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사람 냄새 묻어나는 LP 소음도 불편함도 즐겁다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월 28일 03시 00분


■ 15년만에 LP음반 발매-늘어나는 LP바, 그들은 왜···

음악은 추억을 재생한다. 태평로의 LP바 ‘음악과 사람들’에서 노희택 사장(오른쪽)이 한 손님과 LP 음반을 고르고 있다. 각각의 음반에는 음악과 함께 이를 듣던 사람의 수많은
사연과 추억도 새겨져 있다.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음악은 추억을 재생한다. 태평로의 LP바 ‘음악과 사람들’에서 노희택 사장(오른쪽)이 한 손님과 LP 음반을 고르고 있다. 각각의 음반에는 음악과 함께 이를 듣던 사람의 수많은 사연과 추억도 새겨져 있다.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13일 서울 중구 태평로 2가 대로변 2층의 ‘음악과 사람들’. 벽 한 면을 빽빽이 채운 LP판. 종이재킷 안의 비닐 커버를 조심히 열고 까만 판을 꺼내 턴테이블에 건다.

에바 캐시디의 ‘송버드’가 울려퍼진다. 서른세 살에 요절한 ‘천사의 목소리’라는 별명의 가수. 희미한 조명에 빙글빙글 돌아가는 턴테이블. 맥주 한 잔과 함께 ‘아이러브유, 아이러브유’ 그의 푸근한 목소리가 유난히도 길고 추운 겨울날씨와 일상에 지친 우리를 한없이 위로한다.

이미 추억 속으로 사라져버린 것 같던 LP를 찾는 사람들이 최근 다시 늘고 있다. 기존에는 주로 40대 이상의 LP마니아가 많았다면 최근에는 10, 20대 신세대 중에서도 LP음악을 찾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 LP의 ‘르네상스’

홍익대 인근에는 20여 개 LP바가 성업 중이다. 전문 LP바를 비롯해 최근에는 호프, 와인바 등에서도 턴테이블을 구해 LP를 트는 곳이 늘고 있다. ‘블루하우스’라는 이름처럼 블루스만 틀고 ‘곱창전골’처럼 한국 가요를 전문적으로 트는 LP바도 있다.

서울 중구 회현동 지하상가에는 10여 개의 LP전문점이 있다. 2000년대 초반 4개까지 줄었던 LP전문점이 꾸준히 늘어났다. 이곳에서 15년째 영업 중인 ‘파파게노’의 사장은 “20년 동안 고객이 10배는 늘어났다”고 말했다. 회현동뿐 아니라 용산 신설동 서초동 등에도 LP전문점이 문을 열었으며 온라인 매장까지 포함하면 전국적으로 80여 개 LP전문점이 영업하고 있다.

지난해 초 일본에서는 빅히트한 롤플레잉 게임 ‘파이널판타지 13’의 사운드트랙이 LP로 발매됐다. 12인치인 재킷에는 이 게임 주인공의 일러스트가 전면에 그려져 일본 팬들 사이에서 컬렉션 아이템으로 인기를 끌었다.

국내 R&B그룹 ‘브라운아이드소울’은 22일 정규 3집 앨범을 LP판으로 발매했다. 한국에서 LP 정규앨범이 발매되는 것은 1996년 015B와 룰라 이후 15년 만에 처음이었다. 이 한정판을 판매한 서울 종로구 안국동의 한 카페는 이날 새벽부터 전국에서 온 팬들이 장사진을 쳤다.

○ 따뜻한 소리에 10대도 찾아

‘음악과 사람들’ 천장에 장식돼 있는 음반 재킷과 손님들의 메모.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음악과 사람들’ 천장에 장식돼 있는 음반 재킷과 손님들의 메모.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휴대전화와 컴퓨터, MP3플레이어로 어떤 음악이든 순식간에 찾아들을 수 있는 요즘. 왜 사람들은 20세기 유물인 줄 알았던 LP를 찾는 것일까.

‘음악과 사람들’을 운영하고 있는 노희택 사장(44)은 2002년 12월 종로구청 건너편 기존 ‘청자다방’ 자리에 ‘세라돈’이란 LP바를 차렸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전축으로 LP판을 들으며 중학교 이후 판을 사 모으기 시작한 이른바 ‘빽판 키드’이다. 중고교 시절 1200장의 LP를 사모은 그는 미대를 졸업한 뒤 무역회사를 다니며 평범하게 직장생활을 했다. 하지만 음악에 대한 그의 열정을 마냥 미뤄둘 수는 없었다. 그는 “2002년 무작정 음악이 좋아서 덜컥 문을 열었는데 수년 전부터 LP바 바람이 불면서 많은 가게들이 생겨났다”며 “마지막 LP세대라 할 수 있는 386세대가 40대가 되면서 사회적으로 자리를 잡고 LP의 추억을 다시 찾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노 사장은 최근 LP를 듣는 사람들의 연령대가 젊어지면서 음악도 계속 젊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김정호 송창식을 듣던 세대에서 김광석 이문세를 거쳐 신승훈 성시경으로 넘어가고 있는 것.

회현상가 LP전문점 ‘파스텔’ 신재덕 사장(56)은 “간단히 말해 CD는 차갑고 LP는 따뜻하다”고 정의했다. CD는 잡음없이 깨끗하긴 하지만 실제 소리의 느낌을 담는 데는 여전히 LP에 훨씬 못 미친다는 것. 그는 “CD는 음원을 디지털화하면서 인간의 가청 주파수의 위와 아래 부분을 잘라낸 것이라 두 시간만 들어도 머리가 아파 못 듣는다”며 “CD만 듣다 LP를 들어보면 이 음향의 차이를 바로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LP마니아인 신세계백화점 장대규 과장(39)도 “LP에서는 CD와 다른, 탄력있고 감성적인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며 “특히 기타 현의 울림은 LP로 들어야 제맛”이라고 말했다.

앞으로도 LP시장의 성장 가능성은 커 보인다. 파스텔 신 사장은 “LP시장 규모가 한국은 일본의 10분의 1도 안 된다”며 “일본 유럽 등 국민소득이 4만 달러가 넘는 나라들은 국민들이 그만큼 여유가 있고 음악에 시간과 돈을 쏟는다”고 말했다. 최근 10, 20대가 LP를 많이 찾는 것도 고무적이다. 신 사장은 “힙합같은 블랙뮤직을 하는 이들도 LP를 많이 찾는다”며 “음악의 원조를 찾아 듣다보면 LP로 올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는 국내 시장에서 LP가 자취를 감췄으니 10대는 물론이고 20대 상당수도 LP에 대한 추억이 없는 세대이다.

○ 21세기에 부활하는 1940년대 기술

LP는 1948년 6월 21일 미국의 컬럼비아 레코드사가 두 장의 음반을 선보이면서 처음 사용한 ‘long playing micro-groove record’에서 나온 말로 ‘Long Play’ 즉, 길게 연주한다는 뜻이다. 이때까지는 1898년 독일의 그라모폰사가 만든 SP(Standard Play)판이 표준이었다. 지름 25∼30cm의 크기에 1분에 78회 도는 음반인 SP판은 3∼5분짜리 음악밖에 담지 못했고 소재가 동물성 천연수지인 셀락이어서 잘 깨어졌다. 반면 컬럼비아의 LP판은 획기적이었다. 30cm 크기에 1분에 33과 3분의 1 바퀴를 돌면서 30분 동안 깔끔한 음악을 들려줬다. 이로써 노래 한두 곡을 담는 싱글판은 SP, 여러 개의 노래 또는 음악을 담는 앨범은 LP로 정착됐다. 이후에도 LP는 꾸준히 진화해 1958년에는 하나의 음원을 2개의 마이크로 녹음해 재생시키는 스테레오 LP가 등장했고 1972년 PCM(펄스 부호 변조방식) 방식으로 이루어진 레코드가 제작되어 현재의 디지털 녹음의 출발점이 됐다.

하지만 1980년대 들어 CD(콤팩트 디스크)가 개발되면서 LP의 시대는 급격히 저물었다. 현재 국내에는 LP를 제조할 수 있는 시설 자체가 없다. 국내에서 마지막 LP 제조회사였던 서라벌레코드는 2004년 기획 라이브 음반 ‘캔터베리 뮤직 페스티벌’을 1000장 찍어낸 뒤 폐업했다. 브라운아이드소울의 최근 LP판도 일본에서 제작됐다.

스위스 토렌스나 일본의 테크닉스 등의 회사는 여전히 최신의 고급 턴테이블을 생산하고 있다. 와인에서 빈티지가 ‘포도가 잘된 해에 양조한 고급 포도주’를 뜻하는 것처럼 오디오 애호가 사이에서 빈티지는 1930∼1970년대 원목케이스와 알루미늄 패널, 진공관 부품 등으로 잘 만들어진 오디오를 뜻하며 여전히 인기다. 한편 수십만 원대 중저가 턴테이블도 다양하게 판매되고 있다.

LP를 처음 듣는 초심자는 무슨 음악부터 시작해야 할까. LP 애호가들은 “그처럼 어리석은 질문도 없다”며 다들 답변을 꺼렸다. 수많은 음악 중에 단 몇 개를 꼽는 것이 불가능할뿐더러 개인마다 취향도 다르기 때문이다. ‘음악과 사람들’ 노 사장은 그럼에도 거듭된 질문에 미국 섹소포니스트 스탄 게츠와 브라질 기타리스트 지우베르투의 ‘재즈 보사노바’ 앨범 ‘스탄/지우베르투’와 록 뮤지션 스팅의 1993년 앨범 ‘텐 서머너스 테일스’를 추천했다. 신세계 장 과장은 핑크 플로이드의 1988년 ‘델리키트 사운드 오브 선더’를, 역시 LP 애호가인 신세계몰 마케팅팀 조선영 씨(29)는 1986년 서라벌레코드에서 나온 ‘어떤날 1집’을 추천했다.

정재윤 기자 jaeyu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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