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없이도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왜 글을 쓰는가? 왜 말이 아닌 것들을 말로 묘사하는가? 게다가 너의 이야기들은, 목적이 있다면, 어떤 목적에 봉사하는가? 누구에게 이익이 되는가? (…) 그는 부끄러움과 혼란에 휩싸인다. 그는 그들 모두를 저 멀리 무대 끄트머리에서, 그들이 단지 자신의 책에 써먹기 위해 존재하는 대상인 양 관찰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스라엘 텔아비브의 한 카페에 와 있다. 자신의 신작을 소개하는 문학의 밤 행사를 앞두고서다. 그는 자신에게 던져질, 뻔한 질문들을 떠올려본다. 당신은 왜 글을 쓰는가? 왜 그런 글을 쓰는가? 독자들에게 영향을 미치려고 노력하는가? 노력한다면 어떤 방법으로? 당신에게 영향을 끼친 작가는 누구이며, 도무지 참을 수 없는 작가는 누구인가? 신작에서 정확히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간략히 당신 자신의 언어로 말해줄 수 없겠는가? 이 질문들 뒤에 작가의 상상이 펼쳐진다. 카페의 웨이트리스에게 ‘리키’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축구팀 골키퍼와 사랑에 빠졌다가 배신당했을 것이라며 머릿속에서 사연을 만들어낸다.
일러스트 제공 열린책들해마다 노벨 문학상 수상 후보로 외신에 이름을 올려온 이스라엘 소설가 아모스 오즈 씨. 그만큼 ‘품질이 보증된’ 작가다. 인생과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을 작품에서 녹여온 작가는 새 소설 ‘삶과 죽음의 시’에서 괴팍한 소설가를 주인공으로 삼아 특유의 묵직한 주제의식을 펼쳐 보인다.
이 소설에서는 주인공의 시선이 닿는 사람마다 이야기가 생산된다. 외모를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은 뚱뚱한 여성 독자를 보고, 또 뒤쪽에 자리한 16세 소년을 보면서 둘이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상상한다. 행사에 참석한 문학평론가에게는 비뚤어지게 살다가 종교에 귀의한 딸을 만들어준다. 초라한 60대 사내의 모습에서 두 다리가 마비된 어머니를 간호해야 하는 상황을 그려본다. 인물들의 이야기는 서로 얽혀들고 주인공인 소설가 역시 자신이 만들어낸 이야기에 녹아들면서 현실과 허구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이 작가의 많은 작품이 그렇듯 이 소설에서도 빛을 발하는 것은 마음의 갈등과 화해하는 부분이다. 시인 체파니아 베이트할라크미의 작품 ‘삶과 죽음의 시’ 중 ‘언제 보아도 그들은 나란하다/신부 없이는 신랑도 없으리니’라는 구절을 들으면서 모두가 신랑과 신부처럼 함께하는 것은 아니라고, 작가는 언제나 혼자가 아니냐며 쓸쓸해하는 주인공. 그러나 오즈 씨는 이 저자가 작가 지망생 소년에게 답장을 보내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작가에게는 ‘독자’라는 ‘짝’이 있음을 확인시킨다.
이 소설 전체가 보여주는 것은 실로 그런 ‘짝들의 향연’이다. 작가가 사람들을 보면서 펼치는 ‘허구’는 ‘현실’이라는 짝 때문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행복과 불행, 삶과 죽음 또한 그러하다. 작가 오즈 씨는 이 세상의 대립이라는 것이 서로로 인해 가치를 가질 수 있는 것임을 따뜻한 시선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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