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테마 에세이]독감<1>한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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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1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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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뜨거운 손


여러 해 전 겨울, 할머니가 심한 감기몸살로 이레쯤 누워계셨던 적이 있었다. 할머니는 매일같이 자전거를 타셨고, 저녁이면 개를 끌고 동네를 산책하셨다. 늘 건강하셨고 늘 웃으셨던 분이었다. 나는 약국에서 감기약을, 편의점에서 뜨거운 쌍화탕을, 과일가게에서 귤 한 봉지를 샀다. 열기와 한기가 혼란스럽게 오고가는 와중에 흘러내린 이불을 다시 덮어드렸고, 손을 잡아드렸다. 할머니의 손은 내 손보다 뜨거웠다.

할머니의 몸에 남아 있던 감기 기운이 거의 물러갔다고 생각될 무렵, 나는 할머니를 모시고 집에서 가까운 중국식당으로 갔다. 여름에는 중국냉면과 고량주를, 겨울에는 굴짬뽕과 고량주를 먹고 마시던 곳이었다. 매사에 말이 없는 손녀딸이 먼저 외식을 청하자, 할머니는 더없이 좋아하셨다. 식당 주인이 내게 알은체를 했고, 직접 할머니의 외투를 받아 옷걸이에 걸어주었다.

곧 굴짬뽕 두 그릇이 나왔다. 할머니는 간간이 기침을 하시면서 조용히 음식을 드셨다. 그때 내가 생각할 수 있었던 음식이 그것뿐이었을까. 돌아오는 길에도 할머니는 내 손을 꼭 잡고 계셨다. 나는 유독 키가 크고, 할머니는 아주 작으셨던 까닭에, 당신은 거의 매달린 모습을 하고 계시면서도 집에 도착할 때까지 잡은 손을 놓지 않으셨다.

그리고 지난해 겨울, 할머니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셨다. 중환자실에서 나는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나와 할머니는 서로의 온기를 잠시나마, 간호사가 제지할 때까지, 나누어 가졌다. 아니, 나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날 할머니의 손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았다. 우리 체온이 동일했기 때문이었다.

상을 치르고 난 뒤, 나는 빈 집에 개와 함께 남겨졌다. 그날 밤 할머니는 돌아오시지 않았지만, 대신 감기가 나를 찾아왔다. 나는 심한 독감으로 나흘 밤낮을 앓았다. 혼곤한 가운데 할머니가 쓰시던 이불을 꺼내 덮었다. 개가 이불 사이 빈 공간으로 파고들어왔다. 긴 잠에서 깨어나 보니 부재중 전화가 여러 번 걸려와 있었다. 몽롱한 목소리로 아버지의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는 한달음에 대전에서 서울로 오셨고, 냄비도 아닌 프라이팬에 인스턴트 수프를 끓여주셨다. 다른 음식들도 식탁에 올라온 것 같은데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수프는 엄마의 꽃게찌개나 외할아버지의 계란부침, 고모의 왕만두처럼 내게 하나의 순간을 구성하기에 충분했다.

나는 수프 한 그릇을 겨우 비웠고, 다시 깊이 잠들었다. 일어나보니 아버지는 계시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잠결에 아버지를 배웅한 것 같기도 했다. 열이 거의 내려 있었다. 침대시트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새 시트를 꺼내려면 할머니의 장롱을 열어야 했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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