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의 철학으로 세상읽기]<17>날개 달린 등록금과 날개 꺾인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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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3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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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을 땐 사서도 한다는 고생… 그걸 살 돈도 없는 청춘의 미래는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어제는 대학에서 내 수업을 들었던 학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예전처럼 밝았지만 조금 그늘도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어보자 “등록금 대출을 받으면서까지 학교를 다녀서 무엇하냐”는 푸념을 늘어놓았다. 자신의 힘으로 학교를 다니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위로를 해주었다. 그러자 그는 취업도 힘든데 어떻게 그 등록금을 상환할 수 있겠느냐며 또 한숨을 쉰다. 어제는 등록금을 대출해준 한국장학재단에서 일종의 협박성 전화도 받았던 것이 이유였던 것 같다. 대출 이자가 밀리면 신용등급이 하락해 취업에 지장이 있다는 전화를 받은 것이다.

이 제자는 대학을 졸업해 버젓한 직장에 다니며 평범하게 살려는 소박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신용불량자가 될 수 있다는 위기감에 풀이 죽은 그가 너무나 측은해서인지 우리 젊은이들을 궁지에 몰고 있는 기성세대에 분노감마저 들었다. 어떻게 위로할까 막막하기만 했다. 지금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 중이라 그만 끊어야겠다는 말을 듣고 그러자고 대답은 했지만 한참이나 나는 전화기를 들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2007년 ‘88만 원 세대’라는 책이 서점가를 휩쓸었던 적이 있다. 대학생을 포함한 젊은 세대들이 삶을 살아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실감나게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어른들은 당시 젊은이들의 절망스러운 목소리를 진지하게 경청하지 않았던 것 같다. 상황이 호전되기는커녕 악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매 학기 등록금을 내야 할 때가 되면 대부분 대학생과 그들의 부모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쉰다. 거의 500만 원이나 하는 등록금은 대학생이나 부모들에게는 커다란 짐일 수밖에 없다. 학자금 대출이 불가피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신속하게 반환할 수 있을 가능성이 있을 때에만 대출은 작은 희망이라도 될 수 있는 법이다. 그렇지만 과연 우리 대학생들은 대출금을 상환할 수 있을까? 서울의 중위권 대학생들의 경우 취업 원서를 30번 정도 넣어야 한두 번이라도 면접의 기회나마 주어지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학자금 대출은 아편으로 기능하는 것 아닐까? 비록 잠시 동안 마취제의 역할을 하지만 이는 후유증을 남길 수밖에 없다. 학자금 대출은 취업도 하기 전에 우리 대학생들을 신용불량자로 만들 수 있는 아편인 셈이다.

젊은이들이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있는지 모르는 것일까? 대부분의 대학들은 올해도 어김없이 등록금을 올렸다. 물가 인상 때문에 불가피하게 등록금을 올렸다고도 하고, 전문적인 연구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등록금을 올렸다고도 한다. 그렇지만 현실을 왜곡하지는 말자. 물가 인상으로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학자금을 대출받고 있으며, 동시에 학문에 뜻을 둔 대학생들도 우리 대학원이 아니라 외국 대학원으로 진학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등록금 인상은 우리 대학생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대학 교직원이나 재단을 위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나저나 값비싼 등록금을 내고 대학을 졸업한 뒤 취업이라도 보장되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등록금에 대한 부담, 그리고 취업에 대한 염려로 대학생과 학부모들이 자살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대부분의 대학생들이 자살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때때로 죽음보다 더 가혹한 상태가 핍박받는 삶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자화자(子華子)가 말했다. “온전한 삶(전생·全生)이 첫째이고, 부족한 삶(휴생·虧生)이 둘째이며, 죽음(사·死)이 그 다음이고, 핍박받는 삶(박생·迫生)이 제일 못하다.” 따라서 존중받는 삶은 온전한 삶을 의미한다. 온전한 삶은 인간의 다양한 욕망이 모두 적절함을 얻은 것이다. 부족한 삶은 그 적절함을 부분적으로 얻은 것이다. 부족한 삶은 옅게 존중받는 삶이다. 부족함이 심하면 그만큼 더 존중받음이 희박해질 수밖에 없다. 죽음이란 지각능력을 잃고 삶의 이전으로 되돌아간 것을 말한다. 핍박받는 삶이란 인간의 욕망이 그 적절함을 얻지 못하고 최악으로 불쾌한 상태에 있음을 말한다. 굴종이 그렇고 치욕이 또한 그렇다. 따라서 ‘핍박받는 삶은 죽음만도 못하다’고 한다.―여씨춘추☆

이 구절은 2000여 년 전 중국의 어느 철학자가 했던 말이다. 지금 우리 대학생들 중 온전한 삶, 즉 존중받는 삶을 영위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마 대부분은 부족한 삶이나 핍박받는 삶을 살아내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삶을 더는 존중할 수 없을 때, 인간은 가장 불행한 법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불행한 것은 미래의 희망도 없이 핍박받는 삶일 것이다. 지금 대학은 대학생을 등록금의 원천이나 학점을 따려는 학점벌레로만 생각하고, 대기업은 대학생을 출신학교나 학점, 즉 스펙으로만 평가하려고 한다. 심지어 가족도 취업하지 못한 대학생 자식을 둔 것을 무의식적으로나마 부끄러워한다. 이럴 때 과연 우리 대학생들은 자신의 삶이 존중받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불가능한 일이다. 지금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가족, 대학, 사회 모두가 한마음으로 자신을 핍박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을 것이다. 핍박받는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상대적으로 행복한 법이다. 죽은 사람은 고통에 빠지거나 미래를 염려할 일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핍박받는 삶은 죽음만도 못하다’는 현인의 말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지금 우리 대학생들은 우리 사회를 언젠가 끌고 가야 할 주역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과연 핍박받는 삶을 살고 있는 대학생은 자신의 미래나 나아가 우리 사회의 미래를 합리적으로 계획할 수 있을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현실에서 핍박받는 사람은 현실에만 매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사회철학자 피에르 부르디외☆☆(1930∼2002)는 말했던 적이 있다.

흔히 말하는 대로 미래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개인적으로 자신의 미래를 계획할 가능성도 없으며, 동시에 집단적으로도 새로운 미래의 출현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가능성도 별로 없다.… 미래에 대한 현실주의적인 전망은 실제로 현재에 직면할 수단을 지닌 사람들에게만 접근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현재에 의해 너무 짓눌려서 유토피아적 미래―그것은 현재의 성급하고 주술적인 부정이다―만을 꿈꿀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자기 포기나 혹은 마술적인 조급함에 자신을 방기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자본주의의 아비투스

Alg´erie 60: Structures ´economiques et Structures temporelles’
‘현재에 직면할 수단을 지닌 사람들’이란 최소한의 경제적 안정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현재 자신이 가진 것을 토대로 미래를 합리적으로 예측할 수 있다. 부모의 재산이나 학력을 토대로 유학을 꿈꾸거나 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극소수 대학생들이 그 사례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반면 대출받은 등록금을 상환하기 위해 30대까지의 젊은 시절을 보내야만 하는 대학생들은 현재에 직면할 수단을 가지지 않은 사람, 그러니까 ‘미래가 없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이런 사람들은 미래를 합리적으로 계획하거나 현실주의적으로 전망할 수 없다. 현재의 삶 자체가 핍박받아 궁핍한데 어느 겨를에 미래를 도모할 수 있다는 말인가. 부르디외의 이야기에는 한 가지 주목할 것이 있다. 그것은 현재에 직면할 수단이 없는 핍박받는 사람들이라도 유토피아적 미래를 꿈꿀 수는 있다는 대목이다. 대학생들 중 로또 같은 복권에 얼마 안 되는 용돈을 갖다 바치거나 혹은 주식 투자에 손을 대는 경우가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렇지만 이런 경우는 부르디외의 말대로 성급한 자기 포기나 마술적 조급함에 자신을 방기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대학생을 핍박해서 유토피아적 자포자기의 상태로 이끄는 사회 속에 살고 있다. 과연 이런 사회에 미래가 있을 수 있을까? 유토피아적 미래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합리적으로 생각하라는 조언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현실에 직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단이 제공되지 않는다면 그들은 유토피아적 미래에 대한 꿈을 접으려고 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언젠가 우리 대학생들은 사회와 미래를 이끌 주역으로 자라날 것이다. 이미 우리는 폭력적인 가정에서 자란 아이가 나중에 어떤 어른으로 자라나는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폭력을 당한 사람은 더 약한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핍박받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핍박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무서운 일 아닌가. 정치권, 대학당국 나아가 기성세대 모두 자신이 어떤 업보를 짓고 있는지 처절하게 반성해야만 한다. 우리 핍박받는 대학생들에게 현재에 직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단을 확보해주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명약관화하기 때문이다.

<강신주 철학자·‘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철학, 삶을 만나다’ 저자>

여씨춘추(呂氏春秋)☆
진시황의 정치적 후견인이었던 여불위(呂不韋·?∼기원전 235)가 편찬했던 철학과 사상의 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다. 전국시대에 활동했던 제자백가 대부분은 새롭게 부각된 신흥 강국 진(秦)나라로 모여들었다. 여불위는 이 제자백가들에게 경제적 후원뿐만 아니라 사상적 자율성도 부여했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문하에 모여든 제자백가들에게 자신이 속한 학파의 철학적 주장을 간결한 논문 형식으로 제출하라고 했다. 마침내 제자백가의 사상들이 정리된 형태로 여불위의 손에 들어왔고, 그는 이것을 사계절의 순서에 따라 거대한 백과사전으로 편찬했던 것이다.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1930∼2002)☆☆
후설의 데카르트적 성찰에 맞서서 의식적으로 파스칼적 성찰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현대 프랑스 사회철학자. 그는 데카르트로 상징되는 투명한 이성보다는 파스칼로 상징되는 불투명한 정서나 습관을 강조했다. 마침내 그는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구조화된 구조이자 구조화시키는 구조는 ‘아비투스(Habitus)’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에게 있어 아비투스는 일종의 습관화된 기억의 체계, 혹은 육화된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저서로는 ‘구별짓기(La Distinction)’, ‘파스칼적 성찰(M´editations pascaliennes)’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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