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짐을 꾸리자, 도깨비불을 좇아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8월 16일 03시 00분


◇연극 ‘한여름밤의 꿈’
대본★★★★☆ 연출★★★★ 연기★★★☆ 무대 ★★★☆

극단 여행자의 ‘한여름 밤의 꿈’에서 셰익스피어 원작 속 장난꾸러기 요정 ‘퍽’을 한국화한 쌍둥이 도깨비 두두리. 명동예술극장 제공
극단 여행자의 ‘한여름 밤의 꿈’에서 셰익스피어 원작 속 장난꾸러기 요정 ‘퍽’을 한국화한 쌍둥이 도깨비 두두리. 명동예술극장 제공
‘영혼’은 영어 ‘soul’을 한자어로 번역한 말이다. 영(靈)과 혼(魂)의 합성어로서 언뜻 ‘신령스러운 넋’으로 풀이된다. 사람의 몸에 깃든 정신적 요소를 뜻하는 ‘soul’과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soul’과 영혼은 미묘한 차이가 있다. 도교적 전통에서 영혼은 3가지 차원으로 구성된다. 바로 영(靈)과 혼(魂)과 백(魄)이다. 이 셋은 어떻게 구별될까. 혼은 우리의 정신을 주관하고 백은 우리의 몸을 주관한다. 영은 그 혼과 백이 하나로 합일된 신성한 존재다.

이를 쉽게 이해시켜줄 키워드가 혼비백산(魂飛魄散)이란 말이다. 이 말을 찬찬히 살펴보면 사람이 깜짝 놀랐을 때 정신을 주관하는 혼은 수직으로 솟아오르고 육신을 주관하는 백은 수평으로 흩어진다는 뜻을 찾을 수 있다.

도교적 인간관에서 우리의 영은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 배꼽을 타고 하늘에서 몸으로 깃든다. 그렇게 깃든 영은 다시 혼과 백으로 나뉘어 작동하다 사람이 죽고 난 뒤 다시 하나로 합쳐져 하늘로 올라간다.

문제는 사람이 죽으면 혼은 즉시 몸에서 분리돼 떠오르지만 몸에 대한 애착이 강한 백은 그러지 못한다는 점이다. 몸이 다 썩어 없어져야 비로소 분리된다. 그동안 혼은 무덤가를 떠돌며 백과 합쳐지기를 기다린다. 우리가 도깨비불이라고 부르는 혼불의 정체다.

셰익스피어의 낭만희극을 한국적 전통으로 녹여낸 극단 여행자의 연극 ‘한여름밤의 꿈’(양정웅 작·연출)이 흥미로운 것은 이 점과 관련이 있다. 원작의 요정들을 우리 전통의 도깨비(돗가비)로 바꾸면서 사랑의 본질을 이루는 영혼의 세계를 무의식적으로 건드리기 때문이다.

원작은 이중의 시공간을 다룬다. 낮과 도시를 지배하는 인간의 세계와 밤과 숲을 지배하는 요정의 세계다. 서로 다른 두 세계는 숲속에서 이뤄진 하룻밤 잠(꿈)을 통해 만난다.

반면 여행자의 연극은 오히려 이런 시공간적 구별을 무화시키며 ‘혼의 세계’와 ‘백의 세계’의 혼융에 좀 더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혼의 세계’에 가까운 인간과 ‘백의 세계’에 가까운 도깨비는 똑같이 밤에 속한다. 다만 그 밤이 인간들에겐 창공의 별로 표상되지만 도깨비들에겐 무덤가의 도깨비불로 형상화되는 차이만 존재할 뿐이다.

그 두 세계는 또한 사랑의 두 가지 측면,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게끔 만드는 플라토닉한 요소와 변덕스러운 에로틱한 요소를 대변한다. 은방울 독초향은 다시 그런 구별을 무화시키면서 인간과 도깨비를 사랑 앞에 맹목적인 존재로 등질화한다. 그렇게 혼과 백이 뒤섞인 한바탕 난장(亂場)이 펼쳐진 뒤 비로소 혼과 백이 하나 된 진짜 사랑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만 구별하자. 혼불과 도깨비불의 차이다. 혼불이 인간에 깃든 혼의 산물이라면 도깨비불은 부지깽이나 빗자루처럼 아주 오래된 사물에 깃든 백의 산물이다. 도깨비가 왠지 허름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도 그처럼 물질에 집착하는 백의 요소가 강하기 때문이다. 극 중 여자 도깨비 돗은 부지깽이, 돗의 바람둥이 남편 가비는 짚신, 돗의 쌍둥이 남동생 두두리는 빗자루에 깃든 백이다. 한여름 밤 더위를 씻어줄 이 연극 속 도깨비불의 향연을 즐기면서 이처럼 신묘한 동양적 영혼의 세계로 여행을 함께 떠나는 것은 어떨까.

어느덧 10년의 전통을 갖춘 여행자의 ‘한여름 밤의 꿈’은 2000년대 한국 연극의 세계화를 대표하는 레퍼토리 작품이 됐다. 2002년 초연 이후 2006년 영국 바비칸센터 초청공연과 폴란드 그단스크 국제 셰익스피어 페스티벌 대상을 수상한 이 작품은 올해 9월 중국 지난(濟南) 시에서 열릴 제18회 베세토 연극제에 초청됐다. 내년에는 런던 올림픽을 앞두고 셰익스피어 극장으로 유명한 런던 글로브 시어터에서 세계 각국을 대표하는 셰익스피어 연극과 나란히 공연한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i: 21일까지 서울 명동예술극장. 1만 5000∼4만 원. 1644-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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