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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박중현 논설위원입니다.

sanjuck@donga.com

취재분야

2024-03-28~2024-04-27
칼럼100%
  • [오늘과 내일/박중현]MZ세대가 ‘586 노조’에 가르쳐 주는 진실

    “그분은 6·25에 대해 경험이 없으셔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인지 잘 모르겠다. 왜 ‘효순이 미선이 사건’을 말하면서 천안함 사건이나 서해 공무원 피격 사건은 언급하지 않는가.” ‘새로고침 노동자협의회’ 부의장인 송시영 서울교통공사 올바른노조 위원장이 민노총 위원장의 발언을 받아치면서 한 이야기가 보름이 지나도 귓가에 맴돈다. 새로고침 노협은 지난달 출범한 30대, 사무직 중심인 MZ 노조들의 협의체다. 앞서 양경수 민노총 위원장은 2002년 발생한 효순이 미선이 사건을 언급하면서 “MZ세대로 일컬어지는 분들은 이런 대중적 반미투쟁 당시 아주 어렸거나 아예 경험해 보지 못했을 것이다. 노조 활동을 하다 보면 정치 문제 개입이 노동자, 서민의 삶을 바꾸는 데 중요한 의제라는 사실에 동의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MZ 노조가 반미, 반정부 정치투쟁을 지양하고 노동자 권익, 처우 개선이란 ‘노조의 본질’에 집중하겠다고 밝힌 데 대한 반응이었다. 표현이 좀 순화됐을 뿐 ‘젊고 경험 없는 세대라 뭘 몰라서…’라는 말처럼 들린다. 120만 조합원을 거느린 민노총은 정치권도 절절매는 거대 노조이자, 우리 사회를 쥐락펴락하는 기성 권력이다. 이들에게 “천안함, 서해 공무원 피격은 왜…”라고 당당히 묻는 MZ세대를 보면서 1980년대 대학가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좌경화 이념교육을 막 받기 시작한 대학 신입생 가운데 궁금증이 많은 이들은 북한 체제와 정권을 칭송하는 선배에게 “그럼 북한이 쳐들어와도 총 들고 싸우지 않을 겁니까”라고 묻곤 했다. 그럴 때 나오는 대답은 십중팔구 이랬다. “의미 없는 질문이다. 같은 민족인 우리에게 북한이 총부리를 겨누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기 때문에.” 이런 황당한 문답이 오가던 1980년 중후반에 태어난 세대가 지금 MZ 노조의 주축이다. 북한이 차근차근 핵 개발에 성공하고, 대륙간탄도미사일까지 갖춘 사실상 핵보유국이 되는 과정, 연평도 포격과 천안함 폭침(2010년)을 보면서 성장했다. 최근에는 김여정이 남쪽을 향해 핵미사일을 쏠 수 있다고 공언해도 북한에 싫은 말 한마디를 않는 기성 노조의 태도를 평소 가슴 깊이 담아 뒀을 것이다. 4050세대와 다른 시대를 살아온 MZ세대는 기업관도 완전히 달라졌다. 동아일보 취재팀이 최근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MZ세대의 35.1%는 기업에 ‘호감’을 갖고 있다고 답했다. 11.3%인 ‘비호감’의 3배가 넘었다. 호감 가는 기업인 유형으로는 ‘삼성·현대차 등 거대 재벌 기업의 창업자’가 1위였다. 지난해 말 화제였던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 등장인물 중에서 진양철 회장의 인기가 유독 높았던 게 우연이 아니다. 주식에 투자하는 500만 2030세대에게 대기업은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는 곳일 뿐 아니라 자산을 불려주는 원천이기도 하다. 1980년대 후반 민주화 시대에 노동운동을 시작한 60년대 출생, 80년대 학번과 그들의 이념체계를 그대로 물려받은 40대 후반이 지금 한국의 노동운동을 이끌고 있다. 젊어서 ‘대기업은 미 제국주의의 앞잡이인 매판자본’이라고 배웠고, 지금도 기업을 보는 눈은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다. MZ 노조가 경험을 더 쌓는다고 생각이 비슷해질 리가 없다. 인간의 이념은 20대에 형성돼 평생 유지되는 경향이 있다. 30년 만에 후진국에서 선진국이 된 한국 같은 사회에선 개인과 조직의 정신적 성장이 변화를 못 따라잡는 일이 자주 생긴다. 자기가 멈춰 있는 건 잊고, 시대를 앞서가는 젊은 세대에게 자꾸 뭔가 가르치려 드는 사람을 ‘꼰대’라고 한다. 지금 민노총은 MZ 노조에 충고할 때가 아니다. 뭐라도 그들로부터 배워야 한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3-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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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중현]K부머와 MZ세대, 알고 보면 괜찮은 궁합

    “당신은 일하려고 살지만, 우리는 살기 위해 일합니다.” 프랑스 사람들이 질색을 한다는 넷플릭스 드라마 ‘에밀리 파리에 가다’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미국 마케팅기업이 인수한 파리의 명품 전문 마케팅업체에 파견된 본사 직원 에밀리가 업무에 강한 의욕을 보이자, 이를 불편해하는 프랑스인 선임 직원이 해주는 충고다. 달리 말하면 “너무 무리해 주변 사람 힘들게 만들지 말고, 살살 하자”는 거다. 미국인 시각에서 프랑스인 삶의 태도를 과도하게 전형화한 것은 맞지만 어느 정도 진실도 담고 있다. 마크롱 대통령이 추진하는 연금개혁의 핵심은 일하는 나이를 현재 62세에서 2030년까지 단계적으로 64세로 올리는 부분이다. 은퇴자 증가로 불어나는 재정 악화, 미래세대의 세금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다. 프랑스는 정년과 은퇴 연령을 일치시켜 놔서 일도 2년 더 해야 한다. 하지만 프랑스인들이 생각하는 이상적 퇴직 연령은 60.6세다. 10명 중 6명은 60세 이전 은퇴를 원한다. 실제 프랑스의 평균 은퇴 연령도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몇 년씩 빠르다. “더 오래 일하자”는 마크롱 개혁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이유다. 연금개혁의 큰 파도를 맞은 건 한국도 마찬가지다. 1988년 도입된 국민연금은 초기 가입의 거부감을 줄이기 위해 내는 돈에 비해 너무 많은 보상을 약속했다. 소득의 9%인 현재 보험료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의 절반 수준인 데다, 고령화 속도가 빨라져 올해 33세 근로자가 연금을 받기 시작할 2055년에 기금이 완전히 고갈된다. 이걸 아는 2030청년들이 “받지도 못할 국민연금 차라리 탈퇴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한다. 하지만 한국은 프랑스와 분명히 다른 게 있다. 재작년 통계청 조사에서 한국의 55∼59세 장년층이 희망한 은퇴 연령은 70세. 프랑스인들보다 9년 이상 늦다. 다만 현실은 많이 달라서 가장 오래 일하던 일터를 떠날 때 남성 근로자의 평균 연령은 51.2세, 여성은 47.7세다. 한국의 55∼64세 장년층 고용률도 66%로 77%인 일본, 72%인 독일보다 크게 낮다. 한국의 중장년층은 기회가 없을 뿐 더 일하고, 연금을 더 오래 낼 의욕이 여전히 넘쳐난다. 이들을 더 일하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60세 법정 정년과 하락하는 생산성에 맞춰 임금을 낮출 수 없게 만드는 연공서열식 호봉제다. 역대 정부와 정치권은 ‘청년 일자리를 중장년층이 뺏는다’라는 비판, 강성노조의 반발, 그로 인한 득표 손해를 의식해 문제를 방치해 왔다. 이런 생각이 그릇된 선입견일 수 있다는 증거가 요즘 속속 나오고 있다. 동아일보 취재팀이 최근 2030세대를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60세 정년을 연장하는 데 반대한 청년은 25%, 찬성은 그 3배인 75%였다. 찬성의 첫 번째 이유는 ‘노년 빈곤 문제 해결’(46%), 두 번째가 ‘청년층 국민연금 부담을 줄인다’(20%)였다. 부모·삼촌 세대가 더 일해 줘야 미래에 자신들이 져야 할 짐이 가벼워진다고 생각하는 청년들이 훨씬 많다는 뜻이다. 청년 알바 구하기에 지친 자영업자들도 구직 광고에 ‘중장년층 환영’이라고 써넣기 시작했다. 인구는 줄고, 더 좋은 일자리를 찾는 청년들 대신 나이 든 세대가 할 일이 생겨나고 있다. 한국 베이비부머의 대표 격인 ‘58년 개띠’들이 올해 65세다. 그 뒤 10년간 태어난 이들의 ‘더 일할 의욕’은 연금개혁 등을 둘러싼 K부머와 MZ세대의 대립적 관계를 괜찮은 궁합으로 바꿀 수 있는 한국만의 자산이다. 일반인 500명을 모아 토론하자며 개혁을 미루고, 임기 끝날 때쯤에나 개혁 완성판을 내놓겠다는 정치권과 정부가 그 가치를 제대로 모를 뿐이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3-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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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박중현]13월의 월급은 옛말… 작년 연말정산 393만 명이 토해냈다

    많게는 100만 원 넘는 세금을 연초에 돌려줘 ‘13월의 보너스’로 불리던 연말정산. 요즘 다수의 월급쟁이들에게 연말정산이 반갑지 않은 ‘신년 세금폭탄’으로 바뀌고 있다. 2021년 근로소득에 대한 작년 초 연말정산 결과 세금을 조금도 돌려받지 못하고, 오히려 더 낸 직장인이 전체 근로소득 신고자의 19.7%인 393만4600명이었다. 1인당 평균 97만5000원, 총 3조8373억 원의 세금을 추가로 납부했다. 세금을 일부라도 돌려받은 근로자는 67.7%다. ▷연말정산 결과 내야 할 근로소득세보다 원천 징수된 세액이 적을 경우 세금을 더 내는 일이 벌어진다. 월급은 올랐는데 이전 기준으로 세금을 매긴 경우가 대부분이다. 매년 달라지는 소득공제 항목도 영향을 미친다. 코로나19 첫해인 2020년분 정산 때에는 평균임금 상승률이 1.2%로 낮고, 공제 혜택이 일시적으로 커져 세금을 돌려받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2021년분 정산에선 임금이 3.9% 오르고, 공제 혜택이 줄면서 추가로 세금 낸 사람이 전년보다 42만 명 증가했다. 다만 소득이 낮은 근로자 35.3%는 근로소득세를 전혀 내지 않았다. ▷막 시작된 2022년분 연말정산 결과도 불안하다. 작년 근로자의 임금 상승률은 3.8%로 높은 세율 구간에 새로 진입한 근로자가 적지 않다. 문제는 우크라이나 전쟁, 미중 공급망 갈등의 영향으로 소비자물가가 5.1%나 올라 실질소득은 오히려 감소했다는 점이다. 높은 물가 때문에 구매력이 줄었는데도, 화폐로 표시된 ‘명목소득’이 늘어 소득세를 더 내게 되는 전형적인 ‘인플레이션 세금’ 현상이다. ▷같은 직장, 비슷한 월급을 받는 동료가 세금을 돌려받았다면서 좋아하는데 자신은 세금을 더 토해내야 한다면 큰 손해를 본 것처럼 느끼게 마련이다. 2015년 초 터진 ‘연말정산 파동’이 그런 경우였다. 출산·다자녀가구, 독신가구의 공제 혜택을 줄인 소득세법 개정으로 동료 근로자보다 세금을 더 내게 된 월급쟁이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박근혜 정부가 사과하고, 연봉 5500만 원 이하 근로자 541만 명에게 8만 원씩 세금을 돌려줬지만 성난 민심을 달래기가 쉽지 않았다. ▷세금 나갈 일은 늘었지만 연말정산 자체는 쉬워졌다. 국세청은 신용·체크카드, 현금영수증 결제 내역, 기부금 액수 등 소득공제에 필요한 대부분의 자료를 간소화 서비스로 제공한다. 올해는 신용카드·대중교통 결제, 무주택 가구주가 집을 얻느라 대출한 금액 등의 공제 혜택이 늘었다. 꼼꼼히 혜택을 챙겨 한 푼의 세금도 억울하게 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3-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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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중현]‘니가 가라, 中東’ 외친 청년들 이번엔 다를까

    한국에서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카타르까지 거리는 6800∼7600km. 몇 달 새 이들 산유국과 한국의 간격이 확 좁혀진 느낌이다. 작년 11, 12월 두 달간 한국인들은 카타르에서 들려오는 월드컵 소식에 귀를 바짝 기울였다. 11월 방한한 사우디 왕세자는 ‘현대판 만리장성’으로 불리는 네옴시티 건설 등과 관련해 한국 기업과 40조 원 투자협약을 맺었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이 방문한 UAE는 300억 달러의 한국 투자를 약속했다. 미국의 강한 견제를 받는 중국이 성장률·인구까지 정점을 찍고 하강세로 돌아서면서 새로운 돌파구 마련이 절실한 한국 경제는 ‘제2 중동 붐’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1970∼80년대 오일쇼크 때 중동 건설로 오일머니를 벌어들여 위기를 극복했던 ‘1차 중동 붐’ 재현에 대한 기대다. 산유국들이 기름값 폭등으로 번 돈을 ‘포스트 오일 시대’를 위해 쏟아붓는 이번 기회를 잘 활용하면 금세라도 꽉 막힌 국내 청년실업 문제의 숨통이 트일 것만 같다. 다만 걱정거리가 하나 있다. 우리 청년들이 기성세대처럼 중동 붐을 자신의 미래를 향해 열린 기회로 받아들일까 하는 거다. 먼저 중동 진출을 놓고 벌어졌던 8년 전 논란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2015년 4월 중동 순방을 마친 박근혜 대통령은 무역투자진흥회의를 주재하면서 “대한민국에 청년이 텅텅 빌 정도로 중동 진출을 해보라. 다 어디 갔느냐고, 다 중동 갔다고…”라고 했다. 성장 둔화, 청년실업 악화의 돌파구를 중동에서 찾자는 주문이었는데,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 때 중동 붐의 기억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청년들의 반응은 싸늘함을 넘어선 분노였다. 영화 ‘친구’ 유명 대사를 패러디한 ‘니가 가라, 중동’이란 말은 금세 유행어가 됐다. 사실 박근혜 대통령이 거론한 중동 일자리는 정보기술(IT), 의료 등으로 1970년대 할아버지 세대들이 맡았던 건설노동과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청년들 귀엔 ‘국내에 일자리가 없다고만 하지 말고 열사의 사막에 가서 땀 흘려 일하라’는 말로 들렸던 거다. 평소 국민과의 소통 부재, 특유의 썰렁한 꼰대 유머가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2차 붐을 통해 한국 기업들이 중동 진출을 꾀하는 산업은 원전, 방산, 플랜트, 바이오, 스마트팜 등 첨단 분야다. 사우디의 ‘미스터 에브리싱’ 빈 살만 왕세자는 한국의 게임, 콘텐츠 산업에 관심이 많아 국부펀드를 통해 카카오엔터테인먼트에 최근 막대한 투자를 결정했다. 사우디 미래도시에는 네이버의 로봇 기술이 채용될 가능성도 있다. 지난해 한국 게임에 1인당 가장 많은 돈을 쓴 나라 1, 2위는 카타르, 아랍에미리트였다. 이런 프로젝트들이 성공하려면 한국 청년 인재들이 해외에 나가 미래를 개척할 마음이 생겨야 한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을 거란 조짐이 적지 않다. 서울 등 수도권 일부 지역을 벗어나면 인재를 못 구해 “지방에선 벤처가 불가능하다”고들 한다. 중소기업·자영업자들은 “최저임금보다 더 준대도 청년 알바 씨가 말랐다”고 하소연이다. 양질의 일자리 부족, 청년인구 감소란 이유가 있긴 해도 작년 늘어난 일자리의 55%를 60세 이상이 채운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국이 겪는 문제들을 20년 정도 앞서 경험해온 일본에선 청년들이 자국 내의 친숙한 삶에 안주해 해외 유학, 근무를 기피한다는 한탄이 나온 지 오래다. 최근 코로나19가 잠잠해지면서 판교의 IT 기업들이 재택근무를 줄이자 사무실에 자주 나가는 데 반발한 젊은 직원들의 노조 가입률이 급증했다고 한다. 해외에서 일자리를 발굴하는 것보다 지금 우리 경제의 더 급한 숙제는 청년들 가슴속에 잠자는 ‘야성’을 흔들어 깨우는 것일지 모른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3-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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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박중현]“채용 청탁 안 받겠습니다”

    “노조 △△한테 얘기하면 된다더라.” “○○ 아들은 벌써 내정이 됐다던데….” 현대자동차 노조가 최근 ‘채용 관련 어떠한 불법행위도 근절한다’는 제목의 특이한 보도 자료를 냈다. 올해 700명의 생산직 근로자 채용을 앞두고 온갖 소문이 다 돌고 있기 때문이다. 노조는 “채용 과정에 청탁·압력·강요·금품·향응은 있을 수 없다. 비리 연루자는 법적 책임을 묻고 일벌백계하겠다”고 했다. ▷노조가 직원 채용과 관련해 이처럼 이례적인 입장 표명을 한 건 18년 전 현대차·기아 채용비리 사건의 트라우마가 생생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기아는 2004년 10월 광주공장 생산계약직 근로자를 뽑으면서 1079명의 채용 인원 중 30%에 대한 ‘추천권’을 노조에 준 사실이 이듬해 초 드러났다. 원래 1000명으로 예정됐던 인원이 늘어난 것도 너무 많은 청탁이 몰렸기 때문이란 말이 나왔다. 추천권을 행사하는 노조 간부에게 거액의 사례금을 건네고 입사한 근로자 중에는 나이, 학력을 속인 부적합자가 적지 않았다. ▷당시 기아 노조위원장이 “인사 청탁이 관행화되면서 광주공장 노조 간부처럼 도덕적 불감증에 빠져 입사자들로부터 금품을 수수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연고 없는 응시자는 사실상 입사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했을 정도로 노조 관계자들이 채용에 깊숙이 개입했다. 2005년 5월에는 현대차 쪽까지 사태가 번졌다. 노조 간부, 대의원들이 취업 청탁을 대가로 사례금을 챙겼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일부는 구속됐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같은 우려가 나오는 건 현대차·기아가 청년들이 선호하는 최고의 직장이기 때문이다. 현대차 생산직의 2021년 평균 연봉은 9600만 원으로 한국 근로자 평균 연봉(4024만 원)의 2.4배다. 60세 정년이 보장될 뿐 아니라 퇴직 후 계약직으로 1년 더 다닐 수도 있다. 재직 중에는 30%, 장기근속자는 퇴직 후에도 25%의 할인율이 현대차를 살 때 적용된다. 블루칼라 근로자들에겐 꿈의 직장인 셈이다. 게다가 현대차의 생산직 신입 채용은 2013년 4월 이후 10년 만이다. ▷최근에는 기아 단체협약의 ‘고용세습’ 조항이 문제로 떠올랐다. 노동당국은 작년 말 ‘정년퇴직자 및 장기근속자 자녀를 우선 채용한다’는 기아 단협을 고치라는 시정명령을 의결했다. 헌법상 평등권, 채용 때 차별을 금지하는 고용정책기본법 취지에 어긋난다는 이유다. 현대차 노사는 2019년 삭제한 조항이지만 기아 노조는 여전히 ‘협약 사수’를 외치고 있다. 좁은 취업문을 넘으려고 애쓰는 MZ세대 청년들의 눈에 이런 모습이 어떻게 비칠지 두렵지 않은가.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3-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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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박중현]한국의 ‘무역흑자 1위’ 수출시장 베트남

    부동산, 기숙사, 준비, 광고…. 베트남 호찌민이나 하노이, 한국 관광객이 몰리는 다낭, 호이안 거리에 걸린 프랑스식 알파벳 간판을 찬찬히 소리 내 읽어 보면 한국말로 뜻이 통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국어와 베트남어 어휘 가운데 한자어 비중은 양쪽 모두 60% 이상. 오랫동안 한자 문화권에 속해 있었다 보니 발음까지 똑같은 단어가 많은 것이다. 유교 전통이 강한 점도 비슷하다. 이렇게 닮은 데가 많은 두 나라의 경제 관계가 더 긴밀해지고 있다. ▷한-베트남 수교 30주년이었던 작년 한국이 가장 많은 무역수지 흑자를 낸 상대국에 처음으로 베트남이 올랐다. 610억 달러어치 상품을 수출하고, 267억 달러어치를 수입해 무역흑자는 343억 달러였다. 재작년 1위(352억 달러)였던 홍콩은 작년 3위(258억 달러), 재작년 3위(243억 달러)였던 중국은 22위(12억5000만 달러)로 내려앉았다. 미중 공급망 갈등, ‘제로 코로나’ 정책으로 홍콩을 경유하거나, 직접 중국으로 간 대중 수출이 급격히 준 탓이다. ▷1986년 시장경제를 도입하는 개혁개방정책 ‘도이머이’를 시작한 베트남은 최근 들어 후발국 프리미엄을 톡톡히 누리고 있다. 미국 등 서방 세계의 중국 견제가 본격화한 가운데 대체 생산기지로 베트남의 존재감이 커졌기 때문이다. 베트남 통계청이 내놓은 작년 경제성장률 추정치는 8.0%로 1997년 이후 최고다. 한국 1%대, 중국도 4%대 성장이 예상되는 올해에도 베트남 경제는 6%대의 성장을 할 것으로 전망된다. ▷베트남의 급성장에는 현지에 진출한 9000여 개 한국 기업들의 기여가 컸다. 누적 기준으로 베트남에 대한 외국인 투자에서 한국은 수년째 건수, 금액 모두 압도적 1위다. 재작년 베트남 전체 수출액의 20%는 삼성그룹이 올렸다. 전 세계에서 팔리는 삼성전자 스마트폰의 절반, LG전자의 많은 가전제품들이 베트남에서 생산된다. 미중 패권경쟁으로 인한 ‘지경학 리스크’를 피하려는 애플 등 미국 기업들도 베트남 생산을 늘리려고 한다. 1980, 90년대 선진국 자본이 일본의 높은 인건비 등을 피해 한국 투자를 늘린 것과 닮은꼴이다. ▷1992년 5억 달러로 시작한 한국과 베트남의 교역 규모는 31년간 175배로 성장했다. 한국의 교역대상국 중 중국, 미국에 이은 3위다. 아직 수출품은 반도체, 디스플레이, 석유화학 등 중간재가 많지만 의류, 화장품, K컬처 상품 수출이 빠르게 늘고 있다. 인구 1억 명, 평균 연령 32.5세의 젊은 나라 베트남은 이미 한국에 없어선 안 될 경제 파트너다. 따져 보면 무척 닮은 두 나라의 인연이 점점 깊어져 간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3-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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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중현]소주성보다 고약한 ‘통계주도성장’

    “너희 그거 알아? 통계 방식이 달라서 그렇지 미국식으로 따지면 소련 GDP(국내총생산)가 미국보다 훨씬 많다고….” 1980년대 대학가 운동권 선배들이 신입생을 앉혀 놓고 반미(反美) 교육을 하면서 대단한 비밀이라도 알려주는 양하던 말이다. 당시 많은 좌파 지식인들도 비슷한 환상을 갖고 있었다. 물론 1991년 소련 붕괴 후 새빨간 거짓말로 드러났다. 철의 장막을 들추고 본 소련 경제는 외부에 알려진 것보다도 훨씬 형편없었다. 생산과 분배를 당 중앙이 통제하는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보고 단계마다 통계가 분식되는 일이 벌어졌다. 실현 불가능한 목표를 하달받고, 달성 못 하면 질책당하는 하급자들로선 대안도 없었다. 전국적으로 ‘제로 코로나’ 반대 시위가 발생하자 허겁지겁 ‘위드 코로나’ 체제로 전환한 중국에선 지금도 비슷한 일이 생긴다. 화장장이 미어터져도 정부가 발표하는 사망자 숫자는 턱없이 적다. 비판이 쏟아지자 결국 중앙정부 차원의 통계 발표를 중단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소득주도성장(소주성), 부동산 정책의 실패를 감추기 위해 많은 통계가 분식됐다는 의혹이 커지고 있다. 소득, 고용, 집값 등 주요 통계에 청와대 관계자들이 부당하게 개입했는지에 대한 감사원 조사가 마무리 단계다. 의심스러운 정황이 많아 ‘알고 보니 문 정부의 진짜 경제정책은 소주성이 아니라 통주성(통계주도성장)’이라는 농담까지 나왔다. 제일 이상한 일은 2018년 황수경 통계청장 교체를 전후해 벌어졌다. 문 정부가 소주성 기조에 따라 최저임금을 16.4%나 올린 그해 1분기에 저소득층 소득이 급감하고, 소득 격차가 최악으로 벌어졌다는 통계가 나왔다. 당시 문 대통령은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보고서 등을 근거로 “최저임금 인상의 긍정적 효과가 90%”라고 반박했다. 얼마 뒤 취임한 지 13개월밖에 안 된 황 청장이 바로 그 보고서를 쓴 강신욱 청장으로 교체됐다. “좋은 통계를 만들어 보답하겠다”고 한 강 청장 취임 후 가계소득 통계 방식이 바뀌어 그 이전과 소득분배 수준을 비교할 수 없게 됐다. 나중에 ‘비정규직 제로(0)’ 정책을 펴는 정부에서 비정규직이 사상 최대가 됐다는 통계가 나오자 강 청장은 “비정규직 분류 방식이 바뀌어서”라고 했다. 백미는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이 2020년 국회에서 한 집값 발언이었다. 그는 한국부동산원 전국 통계를 들어 “(문 정부 3년간) 11% 정도 올랐다고 알고 있다”고 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같은 기간 서울 전체 집값 34%, 서울의 아파트값은 52% 올랐다고 분석했다. 정부는 “통계 방식 차이”라고 했지만 어느 쪽이 진실인지 헷갈리는 사람은 없었다. 통계가 아니어도 대통령 발언 속 숫자의 진위 논란이 지난 정부에서 끊이지 않았다. 작년 1월 문 전 대통령이 신년사에서 “지난해(2020년) 한국 성장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1위”라고 자랑했는데 다른 나라 통계가 모두 나온 뒤 확인된 순위는 6위였다. 이전 정부에서도 성장률을 반올림하는 수준의 ‘통계 마사지’는 있었다. 하지만 문 정부처럼 통계 체계를 조작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적은 없다. “세상엔 세 종류 거짓말이 있는데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그리고 통계”라는 마크 트웨인의 말이 현실이 될 때에는 꼭 필요한 조건이 있다. 그릇된 정책을 선택해 놓고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잘했니”라고 다그쳐 묻는 절대권력 앞에서 통계라는 ‘정책의 거울’은 자주 거짓말을 한다. 역대급 좌파 경제정책을 추진한 정부에서 생긴 일이라는 것도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 그래서 통주성은 실패한 소주성보다 더 고약하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2-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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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박중현]별난 몸짓·말투도 돈 받고 파는 시대 오나

    지난해 초 가수 아이유와 쏙 빼닮은 외모로 틱톡에서 인기를 끌던 중국의 뷰티 인플루언서가 화제가 됐다. 아이유 특유의 깜찍한 옷차림, 표정을 따라할 뿐 아니라 눈매, 얼굴형까지 흡사해 중국의 아이유, ‘차이유’로 불리던 인물이다. 하지만 중국 누리꾼이 폭로한 차이유의 실제 외모는 아이유와 전혀 닮지 않았다. 영상 합성 기술 딥페이크로 만든 가짜 얼굴이었던 것이다. 이런 사건들을 통해 ‘퍼블리시티(Publicity)권’에 대한 관심이 국내에서 확산됐다. ▷법무부가 내년 상반기 중 ‘인격표지(標識) 영리권’을 넣어 민법을 고치기로 했다. 미국 36개 주와 독일, 일본, 프랑스 등이 인정하는 퍼블리시티권을 한국에 도입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성명, 초상, 음성, 그 밖의 인격표지를 영리적으로 이용할 권리를 갖는다’는 조항이 신설된다. 권리를 위임하거나 물려주는 것도 가능해진다. 상속 후 권리 존속 기간은 30년이다. 자녀가 부모의 퍼블리시티 권리를 충분히 이용할 수 있는 시간이다. ▷법이 도입되면 ‘차이유 사건’ 같은 일이 생겼을 때 손해배상 청구 등으로 대처할 수 있게 된다. 지금까지 퍼블리시티권을 명문화한 법이 없어 한국 법원은 유명인 초상권이 상업적으로 무단 사용된 경우 부정경쟁방지법 등에 따라 판단해 왔다. 아이돌 가수가 기획사에 초상권 활용 권한을 위임할 수 있는지 불분명했는데 이런 권리관계도 명확해진다. 신념에 어긋나는 등 중대 사유가 발생하면 위임을 철회할 수도 있다. ▷퍼블리시티권과 많이 혼동되는 권리가 저작권이다. 저작권은 노래, 영화, 문학작품 등 창작물을 보호할 뿐 창작자 개인의 특성까지 보호하진 않는다. 퍼블리시티권에는 초상권, 음성권, 성명권뿐 아니라 특색 있는 개인의 몸짓, 말투까지 포함될 가능성도 있다. 유명 배우의 말투, 인기 개그맨의 유행어를 성우 등 다른 사람이 성대모사 해 상업광고에 사용하는 게 그런 경우다. 원래의 배우, 개그맨에게 보상할 의무가 발생할 수 있다. 유명해진 범죄자가 자기 얼굴, 이름 등을 영리 목적으로 이용하려 할 때 이를 용인할 것이냐 하는 논란도 예상된다. ▷이 법이 주목받는 건 일반인도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에 올린 짧은 동영상 하나로 ‘벼락스타’가 될 기회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본인 의사에 반해 이름, 사진 등이 사용될 경우 손해배상도 청구할 수 있게 된다. 외모, 이름, 목소리를 자신만의 브랜드로 잘 키우면 돈도 벌고, 심지어 자녀나 배우자에게 유산으로 물려줄 수 있는 시대가 오고 있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2-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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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중현]문재인의 후회, ‘회·빙·환’이 필요한 걸까

    인생의 과거 특정 시점으로 ‘타임 슬립’해 돌아가는 회귀, 다른 사람 몸으로 옮겨가는 빙의, 다른 시간·세계에서 새로운 인물로 태어나는 환생. 통칭 ‘회·빙·환’은 청년들이 좋아하는 스토리텔링이다. 취업, 연애, 내 집 마련, 뭐 하나 뜻대로 풀리지 않아 ‘이번 생은 망했다’고 느끼는 청년이 많은 게 인기의 이유라는 해석이 있다. 하지만 “내가 지금 아는 걸 그때의 내가 알았더라면…”으로 요약되는 회·빙·환식 발상이 젊은 사람만의 것은 아니다. 나이 많은 사람들 역시 평생 비슷한 생각, ‘후회’를 거듭하며 살아간다. “잊혀진 사람으로 돌아가고 싶다”던 문재인 전 대통령이 수시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글을 올리고 있다. 추천하는 책마다 베스트셀러에 오를 정도로 여전히 지지층을 몰고 다니는 그가 지난달 소개한 책이 ‘좋은 불평등’이다. 더불어민주당 등 진보진영 정책통으로 오래 활동한 최병천 전 민주연구원 부원장이 썼다. 저자는 지난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정책, 그중에서도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이 의도와 반대로 불평등을 심화시켰다고 평가했다. 새로운 주장은 아니다. 임기 초 2년간 문 정부가 최저임금을 30% 가까이 올렸을 때 많은 경제 전문가들이 그런 이유로 위험성을 경고했다. 최저임금이 급등하자 가족 중 여럿이 편의점, 식당에서 일해 근근이 살아가던 저소득층 가정에서 일자리를 잃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신문 사회면에 자주 등장하는 안타까운 가족동반 사망 사건 가운데 몇몇에는 최저임금 급등의 충격이 영향을 줬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문 전 대통령은 이 책을 두고 “주장이 새롭고 신선하고 흥미 있다”면서도 “2018년 고용시장 충격을 들어 실패 또는 실수라고 단정한 것은 정책 평가로서는 매우 아쉽다”고 했다. 소주성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사실상 판가름 났는데도 ‘실패한 것이 아니다’라고 다시 항변한 것이다. 5년 전 대통령이었을 때로 회귀한다 해도 최저임금을 올렸을 분위기다. 소주성만큼 실패로 확인된 정책이 탈원전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에너지 가격이 폭등하자 문 정부 탈원전 정책의 모델이던 독일을 비롯해 대다수 선진국들이 낡은 원전의 수명을 늘리고, 새 원전을 지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한국에선 싼 원전의 비중을 줄이고 비싼 액화천연가스(LNG) 발전을 늘린 영향으로 한전의 적자가 폭증하고, 전기요금이 오르고 있다. “월성 1호기 영구 가동 중단은 언제 결정할 계획인가요”라는 대통령의 댓글에 화들짝 놀라 반응한 관계부처 장관, ‘죽을래 과장’, ‘신내림 서기관’은 지금 재판을 받고 있다. 이 모든 걸 지켜보고 그때로 돌아간다면 다시 같은 댓글을 달 것인지 문 전 대통령에게 묻고 싶어진다. 최근 그는 “부디 도를 넘지 않길 바란다”라는 글을 SNS에 올렸다.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과 관련해 서훈 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에게 구속영장이 청구된 직후다. 자신을 향한 수사의 칼날이 불쾌하더라도, 명확한 증거도 없이 ‘월북자 가족’ 낙인이 찍힌 이들의 마음을 생각하면 내놓기 힘든 반응이다. 그들의 억울함에 공감하고, ‘내가 그때 달리 판단했다면…’ 하고 돌아보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다니엘 핑크는 ‘후회의 재발견’이란 책에서 “후회는 건강하고 보편적이며 인간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후회는 가르침을 준다”고 했다. 어느 정부, 어떤 대통령도 정책에 실패할 수 있다. 국민을 화나게 하는 건 실패 자체가 아니라 ‘그때로 돌아가도 똑같이 할 것’이라는 그들의 후회를 모르는 태도다. 진심 어린 후회가 뭔지 배우려면 회귀·빙의·환생이라도 필요한 걸까.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2-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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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박중현]비혼 축의금

    “친구들 결혼 때마다 꼬박꼬박 내왔다면 본인이 ‘비혼(非婚)주의’를 선언하고 요구할 경우 당연히 줘야 한다.” “축하하려고 낸 거지 순번 정해 타려고 곗돈 부은 건 아니잖나. 돈 아까워 회수하겠다는 심보다.” 몇 년 전부터 온라인 커뮤니티에 자주 논쟁거리로 등장하는 비혼 축의금 논란의 찬반양론은 이렇게 요약된다. 중장년 세대에겐 농담처럼 들릴 수 있지만 ‘공정’을 중시하는 MZ세대 솔로 청년들은 정색하는 문제다. ▷작년 1월 PD 겸 방송인 재재가 한 TV 예능프로그램에 나와 자신의 ‘비혼식(式)’ 경험을 공개했다. 친구들을 모아 비혼을 선언하고 축의금도 받았다고 했다. 올해 4월에는 한 인터넷 동호회에 ‘비혼이니까 축의금 안 내겠다는 친구’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고등학교 동창 중 하나가 첫 번째로 결혼하는데 다른 친구가 “나는 결혼하지 않을 거니까 축의금을 내지 않겠다. 결혼식 참석은 하되 밥도 안 먹겠다”고 했다는 내용이다. 나중에 번거롭게 비혼 선언하고 축의금을 돌려받느니 아예 처음부터 안 내겠다는 거다. ▷결혼에 대한 청년들의 생각이 근본적으로 달라지다 보니 이런 일이 생겼다. 통계청의 ‘2022년 사회조사’에 따르면 결혼을 ‘반드시 해야 한다’거나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결혼 안 한 여성은 22%, 결혼 안 한 남성은 37%뿐이다. 결혼하지 않는 이유로는 남성의 35%, 여성의 22%가 ‘결혼 자금 부족’을 들었다. 경제적 부담 때문에 결혼을 피하는 사람이라면 특히 주변 사람들의 결혼에 부담스러운 축의금을 내는 게 부당하다고 느껴질 것이다. ▷LG유플러스가 내년 1월부터 비혼 직원에게 기본급의 100% 축의금, 유급휴가 5일을 주기로 결정하면서 논란이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이 회사는 근속 5년 이상, 만 38세 이상 직원이 사내 경조 게시판에 ‘비혼 선언’을 등록하면 결혼하는 직원과 동일한 혜택을 주기로 했다. 다만 ‘먹튀’를 막기 위해 축의금 등을 받고 2년 안에 이직하면 페널티를 준다. 다른 직원과 형평성을 고려해 나중에 생각이 바뀌어 결혼하더라도 중복 지원은 하지 않는다. ▷롯데백화점도 올여름 만 40세 이상 결혼 안 한 직원에게 경조금과 휴가를 주는 제도를 도입했고, 결혼식 화환 대신 반려식물을 보내주기로 했다. 매년 ‘비혼 선언의 날’을 정해 신청한 직원들에게 유급휴가와 축의금을 주는 외국계 화장품 회사 한국지사가 화제가 된 적도 있다. 기업들까지 독신자를 ‘아직 결혼 못한’ 미혼(未婚)이 아니라 ‘결혼 안 하기를 선택한’ 비혼으로 보기 시작했다. 이제 비혼 축의금에 거부감을 드러냈다간 ‘꼰대’란 소리를 듣게 될지도 모른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2-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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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李 ‘사이다’ 일산대교 무료화의 텁텁한 뒤끝[오늘과 내일/박중현]

    전 국민이 이태원 핼러윈 참사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지난주 경기 고양 일산, 김포 주민 외에는 별 관심이 없는 뉴스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일산대교를 지나는 차에 통행료를 물리는 게 타당한가를 따진 일산대교 주식회사와 경기도의 소송 결과다. 작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대선에 출마하려고 경기지사직을 던지면서 임기 중 마지막 결재로 통행료를 무료화한 데 대한 1심 판결이었다. 결과는 일산대교 측 승리. 지난해 10월 26일 당시 이 지사의 조치에 지역 주민들은 환호했다. 한강 다리 가운데 유일하게 비싼 통행료를 받는 일산대교를 지나다니며 쌓인 불만을 단번에 털어내는 사이다 결정처럼 보였다. 150만 지역 표심에도 영향을 미쳐 이 대표의 대권 행보에 날개를 달아줄 터였다. 하지만 그가 내린 경기도의 공익처분으로 시작된 무료 통행은 곧바로 제동이 걸렸다. 직후 일산대교 측이 낸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경기도가 2차 공익처분을 내려 무료 통행을 연장했지만 일산대교 측도 다시 가처분 신청을 했고, 이 또한 받아들여져 작년 11월 18일 통행료는 되살아났다. 경기도는 일산대교가 총 22일간 받지 못한 통행요금 18억 원을 도민 세금으로 물어줘야 했다. 그리고 지난주 수원지법 행정4부는 “통행료가 부담되는 것은 사실이나, 그 정도가 이용자 편익에 대비해 기본권이 제약될 정도로 크다고 보기 어렵다”면서 일산대교 측 승소 판결을 내렸다. 경기도의 3전 3패다. 후임 민주당 소속 김동연 지사가 항소 방침을 밝혔지만 법원의 일관된 판단을 볼 때 2심 승소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애초부터 상대가 만만치 않았다. 일산대교 주식회사는 국민연금의 100% 자회사다. 2008년 다리를 준공해 30년간 운영해 투자금을 회수하려던 대형 건설사들이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어려움에 빠지면서 운영권을 국민연금에 넘겼다. 8년 적자를 내다가 간신히 흑자로 돌아선 이 다리를 지자체가 권한을 행사해 무료화할 경우 미래에 벌어들일 수입까지 물어줘야 한다. 시장이 평가하는 가치는 6000억∼7000억 원 정도다. 결정 당시 이 대표는 “보상 금액은 2000억 원대”라며 가치를 깎아내렸지만 제값을 안 치를 경우 국민의 노후를 책임지는 국민연금이 손해를 본다. 경기도 결정을 순순히 받아들였다간 배임 문제도 발생한다. 작년 문재인 정부의 국민연금이 가처분 신청과 소송을 낸 이유다. 경기도가 제값을 치르려면 관련 지자체들과 함께 큰돈을 나눠 내야 하는데 다리를 주로 이용하는 이 지역 운전자를 위해 다른 지역 주민, 비운전자가 낸 세금을 써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이 대표는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이 건이 쉽게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국민연금이 정권의 눈치를 보고 알아서 일산대교의 미래 가치를 축소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다만 큰 후유증이 따른다. 지난 정부가 담당 공무원과 한국수력원자력을 윽박질러 월성 원전 1호기 경제성을 낮춰 잡음으로써 수명보다 일찍 폐쇄했을 때 바로 그런 식이었다. 일산대교 건설은 김대중 정부 때였던 2002년 새정치국민회의 소속 임창열 경기지사가 결정했다. 당시 경제성이 낮게 평가돼 정부 예산 대신 민간자본을 끌어들여야 했다. 기업의 투자 없이는 세워지지 못했을 다리다. 20년 지나 그런 기억은 희미해지고 통행료 부담은 남았다. ‘사이다 맛 포퓰리즘’이 먹히기 딱 좋은 상황이다. 공공 부문이 상황에 따라 안면을 싹 바꾸는 일이 자주 생기면 더 이상 한국에 일산대교 같은 다리는 지어지기 어렵게 된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2-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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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박중현]‘코인계 워런 버핏’의 몰락

    플로리다주 비스케인만 해변에 위치한 미국프로농구(NBA) 마이애미 히트 안방구장의 이름은 ‘FTX 아레나’다. 거래량 세계 3위, 미국 1위 가상화폐 거래소 소유주 샘 뱅크먼프리드(30)가 작년에 1억3500만 달러를 주고 명명권을 구입해 간판을 고쳐 달았다. 코인 투자자들은 “사이버 공간에서 가상화폐로 돈을 벌어 현실 세계에 꿈의 구장을 사들였다”고 환호했다. ▷이 곱슬머리 청년은 재작년 포브스 선정 미국 400대 부자 중 32위를 기록했다. 20대로는 유일했다. 매사추세츠공대(MIT)를 졸업하고 월가 트레이더로 일하다가 2019년 FTX를 세운 지 2년 만이었다. ‘코인계의 워런 버핏’이란 명예로운 별명까지 얻었다. 하지만 FTX 파산 사태로 1주 전 160억 달러(약 21조1000억 원)에 달했던 그의 재산은 이제 0원이 됐다. ▷FTX는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든다”는 설립 목표에 따라 수수료 수입의 1%를 기부해 왔다. 공식 석상에도 반바지 차림으로 등장하는 수더분한 MZ세대 가상화폐 스타에 청년세대는 열광했다. 이런 면모도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사석에서 무례한 말투를 썼다는 증언이 쏟아진다. 급성장 비결이 정치권 로비라는 말도 나온다. 최근 미국 중간선거 직전 그는 정치후원자 순위 6위에 올랐는데 그의 회사는 500억 달러(약 66조 원)의 빚을 지고 있었다. ▷밖에선 코인의 제왕으로 추앙받았지만 업계 안에서는 미운털이 박혔다. 정부의 가상화폐 통제 강화에 찬성했기 때문이었다. 파산의 직접 계기도 업계에서 시작됐다. 1위 거래소 바이낸스는 지난주 FTX 자체 발행 코인의 신뢰성을 문제 삼아 모두 처분했다. 미국 출생인 뱅크먼프리드는 바이낸스 최고경영자 자오창펑이 중국계란 걸 조롱하곤 했는데 파산 직전 자오는 그의 지원 요청을 뿌리쳤다. ▷이번 사태로 테라·루나 폭락 사태도 재소환됐다. 권도형 테라폼랩스 대표(31)는 알고리즘으로 가치 하락을 막는다는 ‘스테이블 코인’을 발행해 거물이 됐다가 5월 가치 폭락으로 투자자들에게 400억 달러(약 53조 원)의 손실을 끼쳤다. “실패와 사기는 다르다”며 ‘폰지 사기꾼’이란 비판을 반박했던 권 대표는 현재 해외 잠적 상태다. ▷가상화폐 가격은 투자자의 신뢰가 무너지는 순간 폭락하곤 한다. 뱅크먼프리드는 고객자금 일부를 착복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FTX에 투자한 글로벌 금융회사가 많아 ‘코인판 리먼브러더스 사태’ 가능성도 제기된다. 블록체인 기술 발전을 꾀하면서도 투명성, 안정성을 보장하기 위해 국내 가상화폐 거래소의 재무 상태, 자산 건전성을 재점검해야 한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2-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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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박중현] “100년 만의 최장 침체”

    “영국 경제가 100년 만에 가장 긴 경기침체에 빠질 수 있다.” 지난주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이 33년 만의 자이언트스텝으로 기준금리를 올리면서 내놓은 전망이 세계를 놀라게 했다. 영란은행이 예상한 침체 지속기간은 올해 3분기부터 내후년 중반까지 2년. 선진국들의 과거 평균 침체기간이 1년이 안 된 걸 고려하면 갑절 이상 길고 고통스러운 침체의 시작이다. ▷영국은 브렉시트(Brexit) 후유증까지 겹쳐 유럽 선진국 중 물가 상승률이 최고 수준이고, 연말에는 11%까지 오를 전망이다. 이에 대응해 영란은행은 작년 말부터 8번 연속 기준금리를 인상했다. 침체와 실업 증가를 감수하고라도 물가부터 끌어내리려는 것이다. 이로써 올해 3%대인 영국의 성장률은 내년에 0%대로 떨어질 전망이다. ▷코로나19가 터진 재작년 영국의 성장률(―9.9%)은 대혹한(Great Frost)이 발생한 1709년 이후 311년 만에 최악이었다. 작년에는 GDP가 7.5% 반등했는데 2차 세계대전 발발로 생산시설이 풀가동된 1941년 이후 최고였다. 올해는 리즈 트러스 전 정부의 설익은 감세정책으로 파운드화 폭락 사태를 겪었다. 전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롤러코스터 경제다. ▷경기는 이렇게 ‘확장-정점-침체-저점’ 사이클을 탄다. 통상 2개 분기 연속 GDP가 줄면 침체로 보지만 다른 요소도 고려하기 때문에 정점, 저점이 언제인지는 한참 뒤 알게 된다. 하지만 지난주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물가를 잡기 위해 ‘천천히, 하지만 더 오래, 더 높게’ 기준금리를 높이겠다고 밝히면서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내년은 물론이고 내후년까지 글로벌 침체가 이어질 것이라는 점이다. ▷2차 대전 후 12차례 미국의 경기순환에서 확장기간은 평균 64.2개월, 침체기간은 11.1개월이었다. 침체가 닥치면 정부가 재정을 풀고, 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내려 경기를 부양하기 때문에 확장보다 침체가 짧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부터 재작년 2월까지 128개월간 확장하던 미국 경기는 코로나19가 발생했을 때 단 두 달 주춤했다가 정부가 막대한 예산을 풀자 확장으로 돌아섰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듯 오랜 경기확장이 결국 긴 침체라는 후유증을 불렀다. 최근 들어 세계경제 사이클과 ‘디커플링’이 심해진 중국도 사정이 좋지 않다. 수출 상대국 대부분이 침체에 빠지면서 한국의 내년 성장률도 1%대로 추락할 것이란 전망이 쏟아진다. 경기침체와 고물가가 동시에 몰아치는 긴 빙하기가 다가오고 있다. 혹한을 이겨낼 체력을 갖추지 못하면 선진국 초입에서 다시 중진국으로 떨어질 수 있는 험로에 한국경제가 서 있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2-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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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박중현]한국판 ‘말뫼의 눈물’

    스웨덴은 조선업이 일찍부터 발달한 나라였다. 1885년에 어뢰를 탑재한 잠수정을 세계에서 처음 만들었을 정도다. 하지만 조선업을 주도하던 최남단 항구도시 말뫼는 1970년대 일본, 한국의 조선업에 밀려 빛을 잃기 시작했다. 말뫼의 대표 조선소인 코쿰스에 1973년 세워졌던 높이 140m의 골리앗 크레인은 1987년 조선소 파산 후 오랫동안 무용지물로 남아 있다가 2002년 현대중공업에 팔렸다. 가격은 단돈 1달러였다. ▷세계 조선업의 주도권이 유럽에서 동아시아로 넘어간 걸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현대중공업이 골리앗 크레인을 해체해 울산행 배에 싣던 날 스웨덴 국영방송은 레퀴엠을 튼 채 중계방송을 했다. 조선업 붕괴로 인한 실업 증가와 인구 감소를 겪고 있던 말뫼의 시민들은 이 장면을 지켜보며 눈물을 흘렸다. 이름하여 ‘말뫼의 눈물’이다. ▷2010년 전북 군산시에 세계 최대 규모 독과 골리앗 크레인을 갖춘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가 준공됐다. 준공식도 열기 전에 배를 만들어 팔았을 정도로 경기가 좋았다. 하지만 이듬해부터 시작된 조선업 장기 불황으로 2017년 7월에 결국 가동이 잠정 중단됐다. 근로자 5000여 명이 일자리를 잃고, 협력업체 90%가 문을 닫거나 군산을 떠나면서 ‘한국판 말뫼의 눈물’이란 말이 나왔다. 다음 해인 2018년에 한국GM 군산공장까지 폐쇄돼 지역경제는 더 황폐해졌다. 그랬던 군산조선소가 지난달 28일 5년 3개월 만에 재가동 선포식을 열었다. ▷당초 계획보다 2개월 앞당겨진 이번 재가동은 수주 풍년 덕에 가능했다. 현대중공업의 지주회사인 한국조선해양은 올해 들어 31조4500억 원(184척)에 이르는 선박 주문을 받았다. 연간 목표를 26.5% 웃도는 수치이고, 작년에 이어 2년 연속 초과 수주다. 올해 9월 현재 세계에서 발주된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의 82%를 우리 업체들이 수주했을 정도로 한국의 조선업이 다시 살아났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LNG 운송용 선박 수요가 늘어난 데다 고부가가치 선박 제조 기술력에서 한국이 중국에 크게 앞서 있기 때문이다. ▷‘말뫼 스토리’는 눈물로 끝나지 않았다. 조선업 붕괴 후 절치부심한 말뫼시는 1998년 버려진 조선소 땅에 말뫼대를 세우고 벤처 창업을 지원했다. 친환경 도시를 목표로 470km의 자전거 길도 만들었다. 고급 인재와 함께 세계 최대 가구업체인 이케아 본사 등 유럽연합(EU)의 주요 기업이 몰리면서 말뫼는 지금 제2의 중흥기를 맞고 있다. 군산이 조선소 재가동에서 멈추지 않고 말뫼처럼 국내외 청년들이 몰려드는 활력의 도시로 거듭나길 기대한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2-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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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중현]대통령 임기 1년과 바꿀 만한 정책들

    반쪽이 텅 빈 국회 본회의장에서 시정연설을 할 때 윤석열 대통령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극단적으로 둘로 쪼개진 나라에서 0.73%포인트 차로 대통령이 된 만큼 각오를 단단히 했다고 해도 속이 편치는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국정철학이 담긴 첫 예산안을 들고 연단에 올랐는데 헌정사상 첫 야당 보이콧이라니. 혹시 이런 걱정에 식은땀이 나진 않았을까. ‘이러다 공약 하나 실현 못하고 임기 5년이 끝나면 어떻게 하지….’ 대통령이 스타일을 구긴 정도면 차라리 다행이다. 이재명 대표를 향한 검찰 수사를 야당 탄압으로 규정한 거대야당 더불어민주당은 현 정부가 하는 일이라면 뭐든 막아설 기세다. 그 바람에 국회 동의가 필요한 ‘윤석열표 정책’들은 줄줄이 무산 위기다. 올해 1주택자에 대한 종합부동산세 경감은 법 개정 시한을 넘겨 사실상 무산됐다. 대선 기간 중 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 대표가 여러 차례 완화를 약속한 사안인데도 그렇다. ‘민간이 끌고 정부가 미는 역동적 경제’의 핵심 과제인 법인세 최고세율 인하도 난망한 상황이다. 문재인 정부가 3%포인트 올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21.2%)보다 크게 높아진 25% 법인세율을 원상복구하자는 것인데도 야당은 ‘초부자 감세’라며 절대 반대다. 미국 유럽연합(EU) 중국 일본 대만 정부가 특단의 반도체산업 육성 방안을 추진한다는 뉴스가 날마다 쏟아져서 웬만하면 여야 만장일치로 ‘K칩스법’을 통과시킬 만도 한데 국회 논의는 전혀 진척되지 않는다. 민주당은 지역화폐 등 포퓰리즘성 예산이 삭감된 것 등을 문제 삼아 ‘예산전쟁’까지 벌이겠다고 한다. 민주당의 정신적 지주이자, 윤 대통령이 “가장 존경하고 좋아한다”는 노무현 대통령이었다면 “대통령 못해 먹겠다”고 역정을 냈을 상황이다. 지난 정부와 이 대표에 대한 적폐청산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부 우파 지지층에 ‘정부 정책 마비’는 별 걱정거리가 아닐 수 있다. 내년까지 ‘공정과 상식’을 철저히 실현해 내후년 4월 총선에서 승리하면 모두 해결될 문제라고. 하지만 30% 안팎을 맴도는 대통령 지지율, 민주당 몽니에도 늘지 않는 국민의힘 지지 기반을 고려할 때 총선 승리는 쉽지 않아 보인다. 2년 취임덕에 이은 3년 레임덕이 올 가능성이 낮지 않다는 뜻이다. 그때가 되면 야권은 ‘이룬 게 아무것도 없다’며 대통령과 여당을 공격할 것이다. 플랜B가 필요한 이유다. 총선 후에도 여야의 극한 대치가 계속돼 ‘5년 무성과 정부’ 가능성이 커질 때 쓸 수 있는 카드 중 하나가 대통령 4년 중임제 개헌이라고 생각한다. 성과 없는 5년을 꼭 해야 할 일을 해낸 4년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대통령 임기 1년과 맞바꿔서라도 꼭 해내야 할 정책이 바로 연금개혁과 재정준칙 도입이다. 현 정부 치하에서 하루라도 더 살고 싶지 않은 야당 지지층이 두터운 만큼 야권도 호응할 가능성이 작지 않다. 나라의 미래를 고려하면 누군가 당장 총대를 메야 하지만 ‘표 의식하는 정치인은 절대 못 한다’는 게 연금개혁이다. 정치권에 빚진 게 가장 적고 이미 대통령 자리에 있는 윤 대통령이 적임자다. 대통령이 이번 시정연설에서 ‘재정 건전성’을 강조했지만 헌법, 법률이 정하는 재정준칙을 못 만들면 돈 퍼주기를 선호하는 정권이 들어서는 순간 모두 허사가 된다. 물론 현 정부의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았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태가 계속된다면 YS의 금융실명제, DJ의 인터넷 강국, 노무현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같이 나라의 물길을 바꾼 정책 업적은 기대하긴 어렵다. 그래서 더 절실해야 하고, 꼭 해야 할 일에만 집중해야 한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2-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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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금시장 레고랜드 쇼크[횡설수설/박중현]

    “강원도 관광은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지평을 열 것입니다.” 올해 3월 말 춘천시 의암호 중도에서 열린 레고랜드 준공식에서 최문순 당시 강원지사는 감개 어린 표정으로 축사를 했다. 도지사가 된 첫해 시동이 걸린 레고랜드 사업이 11년의 긴 임기 종료를 3개월여 앞두고 비로소 끝났기 때문이다. 5월 5일 어린이날에 맞춰 문을 연 레고랜드는 초등학생 자녀와 부모가 함께 갈 만한 테마파크다. ▷덴마크 조립식 장난감 레고를 테마로 한 이 놀이공원이 이번 주 한국 자본시장을 뒤흔든 나비 효과의 진원지가 됐다. 강원도와 레고랜드 운영사인 영국 멀린엔터테인먼트그룹이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출자해 만든 강원도중도개발공사(GJC)의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이 문제였다. GJC는 공사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부동산 자산 등을 담보로 재작년에 2050억 원어치의 기업어음을 발행했다. 강원도가 지급보증을 선 이 어음을 10여 개 증권사가 샀다. ▷이 기업어음 지급 기일이 지난달 29일이었다. 그런데 7월 취임한 김진태 도지사가 지급을 거절했다. 여기에 더해 강원도는 법원에 GJC의 기업회생을 신청하겠다고도 밝혔다. 회생 절차를 통해 회사 자산을 팔아 빚을 갚겠다는 취지였다. 민주당 소속 최 전 지사가 레고랜드 사업을 추진하면서 생긴 빚을 국민의힘 소속 새 지사가 막대한 예산을 써가며 떠안을 생각이 없다는 뜻으로 시장은 받아들였다. 기업어음은 이달 6일 최종 부도 처리됐다. ▷급격한 금리 인상, 기업들의 실적 악화 속에서 빌려준 돈이 떼일까 봐 불안해하던 투자자들은 이 소식에 황급히 지갑을 닫았다. 국가와 같은 수준으로 신용등급을 인정받는 지방자치단체가 보증한 어음이 부도를 낸 데 쇼크를 받았다. 레고랜드 기업어음을 많이 들고 있거나, 부동산 개발사업 대출이 많은 증권사들이 시장에 매물로 나왔다는 말이 돌고 있다. 분양시장이 얼어붙어 자금이 달리는 일부 건설업체들도 덩달아 부도설에 휩싸였다. 강원도는 뒤늦게 “예산을 편성해 내년 1월 29일까지 돈을 갚을 것”이라고 했지만 자본시장은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세계경제는 지금 미세한 충격이 막대한 파급 효과를 낳을 수 있는 살얼음판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 관계자, 월가의 투자은행 수장, 저명한 경제학자의 자극적인 말 한마디에 각국 주가와 환율이 요동을 친다. 엔-달러 환율 150엔 선이 깨지자 1997년 태국에서 시작돼 한국 등으로 순식간에 번졌던 ‘아시아 외환위기’에 대한 두려움이 다시 커지고 있다. 중앙정부는 물론이고 지방정부, 금융시장 참가자와 기업들 모두 최대한 신중히 판단하고 움직여야 한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2-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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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중현]노벨을 라이트 형제로 바꾼 순발력 발휘할 때

    “노벨이 9·11테러를 설계했다. 이런 황당한 소리가 국민의힘에서 나오고 있다.” 작년 10월 이재명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주자는 “이 (대장동 개발) 설계는 제가 한 것”이라는 과거 자신의 발언을 근거로 제기되는 의혹에 이렇게 반박했다. “노벨이 화약 발명 설계를 했다고 해서 알카에다의 9·11테러를 설계한 것이 될 수는 없다”고도 했다. 4일 뒤 그는 같은 주장을 펴면서 표현을 조금 바꿨다.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 설계가 알카에다의 9·11테러 설계가 될 수 없다.” 주변에서 ‘9·11은 사실 비행기 충돌 테러’라는 얘기를 들었을 것이다. 미세한 리스크까지 빠르게 대처하는 그의 순발력과 학습능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1년이 지난 지금 그는 제1야당 대표다. 첫 정기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그는 기본소득 공약을 확장한 ‘기본사회’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소득하위 70% 노인에게 주는 월 30만 원 기초연금을 모든 노인으로 확대하고, 금액도 40만 원으로 올리는 방안도 밀어붙이고 있다. 사실상 65세 이상 노인 대상의 기본소득이다. 대통령은 되지 못했어도 169석 거대야당 대표로서 대선 공약을 현실화하는 모양새다. 윤석열 대통령도 기초연금 인상을 공약했지만 취임 후 재정부담 때문에 국민연금 개혁과 연계한 단계적 인상으로 방향을 틀었다. 문제는 그가 기본소득 공약을 내놓던 1년 전과 경제환경이 크게 달라졌다는 거다. 3·9대선 직전 터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국제유가, 식량 가격이 폭등했다. 코로나19 이후 풀린 과잉 유동성까지 겹쳐 인플레이션이 심각해지자 미국은 기준금리를 급격히 올리고 있다. ‘킹 달러’로 인해 자국 화폐 가치가 떨어지자 대다수 나라들이 금리를 높여 환율, 수입물가 상승을 막으려는 ‘역(逆)환율 전쟁’에 뛰어들었다. 경제위기에 대해 급증하는 불안감이 약한 고리를 뚫고 터져 나온 게 영국 파운드화 폭락 사태다. 리즈 트러스 신임 영국 총리가 파격적 감세안을 내놓자 글로벌 금융시장은 경기를 일으켰다. 준(準)기축통화인 파운드화 가치는 사상 최저로 떨어지고, 영국 국채금리는 폭등했다. 윤석열 정부의 법인세, 소득세 감세안을 ‘초부자 감세’로 규정해 저지하겠다고 공언한 민주당은 망가진 영국 감세안에 쾌재를 불렀을지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감세가 아니었다. 국가채무비율 100%가 넘는 만성 적자국이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고 5년간 73조 원 감세, 98조 원 보조금으로 돈을 풀겠다고 하자 급등한 국가부도 리스크에 금융시장이 반응한 게 사태의 본질이다. 국제 신용평가사들은 영국의 국가신용등급 강등까지 예고하고 있다. “국가채무비율 100%가 넘으면 문제가 생기나”라고 했던 이 대표는 지금 자신이 대통령으로서 기본소득 공약을 실천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길 바란다. 한국은 영국보다 채무비율이 낮지만 증가 속도는 선진국 중 1등이고, 기축통화국도 아니다. 수출주도형 국가에서 무역수지는 계속 적자인데, 매년 수십조 원 적자국채를 찍어서라도 전 국민에게 기본소득을 나눠준다는 계획을 발표한다면 ‘한국 원화 폭락 사태’를 피할 수 있을까. 대통령은 아니어도 이 대표는 거대야당을 움직여 단독으로 정책을 구현할 힘을 갖고 있다. 그래서 ‘노인 기본소득’인 기초연금 인상은 위험성이 더 크다. 국제 금융계의 눈으로 보면 한국 경제에 충격을 주는 정책을 추진하는 주체가 여당이든 야당이든 차이가 없다. 작은 리스크에도 민감한 이 대표가 특유의 순발력을 발휘해 기초연금 인상 방침을 재고하길 기대한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2-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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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중현]착한 정책들의 비정한 결말

    작년 12월 퇴임 직전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의 지지율은 70%가 넘었다. 16년간 장기집권하면서 “남자도 총리 될 수 있나요”라는 농담을 낳을 정도로 국민들로부터 큰 신뢰를 받았다. 노동개혁을 통해 독일의 경제 체질을 바꿨고, 남유럽 재정위기 등 국제 정세의 고비마다 대외적으로 강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9개월이 지난 지금 그에 대한 높은 평가는 급속히 퇴색했다. 그가 추진했던 러시아 천연가스(LNG) 의존 정책이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치명적 실책으로 판명됐기 때문이다. 독일 내의 탈원전, 친환경 여론을 의식해 원전을 멈춰 세우는 ‘착한 정책’을 펴면서 대신 싼 천연가스라는 푸틴의 사탕 발린 독약을 삼켰던 것이다. 독일의 전기요금은 1년 새 10배 올랐고, 겨울나기에 대비해 독일인들은 장작을 사 모으고 있다. 선한 선택처럼 보이던 정부의 정책이 시간이 흘러 명백한 실수로 드러나거나, 국민을 기만한 것으로 확인되는 일은 한국에서 더 흔하다. 지난 정부의 무모한 탈원전 정책 탓에 붕괴됐던 원전산업은 정권교체로 그나마 기사회생의 기회를 맞았다. 하지만 뒷감당을 고려하지 않고 밀어붙인 여러 선한 정책들의 후유증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작년 1월 신년사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은 “드디어 어두운 터널의 끝이 보인다”면서 전 국민 코로나 백신 무료접종을 약속했다. 선진국들은 화이자, 모더나 백신을 속속 확보하는데 한국은 백신이 언제 수입될지조차 몰라 원성이 커지자 선심부터 쓴 것이다. 물론 코로나는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발생 후 2년 반 동안 백신 접종, 검사, 치료에 들어간 비용은 총 7조6000억 원으로 이 중 75%를 건강보험공단이 부담한 것으로 최근 집계됐다. 비용의 4분의 3이 근로자, 기업이 낸 건강보험료에서 나간 것이다. 나머지 4분의 1도 세금이어서 ‘무료’란 말은 애당초 어불성설이었다. 경증환자의 초음파·MRI 검사비까지 지원해 건보기금을 부실화한 ‘문재인 케어’와 함께 내년 건보료율이 처음 7%를 넘기도록 만든 원인이다. 지난 정부가 작년 7월 법정 최고금리를 20%로 내릴 때 전문가들은 좋은 의도와 달리 대부업체의 저신용자 대출을 위축시켜 불법 사금융 피해를 늘릴 것이라고 우려했지만 문 정부는 정책을 강행했다. 올해 들어 인플레이션에 대응해 기준금리를 끌어올리면서 조달금리가 급등하자 대부업체들은 신용등급이 낮고 담보가 없는 이들에 대한 대출부터 멈췄다. 3년 전 대학 강사의 고용 안정을 보장하는 고등교육법 개정으로 재정 부담이 커진 대학들은 전임 교원들의 강의를 늘리는 대신 시간강사의 고용을 줄였다. 제도권에서 대출을 거부당한 저신용자 십수만 명은 불법 사채의 수렁으로 내몰리고 있다. 건강보험의 지원을 애타게 기다리던 희귀질환 환자와 가족은 절망에 빠졌다. 대학에서 강의하던 많은 시간강사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무책임하게 착한 척하는 정책의 슬픈 결과다. 구조개혁에는 시동도 못 걸고 낮은 지지율의 늪에 빠진 윤석열 대통령은 요즘 민생과 ‘약자 복지’를 강조하며 연일 착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지난 정부가 확대한 지역화폐, 공공일자리 등 착한 정책 재원이 깎인 내년 정부 예산안을 놓고 “참 비정한 예산안”이라고 했다. 많은 시행착오를 겪고도 여전히 착한 정책에 집착하는 정치인들에게 최근 작고한 ‘경영의 신’ 이나모리 가즈오 교세라 명예회장이 남긴 금언을 곱씹어 보길 권한다. “작은 선함(小善)은 큰 악(大惡)과 닮았고, 큰 선함(大善)은 비정(非情)과 닮아 있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2-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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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재명의 민주당’이 답해야 할 질문들[오늘과 내일/박중현]

    이번 주말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의 결과는 확대명(확실히 대표는 이재명)으로 굳어졌다. 대선 후보 시절이던 작년 11월 “민주당이라는 큰 그릇 속에 갇혀 가는 거 아닌가 생각했다. 민주당의 이재명이 아니라 이재명의 민주당으로 만들어가겠다”고 했던 말이 대통령이 아닌 거대야당 대표가 됨으로써 실현되는 셈이다. 대선에 진 후보가 반년이 채 안 돼 당 대표가 되다 보니 새 정부 출범 100일을 넘긴 지금도 그의 대선공약은 유권자 머릿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예전의 낙선 후보들이 외유하거나, 한동안 침잠해 시야에서 사라진 사이 국민의 기억이 깨끗이 리셋된 것과 다른 점이다. 대표 경선의 관심이 친명, 비명의 충돌에 집중되면서 ‘이재명의 민주당’이 어떤 정책 색채를 띨지는 분명히 드러나지 않았다. 이 의원이 토론회 등에서 현 정부 경제정책을 비판한 발언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대선 전후로 급변한 나라 안팎 경제 상황에 따라 달라진 국민의 눈높이와 이 의원의 시각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감지된다. 법인세 최고세율을 25%에서 22%로 낮춘다는 윤석열 정부 세제개편에 대해 이 의원은 “부자들에 대한 감세” “슈퍼 리치, 초대(超大)기업에 대한 감세”라고 비판했다. 9월 국회에서 민주당과 정부·여당이 정면으로 부딪칠 사안이다. 문재인 정부가 올린 한국의 법인세 최고세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 21.2%보다 높다. 한국보다 세율이 낮은 미국 대만 일본 등은 반도체, 배터리 산업을 유치, 육성하기 위해 세금 감면, 보조금 등 온갖 지원책을 쏟아붓고 있다. 치열한 글로벌 경제 전쟁을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는 국민들의 기업관과 이 의원의 기업을 보는 눈에는 메우기 힘든 격차가 있다. “고학력, 고소득자, 소위 부자라고 하는 분들은 우리(민주당) 지지자가 더 많다”는 논란의 발언을 보면 본심이 뭔지 더 헷갈린다. 15년 전 정해진 세율 때문에 인플레이션 시기에 저절로 세금이 늘어 중산층 실질소득이 줄고 있는데 이걸 조정하는 걸 부자감세라고 한다. 대선 때 완화를 약속했던 종합부동산세에 대해서도 민주당의 태도는 과거로 돌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최근 이 의원이 강조한 “부자들을 존중하는 사회”, “진보적 대중정당”은 무슨 뜻일까. 한편 민주당은 문재인 정부 정책기조를 반영했던 ‘소득주도 성장’, ‘1가구 1주택’이란 당헌의 표현을 바꾸기로 했다. 일단 멈췄지만 그 과정에서 이 의원의 대표공약이던 ‘기본소득’을 새로 넣자는 의견이 만만찮았다. 기본소득은 뜨거운 논쟁을 일으키며 국민에게 한 차례 심판을 받은 공약이다. 되살릴 의지가 남아 있다면 이 의원이 분명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 재정과 관련해선 “국가채무비율이 100% 넘으면 문제가 생기나”라고 하던 생각을 이 의원이 바꿨다는 징후가 없다. 그보다는 감세로 세수가 줄면 지역화폐, 공공 일자리에 쓸 돈이 줄어들 걸 걱정하고 있다. 이미 한국의 나랏빚은 1000조 원을 넘었고, 재정을 방만히 운영한 신흥국들은 경제파탄을 염려하는 상황이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교수는 미국 정부의 막대한 경기부양책이 야기할 인플레 효과를 자신이 과소평가했다고 공개 사과했다. 미국의 긴축, 계속되는 무역수지 적자로 1300원 선을 넘은 원-달러 환율을 보면서 이 의원은 여전히 “우리나라도 기축통화국이 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생각할까. ‘누가 되든 반드시 추진하자’고 대선 후보들이 약속했던 연금개혁에 대한 이 의원의 생각이 뭔지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재명의 민주당’은 이 모든 질문에 대답할 준비가 돼 있는가.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2-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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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중현]정치로 까먹은 점수, 정책으로 메울 순 없다

    ‘장관들이 국민이 감탄할 정책을 쏟아내 분위기를 확 바꿔줬으면….’ 지난달 20일 윤석열 대통령이 “스타 장관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대통령이 안 보인다는 말이 나와도 좋다”고 했을 때 속내는 이런 것 아니었을까. 새 정부의 진심이 담긴 정책이 국민 관심사로 떠올라 도어스테핑, 인사 논란, 여당 내홍으로 깎아먹은 점수를 만회하길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점을 전후해 벌어진 일들은 그런 바람과 많이 달랐다. 대표적 사안이 지난달 14일 금융위원회가 내놓은 채무조정 지원 방안이다. 신용 낮은 청년채무자의 대출이자를 최대 절반까지 깎아주고, 3년간 원금 상환도 미뤄주는 프로그램이 특히 논란이 됐다. 금융위로선 과거 카드사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 그랬듯 어차피 한 번은 치르고 넘어가야 할 대규모 채무조정이고, 정부 지지율이 추락하고 있는 2030세대의 마음을 돌리는 데 도움도 된다는 심산으로 서둘러 이 방안을 내놨을 것이다. 문제는 청년들마저 “빚을 내 주식, 가상화폐에 투자해서 날린 돈을 왜 세금으로 메워 주냐”며 반발한 것이다. ‘공정’에 한없이 민감한 청년들의 정서를 읽지 못해 생긴 실책이다.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을 앞두고 문재인 정부가 선수들 동의도 없이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구성을 추진하다가 청년층의 반발에 부딪쳐 허둥대던 일을 떠올리게 한다. 금융위, 금융감독원, 검찰이 함께 내놓은 공매도 대책도 뒷말이 많다. 코로나19 이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공매도를 통제한 나라는 한국뿐이고, 앞으로 증시에 더 많은 외국 자금을 끌어들이려면 공매도 규제를 풀어야 한다는 게 시장의 일반 상식이다. 그런데 더불어민주당 대표에 도전 중인 이재명 의원이 공매도를 싫어하는 개미투자자를 의식한 듯 “한시적 공매도 금지”를 옹호한 며칠 뒤 정부 대책이 나왔다. 공매도 전면 금지가 아닌 건 다행이지만 검찰이 불법 공매도를 응징한다는 발표는 ‘검찰 공화국’ 이미지를 더 강화했다. 최근엔 교육부가 취학 연령을 만 5세로 1년 앞당기겠다고 발표했다가 학부모, 교육계 이해관계자들의 반발에 부딪혀 나흘 만에 발을 빼는 일이 벌어졌다. 이명박 정부 초기 초등학교 조기 입학 방안을 불쑥 꺼냈다가 물러섰던 일의 판박이다. 대통령실이 각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온라인 국민제안을 모아 정책화하겠다고 했다가 클릭 수 조작 등이 감지됐다는 이유로 취소한 것 역시 어이없는 일이다. 이런 일들이 보름 사이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해당 부처들로부터 대통령이 직접 보고받고 관심을 표한 사안들인데 대체로 공론화 과정이 부족했고, 어느 지점에서 반발이 나올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가 허점을 찔려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정부 캐비닛에 묵혀 있던 정책을 급히 꺼낸 듯 정책 소비자의 급변하는 정서와 시류를 읽지 못하는 공무원 특유의 ‘정책 감수성’ 부족이 느껴진다. 정부의 ‘정치 성적’과 ‘정책 성적’은 비슷해야 정상이지만 한국은 사정이 많이 다르다. 소득주도성장, 부동산 정책 실패에도 40%대 지지율을 끝까지 지킨 문재인 정부가 증거다. 극단으로 갈라진 좌우 진영, 세대 간 의견 차이가 원인일 것이다. 국민들도 ‘밥 먹는 배 따로, 빵 먹는 배 따로’ 식으로 정치와 정책을 별개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그래, 빠르게 가” 식으로 공무원들을 채근하면 ‘정책 사고’가 반복돼 정부의 신뢰만 하락한다. 임기 안에 반드시 결과를 내야 할 노동 연금 교육 재정 등 큰 개혁의 동력도 약화될 것이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2022-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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