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중현]소주성보다 고약한 ‘통계주도성장’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2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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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혹 커지는 文 정부 통계 분식
좌파정책이 ‘정책거울’ 망가뜨려

박중현 논설위원
박중현 논설위원
“너희 그거 알아? 통계 방식이 달라서 그렇지 미국식으로 따지면 소련 GDP(국내총생산)가 미국보다 훨씬 많다고….” 1980년대 대학가 운동권 선배들이 신입생을 앉혀 놓고 반미(反美) 교육을 하면서 대단한 비밀이라도 알려주는 양하던 말이다. 당시 많은 좌파 지식인들도 비슷한 환상을 갖고 있었다. 물론 1991년 소련 붕괴 후 새빨간 거짓말로 드러났다. 철의 장막을 들추고 본 소련 경제는 외부에 알려진 것보다도 훨씬 형편없었다.

생산과 분배를 당 중앙이 통제하는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보고 단계마다 통계가 분식되는 일이 벌어졌다. 실현 불가능한 목표를 하달받고, 달성 못 하면 질책당하는 하급자들로선 대안도 없었다. 전국적으로 ‘제로 코로나’ 반대 시위가 발생하자 허겁지겁 ‘위드 코로나’ 체제로 전환한 중국에선 지금도 비슷한 일이 생긴다. 화장장이 미어터져도 정부가 발표하는 사망자 숫자는 턱없이 적다. 비판이 쏟아지자 결국 중앙정부 차원의 통계 발표를 중단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소득주도성장(소주성), 부동산 정책의 실패를 감추기 위해 많은 통계가 분식됐다는 의혹이 커지고 있다. 소득, 고용, 집값 등 주요 통계에 청와대 관계자들이 부당하게 개입했는지에 대한 감사원 조사가 마무리 단계다. 의심스러운 정황이 많아 ‘알고 보니 문 정부의 진짜 경제정책은 소주성이 아니라 통주성(통계주도성장)’이라는 농담까지 나왔다.

제일 이상한 일은 2018년 황수경 통계청장 교체를 전후해 벌어졌다. 문 정부가 소주성 기조에 따라 최저임금을 16.4%나 올린 그해 1분기에 저소득층 소득이 급감하고, 소득 격차가 최악으로 벌어졌다는 통계가 나왔다. 당시 문 대통령은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보고서 등을 근거로 “최저임금 인상의 긍정적 효과가 90%”라고 반박했다. 얼마 뒤 취임한 지 13개월밖에 안 된 황 청장이 바로 그 보고서를 쓴 강신욱 청장으로 교체됐다. “좋은 통계를 만들어 보답하겠다”고 한 강 청장 취임 후 가계소득 통계 방식이 바뀌어 그 이전과 소득분배 수준을 비교할 수 없게 됐다. 나중에 ‘비정규직 제로(0)’ 정책을 펴는 정부에서 비정규직이 사상 최대가 됐다는 통계가 나오자 강 청장은 “비정규직 분류 방식이 바뀌어서”라고 했다.

백미는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이 2020년 국회에서 한 집값 발언이었다. 그는 한국부동산원 전국 통계를 들어 “(문 정부 3년간) 11% 정도 올랐다고 알고 있다”고 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같은 기간 서울 전체 집값 34%, 서울의 아파트값은 52% 올랐다고 분석했다. 정부는 “통계 방식 차이”라고 했지만 어느 쪽이 진실인지 헷갈리는 사람은 없었다.

통계가 아니어도 대통령 발언 속 숫자의 진위 논란이 지난 정부에서 끊이지 않았다. 작년 1월 문 전 대통령이 신년사에서 “지난해(2020년) 한국 성장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1위”라고 자랑했는데 다른 나라 통계가 모두 나온 뒤 확인된 순위는 6위였다.

이전 정부에서도 성장률을 반올림하는 수준의 ‘통계 마사지’는 있었다. 하지만 문 정부처럼 통계 체계를 조작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적은 없다. “세상엔 세 종류 거짓말이 있는데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그리고 통계”라는 마크 트웨인의 말이 현실이 될 때에는 꼭 필요한 조건이 있다. 그릇된 정책을 선택해 놓고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잘했니”라고 다그쳐 묻는 절대권력 앞에서 통계라는 ‘정책의 거울’은 자주 거짓말을 한다. 역대급 좌파 경제정책을 추진한 정부에서 생긴 일이라는 것도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 그래서 통주성은 실패한 소주성보다 더 고약하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통계주도성장#정책거울#소득주도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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