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중현]‘니가 가라, 中東’ 외친 청년들 이번엔 다를까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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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유국 투자로 ‘2차 중동 붐’ 기대감
우리 청년들 해외로 나설 준비 됐나

박중현 논설위원
박중현 논설위원
한국에서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카타르까지 거리는 6800∼7600km. 몇 달 새 이들 산유국과 한국의 간격이 확 좁혀진 느낌이다. 작년 11, 12월 두 달간 한국인들은 카타르에서 들려오는 월드컵 소식에 귀를 바짝 기울였다. 11월 방한한 사우디 왕세자는 ‘현대판 만리장성’으로 불리는 네옴시티 건설 등과 관련해 한국 기업과 40조 원 투자협약을 맺었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이 방문한 UAE는 300억 달러의 한국 투자를 약속했다.

미국의 강한 견제를 받는 중국이 성장률·인구까지 정점을 찍고 하강세로 돌아서면서 새로운 돌파구 마련이 절실한 한국 경제는 ‘제2 중동 붐’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1970∼80년대 오일쇼크 때 중동 건설로 오일머니를 벌어들여 위기를 극복했던 ‘1차 중동 붐’ 재현에 대한 기대다. 산유국들이 기름값 폭등으로 번 돈을 ‘포스트 오일 시대’를 위해 쏟아붓는 이번 기회를 잘 활용하면 금세라도 꽉 막힌 국내 청년실업 문제의 숨통이 트일 것만 같다.

다만 걱정거리가 하나 있다. 우리 청년들이 기성세대처럼 중동 붐을 자신의 미래를 향해 열린 기회로 받아들일까 하는 거다. 먼저 중동 진출을 놓고 벌어졌던 8년 전 논란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2015년 4월 중동 순방을 마친 박근혜 대통령은 무역투자진흥회의를 주재하면서 “대한민국에 청년이 텅텅 빌 정도로 중동 진출을 해보라. 다 어디 갔느냐고, 다 중동 갔다고…”라고 했다. 성장 둔화, 청년실업 악화의 돌파구를 중동에서 찾자는 주문이었는데,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 때 중동 붐의 기억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청년들의 반응은 싸늘함을 넘어선 분노였다. 영화 ‘친구’ 유명 대사를 패러디한 ‘니가 가라, 중동’이란 말은 금세 유행어가 됐다. 사실 박근혜 대통령이 거론한 중동 일자리는 정보기술(IT), 의료 등으로 1970년대 할아버지 세대들이 맡았던 건설노동과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청년들 귀엔 ‘국내에 일자리가 없다고만 하지 말고 열사의 사막에 가서 땀 흘려 일하라’는 말로 들렸던 거다. 평소 국민과의 소통 부재, 특유의 썰렁한 꼰대 유머가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2차 붐을 통해 한국 기업들이 중동 진출을 꾀하는 산업은 원전, 방산, 플랜트, 바이오, 스마트팜 등 첨단 분야다. 사우디의 ‘미스터 에브리싱’ 빈 살만 왕세자는 한국의 게임, 콘텐츠 산업에 관심이 많아 국부펀드를 통해 카카오엔터테인먼트에 최근 막대한 투자를 결정했다. 사우디 미래도시에는 네이버의 로봇 기술이 채용될 가능성도 있다. 지난해 한국 게임에 1인당 가장 많은 돈을 쓴 나라 1, 2위는 카타르, 아랍에미리트였다.

이런 프로젝트들이 성공하려면 한국 청년 인재들이 해외에 나가 미래를 개척할 마음이 생겨야 한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을 거란 조짐이 적지 않다. 서울 등 수도권 일부 지역을 벗어나면 인재를 못 구해 “지방에선 벤처가 불가능하다”고들 한다. 중소기업·자영업자들은 “최저임금보다 더 준대도 청년 알바 씨가 말랐다”고 하소연이다. 양질의 일자리 부족, 청년인구 감소란 이유가 있긴 해도 작년 늘어난 일자리의 55%를 60세 이상이 채운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국이 겪는 문제들을 20년 정도 앞서 경험해온 일본에선 청년들이 자국 내의 친숙한 삶에 안주해 해외 유학, 근무를 기피한다는 한탄이 나온 지 오래다. 최근 코로나19가 잠잠해지면서 판교의 IT 기업들이 재택근무를 줄이자 사무실에 자주 나가는 데 반발한 젊은 직원들의 노조 가입률이 급증했다고 한다. 해외에서 일자리를 발굴하는 것보다 지금 우리 경제의 더 급한 숙제는 청년들 가슴속에 잠자는 ‘야성’을 흔들어 깨우는 것일지 모른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산유국 투자#2차 중동 붐#청년 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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