재정운용계획 전망이 2025년 58.8%인데 그 경로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를 유지할 것이다.”정부 투자로 마중물 효과 기대 ―‘국가 주도’, ‘정부 주도’ 성장론이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다. “디지털, 인공지능(AI) 등 산업 전환기란 점이 중요하다. 선진국에서도 국가적 과제에 대한 정부 주도 산업정책이 부활하고 있다. 전환기에는 없던 산업이 생기고, 불가능하던 일이 가능해진다. 위험 때문에 민간이 투자하지 못하는 곳에 정부가 먼저 들어가 디지털 영토를 넓히고, 에너지 고속도로를 뚫은 뒤 민간이 들어올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민간투자를 밀어내는 ‘구축효과(크라우드 아웃)’가 아니라 민간을 부르는 ‘크라우드 인’ 즉 마중물 효과를 기대한다. 지금이 국가 순위를 바꿀 적기다. ‘555(국력 세계 5위·국민소득 5만 달러·코스피 5,000) 공약’도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성장에 대한 의지를 강조한 것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공공개혁’을 통한 규제 합리화와 금융개혁이 뒷받침돼야 한다.” ‘尹캠프’ 김소영 교수―윤 후보는 문재인 정부 부동산 세제를 비판해 왔다. ‘윤석열식 정책’은 뭐가 달라지나. “‘가격만 잡고 보자’는 게 목표였던 게 문제다. 세금 부담만 늘리다 보니 국민들은 집을 사기도, 보유하기도, 팔기도, 전세를 얻기도 어려워졌다. 집값은 안 잡혀 결국 ‘세금이라도 더 걷자’는 식이 됐다. ‘윤석열 정부’ 부동산 세제의 목표는 가격 안정이 아니라 국민 주거수준 향상이다. 집값이 안정돼도 국민이 행복하지 않으면 조세정책은 실패한 것이다. 더 좋은 집에서 안정적으로 거주하고, 더 편하게 이사 다닐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가격보다 주거 수준이 중요 ―민간 중심 재건축, 재개발 활성화를 통한 공급을 강조하고 있다. “중요한 건 집이 필요한 곳에 많이 공급하는 것이다. 수요가 많은 서울의 재건축, 재개발 활성화가 그래서 중요하다. 초과이익환수제, 분양가 상한제 등 재건축·재개발의 속도를 떨어뜨리는 제도는 없애진 않더라도 사업성을 과도하게 제약하지 않도록 조정할 것이다. 안전진단 관련 규제도 합리적으로 개편해야 한다.” ―자영업자·소상공인 50조 원 지원 등 ‘퍼주기’에 뛰어들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구체적으로는 손실보상 43조 원, 금융지원 보증에 5조 원이다. 지금처럼 코로나19 사태가 이어진다면 불가피한 지원 규모다. 550만 명 자영업자와 가족 근로자 등 650만 명 가운데 5분의 1이 파산하면 100만 명 넘는 실업자가 생긴다. 부채정리 비용, 실업대책에 필요한 지출, 세원 감소, 경기침체 효과를 종합해 보면 많다고만 할 수 없다. 이런 조치가 없으면 추후 더 많은 재원이 들어갈 가능성이 크다.”정부는 지원, 민간이 주도해야 ―재정이 받쳐줄 수 있을까. “우선 기존 예산 지출 구조조정부터 해야 한다. 선진국들은 경제위기 후 재정지출 구조조정에 나선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끝난 뒤 네덜란드는 지출을 20% 줄이는 범정부적 작업을 추진했다. 올해 확정된 604조 원 예산 중 절반인 재량지출에서 한국판 뉴딜 등의 비효율적 지출 10% 정도를 줄여 30조 원을 마련하고 초과세수, 기금여유분, 예비비 등도 일부 써야 한다. 그러고도 부족하면 적자국채 발행을 고려할 수 있다.” ―문 정부 임기 중 이미 나랏빚이 크게 늘었다. 마지노선은 어느 정도인가. “이론적, 실증적으로 명확한 선을 제시하기는 어렵지만 한국의 경우 국제 비교에 쓰이는 일반정부 채무비율(D2·국가채무+비영리 공공기관 부채)이 80%를 넘어서면 국채를 팔기 어려워져 높은 이자를 물어야 할 것이다. 예기치 못한 경제위기 등을 고려해 10%포인트 이상 ‘버퍼(완충지대)’도 필요하다. 국제통화기금(IMF)은 한국의 D2가 2026년 66.7%까지 오를 것으로 본다. 이 전망보다 충분히 낮은 수준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취임 후 독립적 ‘재정위원회’를 구성해 지속가능성을 진단하고 비효율적 지출부터 줄일 것이다.” ―잠재성장률 제고의 해법은 무엇인가. “시장경제의 장점인 혁신, 창의를 통해 1%대 추락을 앞둔 성장 잠재력을 2배로 끌어올리는 게 목표다. 청년 일자리 문제도 결국 성장을 통해 풀어야 한다. 이를 위해선 ‘정부가 지원하고, 민간이 주도하는 경제’를 구현해야 한다. 연구개발(R&D), 인재양성, 공급망 강화에 필요한 정부 투자는 지속하되 공정경쟁, 규제혁신을 통해 시장 중심 ‘선도형 성장’을 해야 한다. 각종 규제는 사회·경제적 영향을 평가해 규제로 인한 비용을 10% 줄일 것이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2-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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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중현]‘성공한 경제 대통령’ 호소인

    ‘빨리빨리’가 몸에 밴 한국 공무원들이 선진국 중 제일 먼저 통계를 낸다는 걸 간과한 게 화근이었다. 작년 1월 신년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한국의 성장률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가운데 1위”라고 자랑했다. 코로나19 충격이 반영된 2020년 성장률이 ―0.9%로 ‘K방역’에 힘입어 다른 나라보다 선방한 점을 강조했던 것이다. 하지만 곧이어 나온 노르웨이 성장률이 예상보다 호전돼 ―0.8%로 한국을 앞섰다. 3.4%나 플러스 성장한 아일랜드도 등장했다. 이어 뉴질랜드(+1.0) 호주(―0.3) 터키(+1.8%)가 줄줄이 한국을 추월했다. 결국 한국은 OECD 38개 회원국 중 리투아니아(―0.9%)와 함께 공동 6위로 밀렸다. OECD 회원국이 아닌 중국(+2.2%) 대만(+3.1%)이 빠진 순위가 이랬다. 사정을 훤히 알아도 대통령 말실수에 소금을 뿌릴 수 없는 기획재정부는 작년 말 현 정부 4년 반 경제성과를 자평하면서 2020년 성장률을 ‘G20(주요 20개국) 중 3위’라고 슬쩍 바꿨다. 그런데 이 또한 중국, 터키, 호주에 이은 4위가 진실이다. 이달 3일 임기 중 마지막 신년사에서 문 대통령은 다시 “위기와 격변 속에서 우리 경제는 더욱 강한 경제로 거듭났습니다. 선진국 가운데 지난 2년간 가장 높은 평균 성장률을 기록하면서…”라고 했다. 작년 성장률 4.0%는 미국(5.6%) 유로존(5.2%) 중국(8.0%)보다 낮지만 마이너스 폭이 작았던 재작년과 합해 평균하면 순위가 높아진다는 데 착안한 것이다. OECD, G20 등 비교 대상이 뚜렷해 꼬투리 잡힐 말 대신 ‘선진국’이란 표현을 쓴 게 묘수다. 수출 제조업이 강한 한국의 성장률은 관광 등 서비스업 비중이 큰 유럽 등 선진국보다 좋은 게 당연했다. 그런데도 순위를 분식(粉飾)해서까지 “가장 높은 성장률”을 강조한 건 ‘경제에 성공한 대통령’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대통령의 욕심일 것이다. 성과는 작아도 부풀리고, 실패는 커도 침묵해 지지율을 지켜온 ‘문재인식 통치술’의 편린이기도 하다. 작년 11월 ‘국민과의 대화’에서도 이런 심경이 읽혔다. 대통령은 마무리 발언에서 정색하고 “한국은 정말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 이런 성취를 부정하고 폄훼한다면 그것은 우리 정부에 대한 반대나 비판 차원을 넘어 국민이 이룬 성취를 폄훼, 부정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라고 했다. 국민과 기업이 인내와 노력으로 일궈낸 경제성과는 당연히 깎아내려선 안 될 일이지만 “정부에 대한 반대나 비판”까지 끼워 넣은 건 치사한 무임승차다. 현 정부는 코로나 발생 초기 중국 입국자 차단, 백신 조달의 타이밍을 놓쳐 경제 충격을 최소화하지 못했다. 이런 와중에 세계 주요국 중 1위 집값 상승률로 국민 허리를 휘게 했다. 재작년 총선 직전 전 국민 재난지원금 지급 결정은 ‘한국 포퓰리즘사(史)’에 길이 남을 것이다. 국민을 ‘월급 주는 자’와 ‘월급 받는 자’로 가르고 최저임금을 급격히 올려 일자리를 줄인 건 이념형 정책실험의 실패 사례로 경제 교과서에 실릴 만하다. 언젠가 재정 악화로 국가 신용등급이 떨어지는 사태가 온다면 나랏빚 폭증에 본격 시동을 건 정부로 다시 소환될 것이다. ‘성공한 경제 대통령’은 시간이 흐른 뒤 대다수 국민이 동의해야 얻을 평가다. 지금 ‘우리 정부 경제정책은 실패하지 않았다’고 아무리 강조해봐야 일방적 주장일 뿐이다. 임기 말에야 “일자리 창출은 기업의 몫”이란 깨달음을 얻었다면 한 번도 참석하지 않은 ‘경제계 신년인사회’에 나가 외롭게 경제를 지켜온 기업들에 감사의 마음이라도 전하는 게 좋았을 것이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2-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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