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읽는 세상]김구림, 키퍼, 혹은 아웃사이더

  • 입력 2008년 4월 8일 02시 53분


《평지보다는 오르막길이 훨씬 더 많았지 싶다. 1958년 대구에서 첫 개인전을 연 이래 50년간 타박타박 걸어온 길은 사뭇 고단하고 외로운 여정이었다.

구태의연한 사유를 거부하면서 ‘제도권 미술의 아웃사이더’를 자처해온 김구림(72)의 삶은 늘 그랬다.

‘그 사막에서 그는/너무도 외로워/때로는 뒷걸음으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오스탕스 블루의 ‘사막’)》

변화무쌍하고 치열했다. 끊임없이 자신의 이전 작업을 부정하고 예술의 전 장르와 매체에 대해 도전과 실험을 감행해온 화업 반세기. 홀로 현대미술을 익혀 전위미술의 중심에 서 온 그의 예술이 정주하지 않았듯, 일본 미국을 거쳐 2000년 귀국할 때까지 유목의 삶을 살았다. 비슷한 작품을 ‘우려먹는’ 작가들에게 독한 소리를 퍼부어 ‘이단’ 취급도 받았다. 구상에서 출발해 설치미술과 퍼포먼스, 비디오와 일렉트릭 아트 등으로 종횡무진 전개된 작업. 한강 둑을 불태워 흔적을 남기는 대지예술을 펼치고 실험영화 연출에 이르기까지, 도저히 한 사람의 작업이라고는 보기 힘든 일들을 해냈다. 끈끈한 학연이나 인맥 같은 것도 없이 단기필마로 활동하면서 인간적으로는 고독했고, 팔리는 작품과 거리가 멀어 경제적으로는 힘들었다. 그런데도 남이 가지 않는 길을 개척해 왔기에 ‘한국 현대미술의 독보적 존재’로 평가받는다.

“반대되는 것은 곧 하나다. 있음은 곧 없음의 상대성이며 더불어 존재한다. 세상만사는 다 음양으로 형성돼 있다.” 전시에 내보낼 ‘음양’ 시리즈의 작품을 설명하는 김구림의 목소리에선 열정이 넘친다. 그는 16일부터 5월 5일까지 서울 종로구 사간동 갤러리 반디에서 조촐한 개인전을 연다. 디지털 프린트 위의 페인팅 작업에선 붓 터치가 꿈틀거린다. 오브제 소품에선 기이한 상상력과 관능적 이미지가 공존한다. 전혀 무관한 사물이 한 화면에서 새로운 관계를 형성한다. ‘그는 마술사, 연금술사처럼 버려진 사물에 혼을 넣어 독특한 상황으로 몰고 간다.’(미술평론가 박영택) 작가의 시선은 늘 동시대 감성과 사유에 꽂혀 있다.

술 담배 안 하고 만남도 절제하며 지난해 500점 넘게 작품을 했다. 어마어마한 결실은 숨쉴 공간도 없이 쌓여만 간다. 예전의 대작은 폐기한 것도 많다. 좋은 작가의 기준이 얼마나 잘 팔리는지로 수렴되는 한국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5월 24일까지 서울 종로구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열리는 독일의 거장 안젤름 키퍼(63)의 개인전은 이런 현실을 되돌아보게 한다. 1970년대 나치와 유대인 문제 등 독일의 금기를 다루면서 시대와 역사에 대한 반성을 제기한 키퍼. 중세 연금술과 고대 유대교를 접한 뒤 1990년대 들어 생명과 우주, 종교와 신화 등 근원적 주제에 천착해온 그의 근작을 보여주는 자리다. 흔히 반대되는 것이라고 여기는 독일적인 것과 고대 유대교의 신화. 그러나 둘은 하나로 통한다는 것이 작가의 생각이다.

3∼5m에 이르는 두꺼운 질감의 회화들, 납으로 만든 책, 20개의 패널과 건축물로 구성된 설치작업. 작품에서 풍기는 신비하고 마술적인 이미지와 압도적 규모에 입이 벌어진다. 연금술사들이 신비의 금속이라 칭한 납을 비롯해 양치식물, 나뭇가지, 흙과 모래 등 다양한 오브제로 생명의 순환을 표현한다. 워낙 거대해 쉽게 팔릴 작품이 아니지만 그는 전후 독일이 낳은 최고 작가로 당당히 존경받는다. 독일 통일 이후 1993년 프랑스로 이주한 그는 정부가 제공한 아비뇽 부근 50에이커 땅에 자리한 작업실에 틀어박혀 지낸다. 세상에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그는 “스타가 되기를 원한 적은 없다. 작품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기를 바랐을 뿐”이라고 말한다.

훌륭한 예술작품은 자신과의 잔혹한 싸움을 통해 길어 올리는 것인가. 시절의 트렌드를 읽어내는 예민한 감각과 재능으로 각광받는 스타들이 있고, 또 한편에 세속과 격절하듯 자발적 유배생활과 스스로 선택한 고독 속에 사로잡힌 영혼들이 있다. 그 사이 광활한 은하계에 무수한 예술가가 점묘를 구성한다. 현대의 고독한 연금술사에 가까운 예술가들,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독락당 대월루는/벼랑 꼭대기에 있지만/옛부터 그리로 오르는 길이 없다./누굴까, 저 까마득한 벼랑 끝에 은거하며/내려오는 길을 부셔버린 이.’(조정권의 ‘독락당’)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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