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가슴속 묻은 사랑 붓끝으로…‘붉은 비단보’

  • 입력 2008년 5월 17일 02시 58분


작가 권지예 씨는 ‘붉은 비단보’를 통해 “지독히 현실적이면서도 성찰적이고, 분열적이면서도 타협적인 예술가를 그려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사진 제공 이룸
작가 권지예 씨는 ‘붉은 비단보’를 통해 “지독히 현실적이면서도 성찰적이고, 분열적이면서도 타협적인 예술가를 그려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사진 제공 이룸
◇붉은 비단보/권지예 지음/392쪽·1만1700원·이룸

“현모양처의 대명사인 신사임당은 알려진 대로라면 소설적 매력이 없는 인물이죠. 하지만 유교적 전통에 충실한 그녀의 삶 이면에 예술가로서 눈물 냄새, 몸 냄새가 물씬 밴 모습이 존재했다면 어땠을까요?”

소설가 권지예(48·사진) 씨의 신작 소설은 이런 ‘발칙한’ 궁금증에서 출발한다. ‘누구나 잘 안다고 믿고 있는’ 그녀에게 역사에서 조명되지 않은 다른 삶이 있으리란 가정.

‘뱀장어 스튜’(2002년)와 ‘꽃게무덤’(2005년)으로 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권 씨가 3년 만에 새 작품 ‘붉은 비단보’를 들고 돌아왔다. 사대부 여인과 예인으로서의 삶의 접점을 찾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한 한 여인의 일생을 담아낸 소설이다.

권 씨는 ‘폭풍 같은 광기, 비극적인 삶으로 대변되는 진부한 예술가상이 아니라 현실적이면서도 이성적인 면모를 갖춘 새로운 예술가상’을 그리기 위해 소설의 시간을 조선시대로 되돌리고, 생몰 연대가 각기 다른 역사적 인물들을 한 공간에 불러냈다.

신사임당을 모티브로 한 주인공의 이름은 ‘항아(恒我)’. 아들을 낳고 싶다며 부모가 지어준 ‘개남(開男)’이란 이름을 거부하고 스스로 이름을 지은 당돌한 아이다. 여성에겐 자아란 개념조차 허용되지 않았던 시대, ‘항상 나이고 싶다’는 뜻의 이름은 자의식의 발현을 뜻한다.

그녀는 어린 시절 또래 친구인 가연, 초롱과 함께 어울리며 그림, 글씨, 춤을 익힌다. 이들은 각각 허난설헌, 황진이를 모티브로 삼은 인물들. 역사 속의 대표적인 여성 작가를 한데 묶어낸 ‘퓨전 역사소설’의 묘미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항아는 평생의 정인(情人)이 되는 준서와 사랑에 빠지지만 그의 집안이 역적으로 몰려 몰락한 후 인연은 끊어진다. 부모의 간청으로 ‘소시민적 성향’을 지닌 평범한 남자와 혼례를 치른 그녀는 현숙한 아내와 자애로운 어미로서의 삶을 포용하고 일상에 묻어나는 예(藝)의 또 다른 경지를 느낀다. 하지만 ‘흐르는 물처럼 끊을 수 없고, 안개처럼 가둘 수 없고, 바람처럼 잡을 수 없는 허허로운 마음’ 역시 끊임없이 그녀를 괴롭힌다.

가슴 깊이 묻어둔 정인을 그리워하며 그린 그림과 연서를 보관한 붉은 비단보는 시대의 굴레로 세상과 소통하지 못한 그녀의 예술혼을 상징한다. 정인과의 이루지 못한 사랑은 죽음을 맞을 때까지 그녀가 추구한 예술의 근간이자 원동력이 된다.

작가는 “일상적인 삶과 예술의 경계에서 영혼의 허기를 달래기 위해 항아는 멈추지 않고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쓴다. 자신만의 세계를 찾은 사람만이 두 세계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는 걸 항아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는 어느 시인의 노래처럼 예술은 언제나 현실과 이상의 경계 어디쯤에서 빛을 발하는 게 아닐까.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