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론윈 코스그레이브 씨(44). 국내에선 생소한 이름일 수 있으나 유럽에선 이름을 날리는 패션 전문가다. 영국 BBC TV 패션
디렉터로 매년 아카데미 시상식 중계에서 패션 해설을 맡는다. 몇 년 전엔 ‘레드 카펫-패션과 아카데미 의상상(원제 Made for
each other)’이란 책을 통해 레드 카펫 패션의 역사를 총정리한 바 있다. 그가 한국을 다녀갔다. 지난달 26일∼이달
1일 진행됐던 서울패션위크에 해외 전문가로 초청 받아서다. 지난달 31일 서울패션위크가 열리던 서울 강남구 대치동
서울무역전시컨벤션센터(SETEC)에서 코스그레이브 씨를 만났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두 가지가 궁금했다. 그의 눈에 비친
한국 패션은 어땠는지, 레드 카펫 패션은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지. 이 인터뷰 자리에는 ‘레드 카펫’의 한국판(2009년)을 번역한
재미(在美) 패션 칼럼니스트 조 벡 씨(31)도 함께했다.》
서울패션위크 행사때
해외전문가로 초청 “디자인-색상 환상적… 해외에 더 알려야”
○ “서울패션위크, 시스템을 다듬어라”
―서울패션위크를 어떻게 봤는가.
“개인적으로 서울패션위크를 굉장히 즐겼다. 특히 디자이너 최범석 씨의 ‘제너럴 아이디어’ 브랜드 남성복에 푹 빠졌다. 디자인은 아티스틱했고, 옷감도 훌륭했다. 무엇보다 여자인 나도 당장 입고 싶은 재킷 등 실용적인 옷들이 많았다.(올해 33세인 최 씨는 19세 때 서울 홍익대 앞에서 옷 장사를 시작한 뒤 동대문을 거쳐 해외로 진출한 입지전적 디자이너다) 디자이너 정욱준 씨의 ‘준지’ 남성복 브랜드는 힘이 넘치면서도 정교했다.”
―여성복 브랜드 중에선 눈에 띄는 게 없었나.
“디자이너 노승은 씨의 옷 색상은 숨이 막힐 정도로 훌륭했다.(노 씨는 국내 원로 패션 디자이너 진태옥 씨의 딸이다) 쇼 측면에서는 이상봉 씨의 행사가 정제된 세련미를 뽐냈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 복합문화공간 ‘크링’에서 따로 열린 차세대 디자이너들의 패션쇼인 ‘제너레이션 넥스트’에선 영국 런던에서 공부한 혼성 디자이너 그룹인 ‘스티브제이 앤드 요니피’가 돋보였다. 화장실로 꾸며진 무대에서 재기발랄하고 유머러스한 감성을 풀어냈다.”
―‘옥에 티’는 없었나.
“너무 많은 걸 보여주려고 하더라. 해외 패션위크에서는 대개 디자이너별로 20∼30벌의 엄선된 옷을 선보이는 데 비해 서울패션위크에선 무려 50여 벌의 옷을 내놓는 디자이너도 있었다. 그러면 쇼가 지루해진다. 지정석도 없어 관객들이 우왕좌왕했다. 서울패션위크는 시스템을 가다듬어 좀 더 럭셔리해져야 한다.”
이 대목에서 조 벡 씨도 ‘쓴소리’를 했다. “결국 한국 디자이너들이 쇼를 통해 선보인 옷들을 해외로 가져가 현지화시켜야 하는데, 해외 기반이 부족한 게 큰 걸림돌이다. 해외에서 설령 극찬을 받아도 디자이너들이 생업을 위해 한국에 살고 있으니, 해외 바이어들이 한국 디자이너 연락처를 얻기도 힘겹다. 디자이너와 바이어가 평소 친밀한 유대관계를 맺어야 비즈니스 관계로 발전할 텐데….”
―한국 패션의 가능성을 보긴 했나.
“물론이다. 국내 잡화 브랜드 ‘MCM’은 디자인과 소재 면에서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로 손색없었다. MCM의 뱀피 클러치백은 당장 아카데미 시상식에 들고 나가도 되겠더라.(이날 프랑스 ‘몽클레르’ 패딩 파카와 이탈리아 ‘알베르타 페레티’ 원피스를 입은 그는 갈색 MCM 숄더백을 들고 있었다) 본래 독일 브랜드였던 MCM을 국내 기업이 인수한 형태를 다른 한국 기업도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지난해 서울 경희궁에서 ‘프라다 트랜스포머’ 전시가 열린 후 한국 패션에 대한 해외의 관심이 뜨거워졌다. 이번에 한국에 있는 동안 많은 미국과 유럽의 패션계 인사들로부터 e메일을 받았다. ‘부럽다. 서울의 패션을 꼭 보고 싶다’고.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과 청담동, 종로구 인사동 등을 묶어 서울의 3색 패션 관광루트로 개발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 “레드 카펫 패션은 치열한 전략이다”
―당신은 ‘유명인(celebrity) 드레싱’의 최고 전문가로 통한다. 어떤 스타의 레드 카펫 의상이 요즘 돋보이는가.
“역사적으로 레드 카펫은 샤넬과 발렌티노 등 유명 패션 브랜드의 드레스들로 수놓였다. 물론 이들 브랜드의 드레스는 우아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좀 더 ‘파워풀한 순간’을 위해서는 ‘새로운 디자이너’의 옷을 입는 것도 전략이다. 한 예로 영화 ‘언 에듀케이션’에 출연한 여배우 로자먼드 파이크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프랑스 디자이너 롤랑 무레 씨의 옷을 입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지난달 카를라 브루니 프랑스 대통령 부인도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 부부가 엘리제궁을 방문했을 때 무레 씨의 롱 드레스를 입었다)”
―그 밖에 손꼽을 만한 레드 카펫 패션의 달인은 누구인가.
“캘빈 클라인 드레스를 멋지게 소화하는 줄리앤 무어는 자연스럽고도 우아한 패션 취향을 지녔다. 줄리아 로버츠는 그녀 자체가 패션이다. 지난달 열린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선 심플한 이브생로랑 드레스를 입은 케이트 윈즐릿, 샤넬 튜브 드레스를 선택한 세라 제시카 파커에게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레드 카펫에서 어떤 옷을 입느냐에 따라 스타의 이미지가 좌우된다. 레드 카펫 패션이야말로 치열한 전략이다.”
―당신이 스타일리스트라면 레드 카펫에서 꾸며주고 싶은 스타는….
“메릴 스트리프. 단 한 번도 대중에게 인상적인 패션을 보여주지 못했기에. 무엇이든 가능케 하는 패션 하우스, 크리스티앙 디오르에 그녀를 데리고 가 패션을 개조해 주고 싶다.”
―미래의 레드 카펫 패션은 지금과는 다른 스타일이 될까.
“1929년 제1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린 후 레드 카펫 패션은 대공황을 맞아 한 단계 도약했다. 미국 경제 사정은 극도로 어려웠지만 사람들은 화려한 영화를 보면서 일상의 고통에서 벗어나려 했다.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은 수익 대부분을 레드 카펫 의상비에 재투입했다. 여배우 캐서린 헵번이 패션 아이콘으로 떠오른 것도 이때다. 영국이 아직도 왕위를 계승하고 있는 것처럼 레드 카펫 패션의 이런 전통은 앞으로도 계속 남을 것이다. 미래에도 많은 디자이너들이 레드 카펫 위 스타들에게 옷을 입히고 싶어 할 것이다. 환호와 갈채는 레드 카펫과 패션의 공통된 속성이니까.”
그는 요즘 영국의 유명 호텔그룹 ‘도체스터’가 추진하는 ‘패션 프라이스 어워드’의 심사위원장을 맡아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서울패션위크가 한국의 패션 디자이너를 키우는 목적이라면, 이 상은 영국의 신진 디자이너를 발굴하기 위한 상이다. 유명 구두 디자이너 마놀로 블라니크 씨와 2년 전 가수 마돈나에게 권총 모양의 ‘샤넬’ 하이힐을 디자인해 줬던 신예 로렌스 데케이드 씨 등 쟁쟁한 디자이너들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실력 있는 디자이너들을 해외에 널리 알려 판매망을 뚫어주려는 것이다. 한국 패션도 이 같은 시도를 더 많이 해야 세계화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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