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은 6·25에 대해 경험이 없으셔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인지 잘 모르겠다. 왜 ‘효순이 미선이 사건’을 말하면서 천안함 사건이나 서해 공무원 피격 사건은 언급하지 않는가.” ‘새로고침 노동자협의회’ 부의장인 송시영 서울교통공사 올바른노조 위원장이 민노총 위원장의 발언을 받아치면서 한 이야기가 보름이 지나도 귓가에 맴돈다. 새로고침 노협은 지난달 출범한 30대, 사무직 중심인 MZ 노조들의 협의체다.
앞서 양경수 민노총 위원장은 2002년 발생한 효순이 미선이 사건을 언급하면서 “MZ세대로 일컬어지는 분들은 이런 대중적 반미투쟁 당시 아주 어렸거나 아예 경험해 보지 못했을 것이다. 노조 활동을 하다 보면 정치 문제 개입이 노동자, 서민의 삶을 바꾸는 데 중요한 의제라는 사실에 동의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MZ 노조가 반미, 반정부 정치투쟁을 지양하고 노동자 권익, 처우 개선이란 ‘노조의 본질’에 집중하겠다고 밝힌 데 대한 반응이었다. 표현이 좀 순화됐을 뿐 ‘젊고 경험 없는 세대라 뭘 몰라서…’라는 말처럼 들린다.
120만 조합원을 거느린 민노총은 정치권도 절절매는 거대 노조이자, 우리 사회를 쥐락펴락하는 기성 권력이다. 이들에게 “천안함, 서해 공무원 피격은 왜…”라고 당당히 묻는 MZ세대를 보면서 1980년대 대학가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좌경화 이념교육을 막 받기 시작한 대학 신입생 가운데 궁금증이 많은 이들은 북한 체제와 정권을 칭송하는 선배에게 “그럼 북한이 쳐들어와도 총 들고 싸우지 않을 겁니까”라고 묻곤 했다.
그럴 때 나오는 대답은 십중팔구 이랬다. “의미 없는 질문이다. 같은 민족인 우리에게 북한이 총부리를 겨누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기 때문에.” 이런 황당한 문답이 오가던 1980년 중후반에 태어난 세대가 지금 MZ 노조의 주축이다. 북한이 차근차근 핵 개발에 성공하고, 대륙간탄도미사일까지 갖춘 사실상 핵보유국이 되는 과정, 연평도 포격과 천안함 폭침(2010년)을 보면서 성장했다. 최근에는 김여정이 남쪽을 향해 핵미사일을 쏠 수 있다고 공언해도 북한에 싫은 말 한마디를 않는 기성 노조의 태도를 평소 가슴 깊이 담아 뒀을 것이다.
4050세대와 다른 시대를 살아온 MZ세대는 기업관도 완전히 달라졌다. 동아일보 취재팀이 최근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MZ세대의 35.1%는 기업에 ‘호감’을 갖고 있다고 답했다. 11.3%인 ‘비호감’의 3배가 넘었다. 호감 가는 기업인 유형으로는 ‘삼성·현대차 등 거대 재벌 기업의 창업자’가 1위였다. 지난해 말 화제였던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 등장인물 중에서 진양철 회장의 인기가 유독 높았던 게 우연이 아니다. 주식에 투자하는 500만 2030세대에게 대기업은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는 곳일 뿐 아니라 자산을 불려주는 원천이기도 하다.
1980년대 후반 민주화 시대에 노동운동을 시작한 60년대 출생, 80년대 학번과 그들의 이념체계를 그대로 물려받은 40대 후반이 지금 한국의 노동운동을 이끌고 있다. 젊어서 ‘대기업은 미 제국주의의 앞잡이인 매판자본’이라고 배웠고, 지금도 기업을 보는 눈은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다. MZ 노조가 경험을 더 쌓는다고 생각이 비슷해질 리가 없다.
인간의 이념은 20대에 형성돼 평생 유지되는 경향이 있다. 30년 만에 후진국에서 선진국이 된 한국 같은 사회에선 개인과 조직의 정신적 성장이 변화를 못 따라잡는 일이 자주 생긴다. 자기가 멈춰 있는 건 잊고, 시대를 앞서가는 젊은 세대에게 자꾸 뭔가 가르치려 드는 사람을 ‘꼰대’라고 한다. 지금 민노총은 MZ 노조에 충고할 때가 아니다. 뭐라도 그들로부터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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