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삼국통일 한가운데서 꿈을 팔고 산 자매의 엇갈린 운명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2월 23일 03시 00분


연극 ‘꿈속의 꿈’
대본 ★★★★☆ 연출 ★★★★ 연기 ★★★☆

김유신의 누이 보희-문희 스토리
시적대사-전통연희 접목해 표현
뛰어난 극예술적 성취 이뤄

연극 ‘꿈속의 꿈’은 김유신의 여동생 보희(홍성경·왼쪽)와 문희(길해영)의 꿈 설화를 탈놀이와 꼭두각시놀이 등 전통연희와 접목해 삼국통일에 대한 가장 아름답고 여성적인 서사를 펼쳐냈다. 설화 속에서 운명의 지배를 받는 존재로 나타나는 보희와 문희는 이 연극에선 스스로 운명을 선택하는 주체적 여성으로 나온다. 사진 제공 코르코르디움
연극 ‘꿈속의 꿈’은 김유신의 여동생 보희(홍성경·왼쪽)와 문희(길해영)의 꿈 설화를 탈놀이와 꼭두각시놀이 등 전통연희와 접목해 삼국통일에 대한 가장 아름답고 여성적인 서사를 펼쳐냈다. 설화 속에서 운명의 지배를 받는 존재로 나타나는 보희와 문희는 이 연극에선 스스로 운명을 선택하는 주체적 여성으로 나온다. 사진 제공 코르코르디움
신라 삼국통일의 서사시에는 영원불멸의 두 영웅이 있다. 김유신과 김춘추다. 하지만 여성주의가 팽배한 요즘 이런 마초형 남자 주인공으로야 어디 관심이나 끌겠는가. 그래서 TV 드라마 ‘선덕여왕’은 그 숨은 주인공으로 선덕여왕이란 카드를 뽑았다. 그러면서 유신과 춘추를 여왕을 모시는 꽃미남으로 단장시켰지만 정작 삼국통일 근처에도 못 가고 끝나버렸다.

연극 ‘꿈속의 꿈’(장성희 작, 신동인 연출)은 삼국통일의 서사 한복판에 있음에도 드라마가 간과했던 여인들에 주목한다. 바로 유신의 누이 보희와 문희다. 이들 자매의 이야기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그리고 위작 논란 속에서도 ‘선덕여왕’에 큰 영감을 준 ‘화랑세기’에 모두 등장한다.

언니 보희는 경주 서악에 올라 눈 오줌에 서라벌 전체가 잠기는 꿈을 꾼다. 동생 문희는 비단치마를 주고 그 꿈을 산다. 얼마 후 오빠 유신이 축국(동양의 고대 축구)을 하다 춘추의 옷을 찢는다. 이를 수선해 주겠다며 춘추를 집으로 들인 유신은 보희를 찾지만 보희가 사양하자 문희를 시켜 옷깃을 달아주게 한다. 이를 계기로 춘추와 문희는 정을 통한다. 그 결과 문희는 백제를 멸망시킨 태종무열왕의 아내이자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한 문무왕의 어미로 온갖 광영을 누리나 보희는 잊혀진다.

이 설화엔 두 가지 암시가 담겼다. 첫째는 유신과 춘추의 연합이 정략결혼의 산물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여자 팔자는 결국 사내에게 달렸다’는 운명론이다. 연극은 첫 번째 암시를 수용하되 두 번째 암시는 뒤엎는 방식을 사용해 낭만적이면서도 비극적 정조를 띤 인생 드라마로 삼국통일의 영웅담을 재탄생시킨다.

설화 속에선 운명의 지배를 받는 것처럼 그려진 보희와 문희가 연극에서는 스스로 운명을 선택하는 주체적 여성으로 바뀐다. 보희(홍성경)는 춘추(강일)와 사랑하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제 꿈은 제가 꾸겠습니다”라며 오빠 유신(장용철)의 꼭두각시가 되기를 거부한다. 반면 문희(길해연)는 미천하지만 다정한 화랑 미곤(김은석)과 자유로운 사랑을 꿈꿨음에도 “네 자유에 날개를 달아주랴”라는 오빠의 뜻을 좇는다. 꿈은 그 전조일 뿐이다.

그 선택은 분명 운명의 갈림길이 된다. 하지만 누구의 선택도 단꿈이 되지 못한다. 낭만적 선택을 한 보희가 지독한 고독을 맛본다면 현실적 선택을 한 문희는 무수한 번뇌에 휩싸인다. 옛사랑에 대한 죄책감, 애정 없는 부부생활에 대한 회의, 끝없는 전쟁으로 인한 보위에 대한 불안, 인질 신세가 돼 해외를 전전하는 자식에 대한 걱정….

결국 모든 것을 가진 것 같은 문희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보희를 사지로 내모는 역설이 벌어진다. 오빠가 요구한 정략결혼을 거부했던 보희는 동생의 읍소에 끝내 당나라 장수와의 정략결혼을 받아들인다. “내 대신 니가 울고 있구나. 내가 울어야 할 눈물을 대신 흘리고 있어. 문희야, 내가 판 꿈을 찾아가련다. 돌려다오”라며. 자신이 오줌 누는 꿈을 꾼 뒤 “내 앞길이 온통 눈물바다가 되려나” 하고 걱정할 때 “내가 대신 울지요”라며 그 꿈을 덥석 사준 동생에 대한 화답이었다.

자매는 그렇게 오빠와 남편이 벌인 대업(大業)의 수습을 위해 자신들 본연의 꿈을 희생한다. “내 동생아, 넌 신라에서 번성꽃을 피우거라. 난 저들 나라에서 시드는 꽃을 피우리라”라는 보희의 대사처럼. 이에 비해 “가야의 못다 한 국운을 신라를 통해 이루리라”라는 유신과 “진골 출신 최초의 국왕이 되겠다”는 춘추는 자신들의 꿈을 위해 그들 자매와 무수한 백성의 꿈을 집어삼킨다.

시적인 대사와 탈놀이와 꼭두각시놀이 같은 전통연희를 접목한 연극은 그렇게 삼국통일에 대해 가장 아름답고 여성적인 서사를 펼쳐낸다. 거기에 역사적 수레바퀴나 운명의 힘에 대한 찬가는 없다. 오히려 욕망이 늪이 되고 꿈이 덫이 되는 인생무상에 대한 비가만 있을 뿐이다.

2008년 서울연극제 대상을 받았지만 단 3일밖에 공연할 수 없었던 이 작품은 삼국통일을 형상화한 극예술로서는 가장 뛰어난 성취라 할 만하다. 하지만 상상력이 더 큰 작용을 한 탓에 냉철한 역사인식이 결여된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연극을 역사로 곧 환치하는 우는 피해야 할 것이다. 2만 원. 28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미마지아트센터 눈빛극장. 02-889-3561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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