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성 전문기자의&joy]강화 나들길 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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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2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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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 두 걸음 돈대길… 피울음 머금은 바람 길

광성보 용두돈대. 광성보의 3개 돈대 중에서도 염하 쪽으로 가장 삐죽하게 튀어나온 곳이다. 강 건너는 김포의 덕포진. 용두돈대와 덕포진 사이의 염하(鹽河)가 바로 손돌목이다. 쿠르릉! 쿠르릉! 거센 물살이 콧김을 내며 흐른다.1871년 신미양요 당시 조선군은 이곳에서 장렬하게 싸우다 죽었다. 미군은 함포사격으로 이 돈대를 간단하게 무너뜨렸고, 곧이어 미군 해병대가 맨주먹이나 다름없는 조선군들을 죽였다. 대장깃발 ‘수(帥)’자 자리엔 성조기가 펄럭였다. 무명 30장을 겹쳐 만든 방탄조끼 흰 면갑(綿甲)은 미군 소총 앞엔 있으나마나였다. 날씨는 뜨거웠고, 병사들은 면갑 때문에 더욱 헉헉거렸다. 어재연 장군은 총검으로 난자당하고 목이 잘렸다. 미군은 전사자가 3명에 불과했다. 조선군 전사자는 350여 명(추산). 강화도=서영수 전문기자
광성보 용두돈대. 광성보의 3개 돈대 중에서도 염하 쪽으로 가장 삐죽하게 튀어나온 곳이다. 강 건너는 김포의 덕포진. 용두돈대와 덕포진 사이의 염하(鹽河)가 바로 손돌목이다. 쿠르릉! 쿠르릉! 거센 물살이 콧김을 내며 흐른다.1871년 신미양요 당시 조선군은 이곳에서 장렬하게 싸우다 죽었다. 미군은 함포사격으로 이 돈대를 간단하게 무너뜨렸고, 곧이어 미군 해병대가 맨주먹이나 다름없는 조선군들을 죽였다. 대장깃발 ‘수(帥)’자 자리엔 성조기가 펄럭였다. 무명 30장을 겹쳐 만든 방탄조끼 흰 면갑(綿甲)은 미군 소총 앞엔 있으나마나였다. 날씨는 뜨거웠고, 병사들은 면갑 때문에 더욱 헉헉거렸다. 어재연 장군은 총검으로 난자당하고 목이 잘렸다. 미군은 전사자가 3명에 불과했다. 조선군 전사자는 350여 명(추산). 강화도=서영수 전문기자
《말랑말랑한 흙이
말랑말랑 발을 잡아준다
말랑말랑한 흙이
말랑말랑 가는 길을 잡아준다

말랑말랑한 힘
말랑말랑한 힘

<함민복의 ‘뻘’에서>》
안녕하시꺄?(안녕하십니까?) 그래시꺄?(그랬습니까?) 사셨시꺄?(사셨습니까?) 다녀오시꺄?(다녀오십니까?) 얼마니꺄?(얼마입니까?) 있으니꺄?(있습니까?) 정말이꺄?(정말입니까?)

‘∼꺄?’는 강화말씨 끝에 붙는 의문형 어미이다. 강화 어르신들은 아직도 자주 쓴다. 전라도 사람들의 ‘∼이잉’만큼이나 흔히 쓴다. 어서 오시겨(어서 오십시오), 기시겨(계십시오), 그러시겨(그러십시오), 주시겨(주십시오) 등의 ‘∼겨’도 그렇다. 그래씨여(그랬어요), 해씨여(했어요), 가씨여(갔어요)의 ‘∼여’도 독특하다. 없시다, 그랬시다, 모르갓시다의 ‘∼다’는 대충 짐작할 수 있지만, 하셨시다(하셨습니다), 하이다(합니다), 가이다(갑시다), 허가씨다(하겠습니다)에 이르면 무슨 말인지 그 뜻을 헤아리기 어렵다.

1900년에 전통한옥으로 지어진 성공회 성당. 경복궁 도편수가 백두산 나무로 지었다. 단아하고 아늑하다.
1900년에 전통한옥으로 지어진 성공회 성당. 경복궁 도편수가 백두산 나무로 지었다. 단아하고 아늑하다.
그만큼 강화도는 오래된 섬이다. 뿌리가 깊다. 묵은 장맛 같은 독특한 말씨도 오래오래 곰삭아서 배어나온 것이다. 사람들도 웅숭깊다. 오래된 우물이나 정원 같다. 강화도는 ‘꽃섬’이다. 한강 임진강 예성강 아래에 있는 섬이다. 한강 임진강 예성강은 강화도 앞에서 서해바다와 몸을 섞는다. 원래 ‘강하도(江下島)’가 어느 순간 ‘강 아래 꽃섬(江華島)’이 된 것이다. 땅이 기름지다. 1년 농사로 3년 먹고 산다는 곳이다.

강화섬은 한양 도성의 목젖이다. 신라 때 ‘혈구진(穴口鎭)’으로 불렸던 것도 그런 이유다. 이곳이 무너지면 서울 장안이 위험하다. 한강 물길을 타고 그대로 한달음에 쳐들어갈 수 있다. 강화섬은 우직하다. 한강 문턱에서 오불관언 가부좌를 틀고 있다. 서해바다에서 불어오는 맞바람을 온몸으로 막고 있다. 절집 사천왕처럼 눈을 부릅뜨고 사방을 살펴보고 있다. 구한말 그렇게 프랑스군 미군 일본군을 막다가 무수히 피를 흘렸다.

강화 나들길 1코스 첫 출발지는 강화읍내의 용흥궁이다. 강화역사관까지 이어지는 1코스 길이는 17.5km. 강화읍내를 둘러보며 강화섬의 뿌리를 느낄 수 있다. 나들길은 현재 7코스까지 총 117km가 열렸다. 2코스 강화역사관∼온수사거리 15km, 3코스 온수사거리∼가릉 18km, 4코스 가릉∼망양돈대 10km, 5코스 강화버스터미널∼외포리선착장 18km, 6코스 화도버스터미널∼강화갯벌센터 20km, 7코스 강화버스터미널∼광성보 18.5km.

‘나들’은 서해 바닷물이 나고 드는 땅, 단군과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넘나들던 섬, 고구려 신라 백제인들이 드나들던 포구, 고려 개성왕족과 귀족들이 머무르다 떠난 도읍, 이씨조선 왕족과 선비들이 유배를 왔다가 더러는 사약 받아 죽고, 더러는 다른 유배지로 떠나던 곳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 ‘나들’은 인간의 한 호흡인 ‘날숨과 들숨’인 것이다.

용흥궁은 조선 25대 임금 ‘강화도령’ 철종(1831∼1863, 재위 1849∼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살던 집이다. 철종 이원범은 이곳에서 18세까지 나무꾼 떠꺼머리총각으로 살았다. 지금은 기와집이지만 원래 볼품없는 초가집이었다. 부모도 없어 의지할 데라곤 선원면 냉정리에 있는 외가뿐이었다. 냉정리는 ‘찬 우물’이라는 뜻. 원범은 바로 그곳 내수골 찬우물약수터에서 양순이라는 처녀와 만나며 외로움을 달랬다. 나무꾼 원범은 어느 날 영문도 모른 채 갑곶나루에서 배를 타고 한양에 올라가 임금이 되었다. 공중에서 훨훨 날며 살던 새가 새장에 갇힌 꼴이었다. 철종은 늘 나무꾼 시절을 그리워했다. 정치는 안동 김씨 몫이었다. 결국 그는 서른둘의 나이로 숨을 거둔 뒤, 경기 원당의 서삼릉(예릉)에 묻혔다. 강화섬 양순이도 평생 홀로 살다 죽었다.

용흥궁 바로 옆엔 전통한옥으로 지은 한국 최초 성공회 건물(1900년 건축)이 있다. 백두산 나무로 경복궁 도편수가 지었다. 종도 교회당 종탑식으로 높이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절집의 범종처럼 땅 위에 낮게 드리워져 있다. 웬만한 절집보다 아름답다. 단아하고 우아하다.

연미정(燕尾亭)은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한 물이 흘러내리다가 남북으로 갈라지는 곳에 있는 정자이다. 두 강이 합쳐진 물은 한 줄기는 서해로, 한 줄기는 강화해협 염하(鹽河)로 흘러든다. 그 모양이 마치 제비꼬리 같아서 연미정이다. 한강 마포나루에 갈 배들은 이곳에서 기다렸다가 만조에 맞춰 일제히 뱃머리를 움직였다. 북쪽 바다 건너엔 황해도 개풍군이 아련하다. 그 아래 염하 너머 김포 땅도 아슴아슴하다. 코앞엔 한강 무인도 유도가 있다. 어느 여름 홍수 때 북에서 밀려온 소가 살던 곳이다. 겨울엔 한강과 임진강에서 밀려온 얼음덩이가 이곳 연미정 앞에서 파시를 이룬다. 서걱서걱 몸 비비는 소리가 슬프다.

나들길 2코스는 염하를 따라가는 돈대길이다. 돈대(墩臺)는 해안요새 같은 곳이다. 포대와 총구가 설치돼 있다. 시야가 탁 트인 높은 누대에 자리 잡아 한강으로 들어가는 외국배를 한눈에 볼 수 있다. 강화섬은 해안을 따라 톱니바퀴처럼 7진 5보 53돈대가 자리 잡고 있다. 2, 3개 돈대가 모이면 ‘보(堡)’나 ‘진(鎭)’이다.

광성보는 1871년 신미양요 때 조선군과 미군이 치열하게 백병전을 벌였던 곳이다. 물살 세기로 이름난 손돌목 바로 코앞에 있다. 손돌, 광성, 용두 3돈대로 이뤄졌다. 당시 조선군은 대장 깃발인 ‘帥(수)’기를 빼앗기며 옥쇄했다. ‘帥’자 깃발은 2007년 136년 만에 미국의 장기대여 형식으로 한국에 돌아왔다. 가로 세로 4.5m 크기에 삼베광목으로 만들었다.

1871년 6월 10일 미국은 군함 5척에 병력 1230명을 이끌고 강화섬을 공격했다. 미국은 8인치와 9인치 85문의 대포를 가지고 있었다. 9인치 포 사거리는 무려 1560m. 조선군 대포 사거리는 700m에 불과했고, 그것마저 조준조차 되지 않았다. 포알도 날아가기는 하지만 폭발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쇠구슬이 큰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거나 같았다. 소포는 조준은 됐지만 사거리가 300m로 짧았고, 불량기포도 120m밖에 날아가지 않았다. 조선군 화승총은 사거리가 120m에 불과했다. 미군의 레밍턴롤링블록 소총(400m)이나 스프링필드소총(914m)은 그보다 3∼7배나 길었다.

미군은 함포사격으로 간단하게 초지진을 무너뜨리고 해병 450명이 순식간에 상륙했다. 6월 11일 아침 덕진진도 무너졌다. 남은 조선군은 광성보에 집결했다. 어재연 장군(1823∼1871)과 그의 동생 어재순(?∼1871)이 이끄는 조선군은 그곳에서 48시간 혈전을 벌였다. 미군은 함포사격으로 광성보를 초토화했다. 미국 해병대는 비 오듯 총을 쏘아대며 돈대성곽을 공격했다. 당시 미군의 블레이크 중령은 “남북전쟁 때에도 그렇게 짧은 시간에, 그렇게 많은 포화와 총알을 쏟아 부은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조선군은 용감했다. 단 한 명도 항복하지 않았다. 무기가 없으면 돌과 흙을 집어 던졌다. 최후 순간에 일부는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했다. 병사 100여 명이 염하 손돌목에 몸을 던졌다. 조선군은 350여 명이 죽었다(미군기록 시신확인 243명). 어쩔 수 없는 부상자 20여 명만이 포로로 잡혔다. ‘어재연 장군은 칼이 부러지자 납 탄환을 던지며 싸웠다. 하지만 끝내 적의 총검에 난자되고, 머리가 잘렸다’(황현 ‘매천야록’).

미군은 매키 해병중위와 수병 2명이 죽었고 6명이 부상했다. 미군은 후에 “조선군 병사 4, 5명이 ‘帥(수)’ 깃발을 지키려고 온몸에 꽁꽁 묶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당시 사진엔 흰옷 차림의 조선군 시체가 즐비했다. 조선군들은 그 더운 초여름에 하나같이 두꺼운 면갑(綿甲)을 입고 있었다. 면갑은 무명 30장을 겹쳐서 만든 방탄조끼. 그러나 미군 소총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미군 대포화염에 타들어가기 일쑤였다.

이건창(1852∼1898)은 강화학파의 대표학자이다. 14세에 문과 급제해 조선시대 통틀어 최연소 합격한 천재다. 그의 할아버지 이시원(1790∼1866)은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쳐들어오자, 도망가지 않고 양잿물을 마시고 목숨을 끊었다. 어린 이건창은 그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이건창은 암행어사로서 탐관오리를 처벌해달라고 상소했다가 되레 귀양살이를 가곤 했다. 하지만 굽히지 않았다. 그는 강화학파답게 ‘인간을 위한 학문, 조선을 위한 학문’을 꿈꿨다. 그렇다. 강화도는 ‘인간의 섬’이다. ‘조선의 땅’이다. 강화갯벌처럼 ‘조선의 허파꽈리’이다.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손돌의 恨씻은 병인양요▼

광성보 용두돈대 앞 염하(鹽河)는 물살이 세다. 꾸르릉! 꾸르릉! 강물이 소용돌이치며 흐른다. 사람들은 이곳을 손돌목이라고 부른다. 강폭도 다른 곳보다 100여 m는 좁다. 강 저쪽은 김포의 덕포진이다. 손돌은 고려 고종임금(재위 1213∼1259)을 배에 태우고 가던 뱃사공 이름이다. 고종은 이곳 급류를 지날 때 배가 심하게 요동치자, 손돌이 자신을 죽이려고 일부러 이곳으로 배를 끌고 간다고 생각했다. 배가 자꾸만 급류 쪽으로 달려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뱃길을 훤히 꿰뚫고 있던 손돌은 “보기에는 그렇지만 좀 더 나아가면 앞이 트일 것이니 크게 걱정하지 마십시오”라고 아뢰었다. 고종은 더욱 의심이 들어 손돌의 목을 당장 베라고 명령했다.

용두돈대 성곽총구에서 바라본 염하. 염하는 김포와 강화섬 사이를 흐르는 300∼500m의 해협이다.
용두돈대 성곽총구에서 바라본 염하. 염하는 김포와 강화섬 사이를 흐르는 300∼500m의 해협이다.
손돌은 죽어가면서까지 말했다. “바가지를 물에 띄우고 그것을 따라가면 반드시 뱃길이 트일 것이다.” 손돌의 말은 틀림이 없었다. 고종은 ‘아차!’ 했지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올 리 없었다. “고이 장사 지내주라”며 멋쩍어할 뿐이었다. 손돌의 묘는 물 건너 김포 덕포진 북쪽 해안에 있다. 해마다 손돌이 죽은 음력 10월 20일이 되면 이곳 강화해협에는 큰 바람이 분다. 날씨도 매섭다. 이른바 ‘손돌바람’ ‘손돌 추위’다.

1866년 병인양요 당시 조선군 양헌수 대장(1816∼1888)도 손돌과 관계가 있다. 강화섬은 이미 프랑스군 1000여 명이 완전 장악하고 있었다. 강화로 가는 모든 물길은 프랑스 군함 7척의 손 아래 들어가 있었다.

양헌수 대장은 손돌목을 건너 강화섬에 기습상륙하기로 했다. 달빛이 어두운 11월 5일(음력 9월 28일)을 택했다. 그는 손돌의 묘를 찾아 “손돌님의 영혼이 있다면, 이곳을 지나는 적선이 모조리 전복되어 전멸하게 해 달라”고 빌었다.

양 대장은 군선 3척에 병사 549명을 태운 뒤 “말에 오르면 집을 잊고, 성을 나서면 내 한 몸 잊었노라(上馬忘有家 出城忘有身)”라는 시 한 수를 읊었다. 그날 밤 조선군은 격류의 손돌목을 건너 덕진진에 상륙하는 데 성공했다. 내친김에 11월 7일 정족산성에 스며들어 진을 치고 기다렸다. 프랑스군이 공격해 올 것으로 보이는 남문 동문에 300여 명의 포수를 나눠 배치했다. 북문 서문엔 경군 향군을 내세웠다.

11월 9일 프랑스군 160명은 야포도 없이 동문 남문 쪽으로 공격해 왔다. 조선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 사격을 퍼부었다. 적군은 사망 6명, 부상 60여 명의 흔적을 남기고 퇴각했다. 조선군은 전사 1명, 부상 4명뿐이었다. 유리한 지형을 먼저 차지한 뒤 기다리지 않았더라면 이룰 수 없는 승리였다. 양 대장은 후에 “우리 총은 사거리가 100여 보에 불과했지만, 적의 총알은 500보를 능가했다”고 말했다.

프랑스군은 40여 일 만에 강화섬에서 물러났다. 그들은 행궁 외규장각 등을 불태웠다. 의궤류 300여 권을 약탈하여 나폴레옹 3세에게 바쳤다. 정족산성 안에 보관돼 있던 조선왕조실록과 조선왕실족보가 불타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그것은 양헌수 대장의 정족산성 승리가 결정적이었다.
|트레킹 정보|

◇교통

▽버스=△서울신촌∼김포공항(송정역)∼김포고촌∼김포터미널∼마송∼김포대∼강화 △인천시외버스터미널∼석바위∼제물포∼송림동∼검단∼양곡∼김포대∼강화

▽승용차=△100번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김포나들목∼김포∼강화방면 진출 국도 48호선∼양촌면 누산삼거리에서 지방도 352호선 △88올림픽대로 끝 지점∼김포 제방도로 타고 누산삼거리∼지방도 352호선

◇먹을거리

▽연미정 아래 가정식백반=간판 없고 내부 허름하지만 할머니 손맛 으뜸. 일명 ‘연미정 카페’로 불린다. 미리 예약해야 오래 기다리지 않는다. 032-933-9377 ▽돈대회식당(화두돈대∼오두돈대)=회덮밥 된장찌개 칼국수. 032-937-8872 ▽국수나라(오두돈대∼광성보)=032-937-5251 ▽광성식당(광성보부근)=된장찌개 비빔밥 청국장. 032-937-3869 ▽청해식당(광성보 부근)=수제비 보리밥. 032-937-6444 ▽더리미 장어마을 선창집(강화역사관∼용진진)=032-932-7628 ▽용진참숯장어(강화역사관∼용진진)=032-932-7998 ▽대선정(초지대교부근)=시래기밥. 032-937-1907 ▽우리옥(강화읍내)=옛날백반. 032-934-2427

◇문의=강화군청 문화관광과 032-930-3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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