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의 철학으로 세상읽기]<18>포크 음악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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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3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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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를 든 88만원 세대, 행복의 나라로 가겠다고 ‘노래’를 부르는데…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끝 끝없는 바람/저 험한 산 위로 나뭇잎 사이 불어가는/아! 자유의 바람/저 언덕 너머 물결같이 춤추던 님/무명무실 무감한 님/나도 님과 같은 인생을/지녀 볼래 지녀 볼래.”

한대수☆(63)의 노래, ‘바람과 나’의 일부분이다. 30, 40대에게는 아마 비명에 간 가수 김광석이 리메이크해서 부른 노래로 친숙할 것이다. 한대수는 1970년대 우리 젊은이들에게 기타를 가지고 싶다는 열망을 심어주었던 싱어송라이터였다.

1968년 11월 서울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열린 그의 귀국 공연은 한국 포크 음악의 시작이라고 기억되는 사건이었다. 그 후 김민기, 양희은, 서유석, 송창식, 윤형주, 투 코리언즈, 쉐그린 등 포크 가수들은 ‘청개구리’라는 문화공간이나 ‘쎄시봉’, ‘오비스캐빈’, ‘금수강산’ 등과 같은 경음악 감상실에서 젊은이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며 활약하게 된다. 당시 대학생을 중심으로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어깨에 기타를 메고 다녔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1980년대 컬러TV 시대가 시작되면서 영원할 것만 같던 포크 음악의 열기는 눈에 띄게 위축된다. 이제 화려하고 관능적인 볼거리로 무장한 대중음악이 그 자리를 대신했기 때문이다. 현재 ‘소녀시대’를 필두로 하는 걸그룹은 포크 음악을 압도하는 선정적인 대중음악의 정점을 보여주는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흐름에서 최근 흥미로운 현상 하나가 눈에 띈다. 기성세대들마저도 소녀시대와 같은 풋풋한 걸그룹에 열광하는 와중에, 우리 젊은이들 일부는 포크 음악에 다시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점이다. 거의 잊혀가던 한대수가 다시 TV와 라디오에 등장해 군사정권 시절의 어처구니없는 탄압상을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고, 서울 무교동에 있던 음악감상실 쎄시봉에 대한 전설이 다시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30여 년 만에 다시 젊은이들은 쎄시봉을 추억하고 그 시절의 포크 음악을 들으려고 하는가. 젊은이들이 다시 기타를 잡고 노래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1970년대 포크 음악의 유행은 1961년 5월 16일 군사정변 이후 암울했던 우리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었다. 1960년 4월 혁명이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일어난 군사정변은 민주주의를 고대하던 사회 각계각층에 절망감을 안겨줄 수밖에 없었다. 4월 혁명의 주축 세력이었던 대학생들의 무기력과 절망감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그러던 것이 1970년대 들어서 마침내 젊은이들은 침묵의 절망감을 극복하고 조금씩 활기를 되찾게 된 것이다. 그들이 냈던 최초의 목소리는 바로 기타 반주로 울렸고, 그것이 바로 포크였다. 알베르 카뮈(1913∼1960)라면 우리 젊은이들의 목소리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을 것이다.

절망이란 부조리와 마찬가지로 전체적으로는 모든 것을 판단하고 갈망하지만, 개별적으로 아무것도 판단하지도 갈망하지도 않는다. 침묵이 그 점을 잘 드러낸다. 그러나 반항하는 인간은 말을 하는 순간부터, 비록 그가 ‘아니요’라고 말할지라도, 그는 갈망하고 판단한다. 반항하는 인간이란 어원적으로 반대쪽으로 방향을 돌리는 사람을 뜻한다.
―‘반항하는 인간(l'Homme r´evolt´e)’


“모든 것을 판단하고 갈망하지만, 개별적으로 아무것도 판단하지도 갈망하지 않는다.” 1960년대 우리 젊은이들의 절망을 이만큼 명료하게 포착할 수 있는 표현도 없을 것이다. 민주주의가 후퇴했다는 전체적인 국면을 이해하고는 있지만, 우리 젊은이들 눈에는 구체적인 삶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그들은 절망했고 나아가 사회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삶에 대해 침묵할 수밖에 없다. 희망을 빼앗겨서 생긴 절망과 침묵은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 없는 법이다. 마침내 젊은이들은 기타 선율로 오래된 침묵에서 깨어났다. 그것이 바로 1970년대의 포크 음악이었던 셈이다. 기타 선율에 맞추어 젊은이들은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자유, 순수, 그리고 사랑을 노래하며 가장 원초적인 인간적 가치들을 점검하기도 했고, 아니면 삶의 어두운 면과 정치적 질곡을 노래하면서 민주주의의 필요성을 다시 한 번 숙고하기도 하였다.

1970년대 포크 음악의 유행은 본질적으로 ‘아니요’라고 ‘반항하는 인간’이 탄생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사건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1980년대 컬러TV로 상징되는 자본주의 소비문화가 활짝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포크 음악이 민주화 운동이 벌어졌던 모든 곳에서 일종의 배경 음악처럼 울릴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흐른 지금 다시 젊은이들이 기타를 잡기 시작했다. 이것은 혹시 절망 속에서 부르는 희망의 노래 아닐까.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좀처럼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청년실업의 문제, 지나친 경쟁으로 학교에서마저도 파괴되는 인문학적 가치, 부익부 빈익빈이 학력자본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현실 등등. 젊은이들은 10여 년간 절망 속에서 침묵하다가 마침내 다시 자신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1960년대의 젊은이들이 10여 년간의 절망스러운 침묵 끝에 기타를 잡았던 것처럼 말이다.

역사는 사건의 반복이 아니라, 구조의 반복으로 사유될 필요가 있다는 말이 있다. 혹은 역사적 사건은 “한 번은 희극으로 다시 한 번은 비극으로” 반복된다는 유명한 말도 있다. 1960년대만큼이나 지금은 젊은이들에게 있어 위기와 절망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젊은이들은 이제 위기 앞에서 침묵하는 방관자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저항, 사건, 역사는 정상성이 최대한 균열되고 관례가 최대한 드물어지는 위기라는 전략적 개념 속에서 서로 관계 맺는다. 어원적으로 볼 때 위기란 길이 덤불처럼 갈라져 있는 분기점 앞에서 역사가 주저하고 있을 때 ‘측면의 가능성들’이 나타나는 결단의 순간이자 진리의 순간이다.
―‘저항(R´esistances)’

현대 프랑스 정치철학자 다니엘 방세(65)의 말이다. 위기를 위기로 자각할 때 저항이 시작되고, 마침내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는 지적이다. 바로 여기에 포크 음악에 대한 젊은이들의 관심은 하나의 ‘사건’으로 저항과 역사라는 테마와 연루되어 있다. 사실 지금까지 우리 젊은이들은 위기를 수수방관하고만 있었다. 그들이 전국 도처에서 열리는 록페스티벌이나 화려하고 격정적인 클럽 음악에 몸을 맡길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렇지만 이제 우리 젊은이들이 다시 기타를 잡기 시작했다. 이것은 생각 이상으로 무척 의미심장한 일이다. 대규모로 기획된 축제에 방관자로 머물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직접 노래하고 연주하려는 주체성을 회복하지 않았다면 기타를 잡으려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이제 우리 젊은이들은 자신의 삶의 문제를 기성세대들에게 맡기지 않겠다며 의지와 용기를 회복하고 있는 중이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위기를 위기로 자각하고 그것을 주체적으로 돌파하려고 했을 때에만 새로운 ‘측면의 가능성들’이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젊은이들의 저항은 조용하지만 강하게 시작되고 있다. 어쩌면 당연한 일 아닐까. 기성세대들이 젊은이들에게 남겨놓은 위기를 해결해주지 못한다면, 위기에 빠진 젊은이들은 스스로 그것을 돌파하려는 움직임을 시도할 수밖에 없는 법이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 사회의 미래에는 희망이 없을 것이다. 1970년대의 포크 음악이 결국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아우라로 작동했던 것처럼, 지금 다시 부활하려는 포크 음악은 10년 뒤 우리 사회에 어떤 모습을 가져다줄 것인가.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포크 음악 부활에 앞서 다시 반복되는 한대수의 음악에 그 실마리가 있지나 않을까. ‘장막을 거둬라 너의 좁은 눈으로 이 세상을 떠보자/창문을 열어라 춤추는 산들바람을 한 번 더 느껴보자/가벼운 풀밭 위로 나를 걷게 해주세 봄과 새들의 노래 듣고 싶소/울고 웃고 싶소 내 마음을 만져주 나도 행복의 나라로 갈 테야.’

1974년 출시된 ‘멀고 먼 길’이란 앨범에 실려 있는 ‘행복의 나라’라는 곡의 일부분이다. 우리 젊은이들은 세상을 더 크게 보고 자유로울 수 있을까. 마침내 그들은 자신이 꿈꾸는 행복의 나라에 이를 수 있을 것인가.

<강신주 철학자·‘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철학, 삶을 만나다’ 저자>

한대수☆
1968년 미국 생활을 접고 귀국한 한대수는 포크라는 장르를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한 싱어송라이터다. 코리아헤럴드에서 기자로 일하던 1974년 첫 음반 ‘멀고 먼 길’을 녹음했고, 이 앨범은 한국 포크의 새로운 장을 연 것으로 평가된다. 1975년 2집 ‘고무신’이 나왔지만 체제 전복을 기도하는 곡이라는 황당한 이유로 문공부로부터 앨범을 수거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한국에서의 생활이 여의치 않자 다시 미국으로 떠났다가 1989년에 돌아와 ‘무한대’라는 앨범을 낸다. 몇 장의 앨범을 더 낸 뒤 지금은 사진과 음악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반항하는 인간(l'Homme r´evolt´e)☆☆
사르트르와 함께 프랑스 실존주의를 양분했던 카뮈의 핵심적 개념이다. ‘반항하는 인간’이란 저서를 통해 카뮈는 자유를 추구하는 인간이 기본적으로 반항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반항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침해하는 외적인 압력을 부정하면서, 동시에 자신에게 정당한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긍정하게 된다. ‘반항하는 인간’에서 카뮈가 반항하는 사람이 “‘농(Non·no)’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위(Oui·yes)’라고 말하는 사람이기도 하다”고 말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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