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2008년 5월 17일 02시 58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올해 창간 88주년을 맞은 동아일보는 17일 지령(紙齡) 2만7000호를 발행한다. 국내 언론사 연구의 권위자인 정진석(69)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는 “1920년 창간된 이래 2만7000호에 이르기까지 동아일보는 민족의 대변지이자 언론을 이끄는 구심점으로 자리 잡아 왔다”고 말했다.
2004년 정년퇴직한 정 교수는 서울 서초구 반포본동 한 상가 건물에 있는 개인 연구실에서 집필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종이에 소박하게 ‘정진석 연구실’이라고 쓰인 문을 열고 들어가자 수많은 옛 신문의 향기가 밀려 들어왔다.
연구실엔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漢城旬報)에서부터 독립신문,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경성일보, 매일신보, 해방공간의 신문 등 그가 직접 해제를 붙인 신문 영인본이 빼곡히 차 있었다. 또한 동아일보 창간호부터 일제강점기 신문을 모아놓은 축쇄판, 조선총독부 언론통제비밀자료 등 언론사 자료가 박물관처럼 정리돼 있었다. 그는 “자료를 집 안에 쌓아 놓을 공간이 없어 퇴임 후 연구실을 따로 마련했다”고 말했다.
○東亞 백지광고 기협회보 보도해 고초
―최근 신문 방송 겸영과 관련한 세미나에 참석하셨는데요. 앞으로 미디어 시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신문이 역사에서 어떠한 역할을 해 왔는가를 연구해 온 학자로서 점차 신문의 부수가 줄고, 활자매체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반면 TV 수상기는 심지어 한 집에 2, 3대씩 있는 경우도 있지요. KBS는 메이저 신문 3사를 합친 것보다도 훨씬 많은 인력과 매출액을 갖고 있습니다. 1980년대 언론통폐합 때 거대해진 지상파 방송사의 여론 독과점은 어떤 방식으로든 완화시키는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예전에는 지상파 주파수가 한정됐지만, 기술 발전에 따라 전파자원이 많아지는 상황입니다. 신문과 방송의 겸영을 엄격하게 금지한 규정 등은 새로운 방송통신 융합시대에 맞춰 재정비되어야 합니다.”
―언론사 연구는 어떻게 시작하시게 됐나요.
“1966년부터 1977년까지 기자협회보의 편집실장을 맡았어요. 처음에 동아일보 창간기자였던 유광렬 선생에게 ‘한국의 기자상’이란 글을 연재해 달라고 부탁했지요.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대선배 언론인들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60회 동안 연재됐어요. 저도 구한말이나 일제강점기 명논설을 모은 ‘직필춘추(直筆春秋)’와 일제 때 언론인들의 수난과 투쟁의 역사를 다룬 ‘언론유사(言論幽史)’ 시리즈를 쓰면서 진학문(동아일보 창간 정치부장), 김기진, 조용만 씨 등 원로 언론인들을 수없이 만나 인터뷰하고, 도서관에서 옛 신문을 찾아보다가 언론사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당시 시리즈를 모아 발간한 ‘일제하 한국언론투쟁사’(1975년)가 제 첫 작품이었습니다.”
정 교수는 1970년대 기자협회보 편집실장을 맡으면서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와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크게 보도해 당국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또한 2000년 동아미디어센터 신문박물관 개관 당시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대한매일신보 편집국 태극기와 영국기 등 각종 희귀자료를 기증하는 등 꾸준히 동아일보와 인연을 맺어 왔다.
○송진우-주요섭-이은상 등 현대사 주역 배출
―창간 88주년, 지령 2만7000호를 맞은 동아일보에 대해 말씀해 주신다면….
“일제강점기 동아일보는 신문사일 뿐 아니라 민족운동의 중심 기관 역할을 했습니다. 정치를 할 수 없던 시절에 민족운동 진영의 유일한 합법적 공간이었죠. 김성수, 송진우, 장덕수, 여운형 등 수많은 언론인이 광복 후 정치계로 나선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1932년 창간된 신동아 편집진만 봐도 설의식(수필가), 주요섭(소설가), 고형곤(철학자), 이상범(화가), 이은상(시인) 등 광복 후 학계, 관계, 문화계의 주도적인 인사들이 많았습니다. 또한 광복 이후 극심한 좌우익 대립 속에서 동아일보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자유당 독재 견제, 민주화를 이루는 데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정 교수는 ‘일제시대 민족지 압수기사 모음집’과 ‘1930년대 문자보급운동 교재’ 등을 펴내 일제강점기 민족지의 투쟁과 문화운동을 소개하기도 했다. 그는 “한국 언론사에서 신문사가 펼친 캠페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구한말 대한매일신보 등이 펼쳤던 ‘국채보상운동’이고, 또 하나는 1930년대 ‘브나로드-한글보급운동’이었다”고 말했다.
“젊은 시절 총독부가 동아일보 등 민족지들을 검열해서 삭제했던 ‘압수기사’ 목록집을 발견했을 때 무척 떨리는 마음이었어요. 소문으로만 존재하던 압수 삭제기사의 원본을 읽고 감동했습니다. 총독부는 언론통제를 했던 실상을 ‘비밀문서’ 속에 남겨두었던 거예요. 또한 1970년대 고서점에서 일제강점기 동아일보의 ‘한글보급운동’ 교재를 구했을 때도 무척 흥분됐었지요. 당시 동아일보는 발행부수(5만 부)보다도 훨씬 많은 50만∼60만 부의 한글보급운동 교재를 전국에 배포해 운동을 벌였어요. 심훈의 소설 ‘상록수’가 브나로드 운동을 배경으로 한 것입니다. 동아일보는 ‘한글의 노래’를 작곡해 보급하기도 했어요. 이 운동은 단순히 한글을 가르치자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말과 글을 쓰지 못하게 하던 시대에, 정신적 독립운동이었지요.”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