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길]<21>경제개발의 길목에서

  • 입력 2009년 4월 24일 03시 02분


<21>외자 도입과 인권 문제

고도성장 위해 외자도입 전념

세계은행 총재 각별한 지원 받아

인권문제 지적에 정부 위해 변명

1970년부터 1979년까지 10년간 평균 국민총생산(GNP) 성장률은 9.3%이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투자율(총투자÷GNP)은 28.1%였다. 국내 저축률은 22.9%에 불과했으므로 그 차액 (투자율―국내저축률) 5.4%는 외국차관, 외국인투자와 같은 ‘해외저축’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됐다. 특히 1970년대에 정부가 외자 도입에 박차를 가한 것은 중화학공업 건설과 사회간접자본(SOC) 확충을 위한 것이었다. 나는 재무부에서 내자 조달을 고민하다가 국민투자기금을 만들었는데 1974년 경제기획원으로 온 다음에는 외자 조달에 전념해야 했다. 부총리 임기(1974∼79년) 중 112억 달러의 차관이 도입됐는데 이는 박정희 정부 시대의 총도입액 151억 달러의 74%에 해당한다. 이로 인해 국회에 나가면 야당으로부터 ‘외채 망국’이라는 비난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고도 성장과 수출의 밑거름이 돼 마침내 우리나라를 순채무국에서 순채권국으로 만든 것이다.

차관을 도입하자니 세계은행은 물론 미국과 유럽공동체(EC)의 정부와 금융기관을 돌아다녀야 했다. 다행히 1970년대 전반기까지는 국제환경이 매우 유리했고 그에 더해 해마다 고도성장을 기록하는 한국의 위상과 신용도는 날로 높아갔다.

이 무렵 세계은행 로버트 맥나마라 총재로부터 각별한 지원을 받게 된 것을 잊을 수 없다. 그는 새마을사업, 교육과 기술개발, SOC 확충에 필요한 차관 요청들을 너그럽게 받아줬고 심지어 상업적 성격의 차관(현대양행의 창원 중기공장과 같은) 신청까지도 받아줬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나를 오찬에 초대했는데 그것은 나에게 특별히 할 말이 있어서였다. 한국 정부의 차관 신청을 심의하는 회의 때마다 선진국 이사들이 한국의 인권 문제를 제기하므로 그들을 설득하기가 매우 힘들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제발 인권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박정희 대통령에게 간곡히 건의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나는 알겠다고 하면서도 정부를 위해 변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북한과 같은 공산주의 체제하에서는 빵과 자유가 양립할 수 없으므로 민주화를 바랄 수 없지만 남한과 같은 자유경제 체제하에서는 경제가 성장해 국민들의 생활수준이 향상되면 필연적으로 민주화 세력이 자생하고 결국에는 정치적 민주화가 실현될 것이다, 지금 우리는 민주화의 경제적 기초를 만드는 중이니 인내를 갖고 계속 도와달라고 나는 간청했다.

돌이켜 보면 그는 틀림없이 한국의 은인이었다. 내가 1980년 국무총리로 취임한 후 그에게 편지를 보내 그의 도움으로 이뤄진 SOC의 금자탑들을 보러 한국에 오라고 초청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오지 않았다.

내가 야인(野人)이 된 후 그를 국제회의에서 다시 만났는데 아프리카 최빈국을 돕는 일에 바빠서 내 초청에 응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 회의에서 한국의 성공사례를 예로 들면서 최빈국의 기본적인 문제는 지도자가 없다는 것이니 지도자 양성을 위한 국제적 프로그램을 만들자고 역설하고 있었다.

<남덕우 전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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