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중현]착한 정책들의 비정한 결말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9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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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값 치르는 선한 정책 함정
‘착한 척’ 정책에 더는 속지 말아야

박중현 논설위원
박중현 논설위원
작년 12월 퇴임 직전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의 지지율은 70%가 넘었다. 16년간 장기집권하면서 “남자도 총리 될 수 있나요”라는 농담을 낳을 정도로 국민들로부터 큰 신뢰를 받았다. 노동개혁을 통해 독일의 경제 체질을 바꿨고, 남유럽 재정위기 등 국제 정세의 고비마다 대외적으로 강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9개월이 지난 지금 그에 대한 높은 평가는 급속히 퇴색했다. 그가 추진했던 러시아 천연가스(LNG) 의존 정책이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치명적 실책으로 판명됐기 때문이다. 독일 내의 탈원전, 친환경 여론을 의식해 원전을 멈춰 세우는 ‘착한 정책’을 펴면서 대신 싼 천연가스라는 푸틴의 사탕 발린 독약을 삼켰던 것이다. 독일의 전기요금은 1년 새 10배 올랐고, 겨울나기에 대비해 독일인들은 장작을 사 모으고 있다.

선한 선택처럼 보이던 정부의 정책이 시간이 흘러 명백한 실수로 드러나거나, 국민을 기만한 것으로 확인되는 일은 한국에서 더 흔하다. 지난 정부의 무모한 탈원전 정책 탓에 붕괴됐던 원전산업은 정권교체로 그나마 기사회생의 기회를 맞았다. 하지만 뒷감당을 고려하지 않고 밀어붙인 여러 선한 정책들의 후유증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작년 1월 신년사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은 “드디어 어두운 터널의 끝이 보인다”면서 전 국민 코로나 백신 무료접종을 약속했다. 선진국들은 화이자, 모더나 백신을 속속 확보하는데 한국은 백신이 언제 수입될지조차 몰라 원성이 커지자 선심부터 쓴 것이다. 물론 코로나는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발생 후 2년 반 동안 백신 접종, 검사, 치료에 들어간 비용은 총 7조6000억 원으로 이 중 75%를 건강보험공단이 부담한 것으로 최근 집계됐다. 비용의 4분의 3이 근로자, 기업이 낸 건강보험료에서 나간 것이다. 나머지 4분의 1도 세금이어서 ‘무료’란 말은 애당초 어불성설이었다. 경증환자의 초음파·MRI 검사비까지 지원해 건보기금을 부실화한 ‘문재인 케어’와 함께 내년 건보료율이 처음 7%를 넘기도록 만든 원인이다.

지난 정부가 작년 7월 법정 최고금리를 20%로 내릴 때 전문가들은 좋은 의도와 달리 대부업체의 저신용자 대출을 위축시켜 불법 사금융 피해를 늘릴 것이라고 우려했지만 문 정부는 정책을 강행했다. 올해 들어 인플레이션에 대응해 기준금리를 끌어올리면서 조달금리가 급등하자 대부업체들은 신용등급이 낮고 담보가 없는 이들에 대한 대출부터 멈췄다. 3년 전 대학 강사의 고용 안정을 보장하는 고등교육법 개정으로 재정 부담이 커진 대학들은 전임 교원들의 강의를 늘리는 대신 시간강사의 고용을 줄였다.

제도권에서 대출을 거부당한 저신용자 십수만 명은 불법 사채의 수렁으로 내몰리고 있다. 건강보험의 지원을 애타게 기다리던 희귀질환 환자와 가족은 절망에 빠졌다. 대학에서 강의하던 많은 시간강사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무책임하게 착한 척하는 정책의 슬픈 결과다.

구조개혁에는 시동도 못 걸고 낮은 지지율의 늪에 빠진 윤석열 대통령은 요즘 민생과 ‘약자 복지’를 강조하며 연일 착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지난 정부가 확대한 지역화폐, 공공일자리 등 착한 정책 재원이 깎인 내년 정부 예산안을 놓고 “참 비정한 예산안”이라고 했다. 많은 시행착오를 겪고도 여전히 착한 정책에 집착하는 정치인들에게 최근 작고한 ‘경영의 신’ 이나모리 가즈오 교세라 명예회장이 남긴 금언을 곱씹어 보길 권한다. “작은 선함(小善)은 큰 악(大惡)과 닮았고, 큰 선함(大善)은 비정(非情)과 닮아 있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정책#비정한 결말#구조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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