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인터뷰]29세 문명대, 선사 유적 발견한 순간 온몸에 소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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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1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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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을 바꾼 그날

동행한 한학자(漢學者)가 이상한 얘기를 자꾸 했다. 이번에 울산까지 온 것은 반고사(磻高寺·신라의 원효대사가 머문 것으로 알려진 절)의 실마리를 꼭 찾고 싶어서였다. 반구대 근처에서 수소문해 찾은 이 사람이 주변 절터를 안내하기로 돼 있었다. 그런데 무너진 탑 얘기를 해 줘야 할 사람이 “저 아래 절벽에 희미한 그림이 있다”라는 말만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혹시 마애불(摩崖佛·암벽에 새긴 불상)인가?’ 만약 그렇다면 귀한 유적이 눈앞에 있는 셈이었다. 일행에게 절터를 조사하게 하고는 일단 한학자를 따라 나섰다. 암면(巖面)은 이끼 같은 것들로 대부분 가려져 있었다. 게다가 절벽 위쪽 밭을 개간하느라 쓸려 내려온 흙탕물로 매우 지저분했다. 자세히 보니 이상한 무늬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래쪽엔 글자들도 있었다. 특히 화랑을 뜻하는 ‘랑(郞)’자가 많았다. ‘화랑의 유적이구나!’

불교미술사로 박사학위 과정을 밟고 있던 스물아홉 문명대(72·동국대 명예교수·한국미술사연구소장·사진)는 가슴이 뛰었다. 물론 그때는 자신이 선사시대 유적을 보고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신라의 유적 중 연대가 조금 오래된 거라 추측했을 뿐이었다. 수천 년을 잠자던 천전리 암각화(국보 147호·너비 10m 높이 3m)는 그렇게 첫 모습을 드러냈다. 1970년 12월 24일이었다.

미지의 세계

그가 당장 할 수 있는 건 이끼와 흙탕물을 조심스럽게 닦아 낸 뒤 ‘건탁(乾拓·물을 쓰지 않고 고형묵을 종이 위에 문질러 뜨는 탁본)’을 하는 것뿐이었다. 일행 중에는 한 일간지의 문화재 전문기자도 있었다.
문명대 명예교수는 정년퇴임을 한 지 이제 7년째에 접어든다. 그는 “내가 벌여놓은 연구들을 이젠 마무리해야 할 때”라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새로운 일거리들을 찾고 있다. 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문명대 명예교수는 정년퇴임을 한 지 이제 7년째에 접어든다. 그는 “내가 벌여놓은 연구들을 이젠 마무리해야 할 때”라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새로운 일거리들을 찾고 있다. 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 천전리 대곡리 간다라 발굴 넘어… 중국서 뭔가 더 찾아내야지! ▼

● 사학자 문명대의 삶을 바꾼 그날


평소 알던 지인이라 조사에 필요한 지프를 한 대 구해 달라 했더니 울산까지 따라붙은 것이다. 기자가 신나게 사진을 찍고 취재를 하는 동안, 그는 잠시 마음을 가라앉혔다. 침착해야 했다. 정체가 불분명한 상대에게 무턱대고 덤벼드는 건 무모했다. 게다가 겨울은 조사에 적합한 계절이 아니었다. 봄에 다시 팀을 꾸려 내려오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반고사 조사마저 접고 이틀 만에 서울로 올라왔다. 그러곤 지도교수이자 동국대 박물관장이던 황수영 교수(1918∼2011)에게 먼저 알렸다.

1971년 1월 1일 천전리 암각화 기사가 신문에 대문짝 만하게 실렸다. 동행했던 기자는 엉겁결에 대특종을 낚은 셈이었다. 암각화는 세상의 이목을 끌었지만, 정작 한국엔 암각화를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 없었다. 전문가의 조언이나 협업은 애초에 불가능했다는 뜻이다. 선사시대 유적은 그의 전공과 한참 거리가 있었다. 말 그대로 ‘미지의 세계’였다.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다면 그 자신이 전문가가 돼야 했다. 아직 봄까지는 시간이 조금 있었다. 그는 우선 책을 파고들었다. 한국어로 된 책은 아예 없었고, 영어 일본어 중국어로 된 책을 닥치는 대로 구해 읽었다.

4, 5월에 이뤄진 조사는 그야말로 강행군이었다. 여름이 돼 강수량이 많아지면 아래쪽이 물에 잠길 수 있어 시간이 많지 않았다. 박물관 직원이라야 2, 3명뿐이던 시절이니, 주로 대학원생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현장에만 있을 수도 없었다. 박물관 전임연구원으로 일하면서 강의까지 맡았던 터라 서울과 울산을 일주일에 몇 번씩 오르내려야 했다. 문헌 조사와 현장 조사가 점차 속도를 내자 암각화도 서서히 베일을 벗기 시작했다. 비슷한 그림들이 북유럽이나 시베리아 등지에서 주로 발견된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그 지역들은 빗살무늬토기 출토지역과도 대부분 겹쳤다. 이는 ‘북방문화권’이 한반도까지 연결된다는 중요한 열쇠였다. 그해 10월 그는 역사학회에서 천전리 암각화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만 서른의 문명대는 그렇게 학계의 중심에 섰다.

연이은 발견

천전리에서 현장 조사를 할 무렵 인근 주민들도 자주 조사팀과 어울렸다. 찾는 이 하나 없던 조용한 동네에 웬 젊은이들이 진을 치고 있으니 신기할 법도 했다. 어떤 사람은 아예 암각화 근처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런데 그들 중 또 이상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천전리 암각화를 알려줬던 그 한학자처럼 말이다. 조사 현장에서 1∼2km 떨어진 곳에 가면 동네 사람들이 나무하러 가기 전에 낮잠 자는 곳이 있는데, 거기에 호랑이가 그려져 있다고 했다. 처음엔 그냥 흘려들었는데, 한두 사람의 얘기가 아니었다. 귀가 솔깃해졌다. 물론 당장엔 천전리 암각화 조사가 시급했다. 정신을 분산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10월 학회 발표 후 한숨을 돌리자 동네 사람들의 말이 스멀스멀 귓가로 올라왔다. ‘한번 가보지 뭐.’ 겨울방학이 되면서 또다시 울산으로 내려갈 채비를 했다. 그의 연구를 관심 있게 지켜보던 친구 둘(김정배 전 고려대 총장, 이융조 한국선사문화원장)이 천전리 암각화를 보겠다며 따라나섰다. 울산시내서 하룻밤을 잔 뒤 동네 사람들의 안내에 따라 배를 하나 빌렸다. 일행은 태화강 지류인 대곡천을 한참 거슬러 올라갔다. ‘진짜 뭔가가 있구나.’ 저 멀리서 흘러나오는 기괴한 기운에 그는 또다시 압도당했다. 문제의 암면은 위쪽 일부만 물 밖으로 드러나 있었다. 배를 가까이 대자 그림 7, 8개가 보였다. 정말 마을 사람들 얘기처럼 호랑이 그림이 있었다. 사슴이나 고래를 잡는 모습도 있었다. 선사시대 암각화를 지난 1년간 공부한 덕에 그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 또 새로운 역사를 쓰겠구나.’ 12월 25일. 천전리 암각화 발견 후 1년 하고 꼭 하루 만에 대곡리 암각화(국보 285호·너비 6.5m 높이 3m)를 찾은 것이다.

“단일 유적으로는 최대였습니다. 그 이상의 발견이 있을 수가 없을 정도로요. 천전리와 대곡리의 암각화는 세계사적으로도 그 가치가 매우 큰 것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훗날 알게 된 것이지만 대곡리 암각화에는 모두 200여 점의 그림이 있다. 천전리 그림은 청동기 초기에서 말기까지 그려졌고, 대곡리 그림은 신석기 중기에서 청동기 초기까지로 연대가 더 올라간다. 역사학자들은 보통 고조선시대가 신석기 후반쯤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즉 대곡리 암각화는 고조선시대의 생활양식, 종교의식, 경제활동 등 총체적인 문화를 설명하는 귀한 역사서인 셈이다. 그는 불교미술을 전공하고 있었지만 이 역사적 발견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그러곤 이후 선사미술에 꼬박 10여 년을 매달렸다. 울산의 천전리와 대곡리를 내 집처럼 드나들었다. 일본어로 번역된 소련 학자의 책을 읽고, 5대호 주변 아메리칸 인디언의 암각화를 분석한 미국 학자의 책을 번역했다. 1984년 그는 자신의 모든 역량을 쏟아 부은 보고서를 세상에 내놓았다. 보고서 이름은 ‘반구대 암벽 조각’이었다.

노학자의 꿈

‘한반도 선사시대 유적의 최초 발견’이란 타이틀은 그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그는 선사미술을 10여 년간 공부했지만, 뿌리는 불교미술에 그대로 두고 있었다. 박사학위 논문도 경주 석굴암에 대해 썼다. 그는 “학자로선 너무 일찍 큰 발견을 한 것이었다. 행운이었지만 부담도 됐다”라면서도 “그 덕분에 학문적 폭이 이만큼 넓어질 수 있었다”라고 했다. 만약 그가 선사미술로 아예 전공을 바꿨더라면 어찌 됐을까. 아마 불교미술에 관한 주옥같은 책 50여 권(저서, 공저, 편저 포함)과 300여 편의 논문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보여 준 문서 하나가 있었다. 40여 년간 벌여 온 학술조사와 발굴조사를 정리한 표였다. 그는 국내든 해외든 불교역사의 흔적이 남은 곳이라면 어디라도 달려갔다. 실크로드 조사를 위해 파키스탄, 인도, 중앙아시아, 중국을 수십 차례 조사했다. 러시아 연해주에선 발해와 고구려 유적을 발굴해 냈다. 1989년 중국 조사 당시엔 톈안먼 사태가 터지는 바람에 물과 전기가 끊긴 호텔에서 며칠을 지내다 겨우 탈출한 적도 있었다.

그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업적이 있을 터였다. 1993년 러시아 연해주 ‘코르사코프카 발해 사원지’ 발굴과 2004∼2005년 파키스탄 탁실라에서의 ‘졸리안Ⅱ 사원지’ 발굴이 그에겐 그랬다. 코르사코프카 발굴은 그가 해외에서 벌인 첫 발굴조사이면서, 최초의 발해 유적 발굴, 해외의 유물을 국내로 들여온 첫 사례 등 다양한 기록을 남겼다. 동북아 역사 바로 세우기의 ‘시금석’이 마련된 셈이었다. 파키스탄의 탁실라는 우리의 경주에 비견되는 문화유적 도시. 그는 그곳에서도 ‘세계 최초 발굴’이란 타이틀을 얻으면서 간다라 불상을 50여 점이나 찾아 냈다. 정년퇴임(2006년) 1년 전이었다.

“사실 파키스탄에 처음 갈 때 소원은 ‘간다라 불상을 딱 하나라도 찾았으면 좋겠다’라는 것이었죠. 그런데 파는 족족 불상이 쏟아져 나오는 겁니다. 나도 놀랐고, 현지인들도 놀랐죠.”

그는 지난해 12월 ‘제9회 대한민국 문화유산상’(학술부문)을 받았다. 나라가 그에게 “수고했습니다. 고맙습니다”라고 주는 상이다. 그런데 정작 그는 ‘은퇴’란 말을 꺼내 본 적이 없다. 지금은 한국연구재단의 중장기 연구 과제(2011∼2013년) 마무리 작업에 한창이다. 최근 ‘기록문화재 자료 집성을 통한 조선시대 미술의 도상해석학적 연구’라는 이름으로 4권의 보고서를 냈고, 올여름까지 2권을 더 발간할 계획이다. 그러곤 또 다른 꿈에 도전한다. 생애 마지막 발굴 조사다. 목적지는 중국. 인도에서 우리나라까지 간다라 미술이 전해진 경로를 문화사적, 미술사적으로 완벽히 해석해 내고 싶은 욕심에서다. 중국은 마지막 남은 ‘퍼즐 조각’인 셈이다. 그리고 그건 ‘학자 문명대’를 완성할 마지막 퍼즐 조각이기도 하다.

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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